‘한사만 제6권’을 쓰려고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공부하다가 고종의 무능, 당시의 국정 난맥상 등 대한제국의 민낯을 엿볼 수 있는 통계를 찾았기에 공유합니다.
고종은 1897년 10월 대한제국 선포 후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7년간 총리대신 27명, 궁내부대신 23명, 외부대신 27명, 내부대신 23명, 탁지부대신 32명, 군부대신 33명, 법부대신 28명을 임명합니다. 1898년 한 해에만 총리대신 8명과 외부대신 10명을 임명합니다.
당시 정부는 오늘날처럼 한 명의 총리가 자신의 내각을 구성하여 일정 기간 유지하는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고종이 대신들을 개별적으로 임면했습니다.
그렇다고 인재를 널리 등용한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 회전문 인사였습니다. 예컨대 윤용선은 여덟 차례나 총리대신을 지냈습니다.
| 직위 | 1897. 10. - 1904. 2. 대신을 역임한 인물들 |
|---|---|
| 의정(총리대신) | 심순택, 김병시, 윤용선, 조병세, 이근명 |
| 궁내부대신 | 민영규, 이재순, 이재완, 민영소 등 |
| 내부대신 | 박정양, 이근명, 이건하, 민병석, 김주현, 조병호, 등 |
| 외부대신 | 민종묵, 조병직, 박제순, 이도재, 조병식 등 |
| 탁지부대신 | 심상훈, 조병호, 고영희, 민영기, 조병직, 조병식, 민병석, 김규홍, 김성근 등 |
| 군부대신 | 민영환, 이종건, 민병석, 윤웅렬, 이지용, 민영철, 신기선, 이근택, 이봉의 등 |
| 법부대신 | 조병직, 서정순, 유기환, 권재형, 이도재, 신기선, 조병식, 한규설, 이재극 등 |
| 학부대신 | 이도재, 신기선, 민병석, 이건하, 박정양, 김규홍, 민영소 등 |
| 농상공부대신 | 김명규, 권재형, 민병석, 민영기, 이종건, 김규홍, 민종묵 등 |
전문성은 물론 전혀 없었고 고려대상도 아니었습니다. 동일 인물이 외부·법부·탁지부·학부 등 여러 부처를 옮겨 다니거나 다시 같은 자리에 임명되었습니다.
민병석(閔丙奭)은 내부·탁지·군부·학부·농상공부 등 여러 대신직을 반복 역임했습니다. 조병식(趙秉式)은 외부·탁지·법부 등 여러 대신직 및 참정에 반복 임명되었고 신기선(申箕善)은 학부·법부·군부 등 여러 부처 대신을 반복 역임했습니다.
고종은 ‘국정’, ‘행정’의 철학은커녕 기본 개념조차 없었던 사람인 듯합니다.
전문성도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군주 개인의 호불호/사감으로 정부 각 부처 수장들을 이렇게 자주 교체한다면 나라가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대한제국 선포 후 1년여가 지난 1898년 12월 말, 당시 미국 공사이던 호러스 알렌(Horace Allen)은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지난 2주일 남짓한 기간 동안 한국에는 사실상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국무대신들이 임명되었지만 바로 다음 날이면 해임되곤 했습니다. 각 부처의 관청은 문을 닫았고 공무는 중단되었으며, 서울은 사실상 선동가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지방에서는 세금이 전혀 들어오지 않고 있으며, 국고는 완전히 고갈되었습니다.” [National Archives, Dispatch Book, U.S. Legation to Seoul, no. 167, Allend to Hay, Dec. 23, 1898. Peter Duus, The Abacus and the Sword: The Japanese Penetration of Korea, 1895-1910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pp. 129-130에서 재인용.
광복절에 즈음하여 조선은 나라를 왜 빼앗겼는지 보다 정확히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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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E
당시의 편파적인 인사제도에서, 전문성과 능력을 중시하는 인사제도로 변한 것은 (ex) 『출생을 넘어서(Beyond Birth)』 의 제2의 신분집단) 외부의 힘과 내부의 수요 중 어느쪽이 더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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