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촌 서재에서

구한말 조선 지식인과 '친일개화파'의 탄생

'윤치호 일기' 중에서

2026.08.22 | 조회 150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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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bong

1893 11 1, 윤치호는 일기에 유려한 영어로 다음과 같이 씁니다.

“If I had means to choose my home land at my pleasure, Japan would be the country. I don't want to live in China with its abominable smells nor in America where racial prejudice and discrimination hold their horrid sway, nor in Corea as long as its infernal government lasts. O blessed Japan! The Paradise of the East! The Garden of the World!”

번역을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내가 마음대로 내 조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일본을 택할 것이다. 나는 구역질 나는 냄새가 진동하는 중국에서도, 끔찍한 인종적 편견과 차별이 위세를 떨치는 미국에서도, 이 지옥 같은 정부가 존속하는 한 조선에서도 살고 싶지 않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양의 낙원이여! 세계의 정원이여!”

구한말 조선의 지식인들 중에 조선이 처해있는 안보 위기와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피부로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윤치호는 극단적인 예외였습니다. 그의 간단한 이력만 살펴보아도 그가 조선 사람 뿐만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의 그 어떤 지식인보다 세상을 넓고 깊게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마음의 고향은 일본임을 일기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모리 대학 유학 시절의 윤치호    
     에모리 대학 유학 시절의 윤치호    
'윤치호 일기'
'윤치호 일기'

, 19세기 말 조선 지도층의 무지와 무능과 부패, 열강의 실력과 적나라한 패권 경쟁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은 물론 일본, 중국, 미국에 오래 살면서 일어, 중국어, 영어를 완벽하게 구상하고 각 나라의 삶을 직접 경험했던 윤치호가 볼 때 그 당시 조선 사람이 살만한 나라는 일본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친일개화파의 실체입니다.

윤치호는 188116세의 나이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당시 일본의 대표적 계몽사상가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1832–1891)가 설립 동인사(同人社)’에서 영어와 일어를 배우고 188318세에 조선에 부임하는 초대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의 통역으로 귀국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고등학교를 일본에서 다니면서 일어와 영어를 배운 셈입니다.

나카무라 마사나오
나카무라 마사나오
루시어스 푸트
루시어스 푸트

1884 12월의 갑신정변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개화파였기에 1885 20세에 통역직을 사임하고 상해로 망명하여 중서서원((中西書院, Anglo-Chinese College)’에 입학합니다. (‘갑신정변의 공포를 경험한 푸트 공사도 이때 조선 정부에 알리지도 않고 귀국해버렸기에 윤치호가 통역직을 유지하는 것도 무리였습니다.) 중서서원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영 알렌(Young J. Allen)이 설립한 학교로 모든 수업은 영어와 중국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윤치호는 이곳에서 4년 간 수학 하면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고 1887년 세례를 받습니다.

영 알렌
영 알렌

1888년 알렌의 강력한 추천으로 미국 내슈빌의 밴더빌트대학(Vanderbilt University)에 유학하여 신학을 전공하고 1891년 애틀랜타의 에모리 대학에서 (Emory University) 인문학 석사 과정을 밟습니다. 미국 유학 중 방학 때는 인근 도시의 교회나 단체들의 초청으로 조선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학비를 벌기도 합니다. 1893년 에모리를 졸업하고는 모교인 상해 중서서원으로 돌아가 교편을 잡습니다. 1894 3월에는 중서서원을 졸업한 중국의 근대 여성 마수진(馬秀珍)과 결혼합니다. 조선 사람 최초의 국제 결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1902년 부인 마수진(마애방)과 자녀들과 함께
1902년 부인 마수진(마애방)과 자녀들과 함께

그렇다면 위의 일기는 윤치호가 중서서원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쓴 것입니다. 조선, 일본, 중국, 미국을 다 공부해보고, 살아보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중국 상해에서 영어로 강의를 하고 있던 윤치호는 그 누구보다 이 나라들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선택한 나라는 일본입니다. 물론 1904-1905년에 이르면 윤치호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일본을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이 내용은 다음 뉴스레터에 담겠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 침탈 문제를 떠나 조선이 근대국가를 건설하는데 따라야 할 모델은 중국도 미국도 아닌 일본이라는 신념은 변치 않습니다. 구한말 조선의 친일개화파는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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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ancis

    1
    약 24시간 전

    잘 읽었습니다. 정말 동북아에서 보기 드문 세계 정세를 잘 아는 분이었네요. 이런 분이 조선 말기 10명만 있었어도 1910년 국치가 그렇게 허망하게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요. 결국 자강이 되어야 동맹도 연대도 승수효과가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다음 편을 기대합니다.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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