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운수 좋은 날

2026.09.10 | 조회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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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수 좋은 날

 

가끔 이유 없이 운이 좋은 날이 있다. 나의 오늘이 딱 그랬다.

 

눈을 붙인 지 겨우 두어 시간 만에 깨어나 시계를 본 순간 턱 숨이 막혔다. "뜨악! 지각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예약한 도시락 찾아오기, 강의실 환기와 간식 정리, 그리고 교수님 맞은편에 시계를 맞춰 놓는 일까지. 트라우마 집단상담의 코-리더(co-leader)를 맡고 있다 보니 챙겨야 할 세세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평소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나로서는 이렇게 시간에 쫓기며 여러 일을 조직적으로 해내야 하는 상황이 무척 버거웠다. 그래서 늘 미리 도착해 일을 다 마쳐두고 자리에 앉아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어 진정시키곤 했다. 그래야만 다음 일정들을 차질 없이 소화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소화하려면 세 시간 전부터 서둘러 나가야 했는데, 오늘은 그 절반으로 시간이 동강나 버린 것이다.

 

"출근 시간 딱 겹쳤네. 망했다." 투덜거리며 급하게 길가로 뛰어나가 앱으로 택시를 잡는 순간, 배차 알람이 울렸다. 가쁜 숨을 내쉬며 차에 오르자마자, 도로변에 길게 서 있던 자동차들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꽉 막혔던 도로가 거짓말처럼 뻥 뚫렸다. 미리 주문해 둔 김밥을 찾는 데도 단 1분이면 충분했다. 모든 상황이 나를 위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불현듯 소설 한 편이 뇌리를 스쳤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 왜 이래. 나 이러다 김 첨지처럼 되는 거 아냐?' 그래도 행운은 계속됐다. 센터 건물 입구에 도착하니 어서 들어오라는 듯 유리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엘리베이터는 마침 1층에서 대기 중이었다. 강의실에 들어가 보니, 누군가 전날 청소를 깔끔히 해두고 불도 켜둔 채 퇴근한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모든 게 일사 천리였다. 시간은 여유로웠고, 내 마음은 특별히 그라운딩(Grounding) 기법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강의가 시작되고 집단 나눔 시간에 가족사가 건드려지자, 슬슬 불안과 함께 공황장애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숨을 다스리려 애쓰던 바로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오빠는 어머니 대출 관련해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자신이 짊어진 부담감과 가족을 향한 불평을 퍼붓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뒤이어 여동생에게서는 왜 일처리를 깔끔하게 하지 못해 자신한테까지 불똥이 튀게 하냐며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럼 그렇지. 결말이 당연히 이래야지.' 오히려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 나를 향한 선생님들의 걱정 어린 시선이 느껴져 부끄러움과 미안함, 그리고 상처 입은 자존심이 뒤섞여 마음이 복잡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시던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오늘 참 많은 걸 경험하셨네요. 막힌 일이 풀리는 기쁨과 함께, 어려운 순간엔 문제 해결에 집중하며 다양한 감정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나는 그때 쿵! 하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나의 날들은 '운이 좋은 날''운이 나쁜 날', 딱 두 가지로만 정의되어 왔다. 내 삶은 수많은 사건과 감정, 그리고 느낌들이 교차하는 다채로움 그 자체였는데, 단 한 번도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늘 나쁜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지금을 놓치고, 정작 불행이 현실이 되면 평온을 느끼는 이 우스꽝스러운 방어기제를 이제 멈추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강의가 끝나고, 홀로 남아 청소와 뒷정리를 하며 하루의 끝에 밀려드는 묵직한 피곤함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느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가운 커피우유 한 팩을 사 마시며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을 오롯이 느꼈다. 지하철역 출구를 나설 즈음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갑자기 장대 같은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평소라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을 터였지만 오늘은 가만히 멈춰 서서 빗소리를 들었다. 비를 피해 황급히 날아가는 새들의 다급한 날갯짓과 세상을 가득 채운 진한 잿빛 하늘, 그 사이를 세차게 가르는 빗줄기, 그리고 그 풍경 속을 우산도 없이 반소매와 반바지 차림으로 아무렇지 않게 씩씩하게 걸어가는 한 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선물처럼 찾아온 이 역동적인 순간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나쁜 것은 나쁜 대로 내 인생의 생생한 현장을 즐겨봐야겠다. 늘 새드 엔딩이라는 각본에 저당 잡힌 삶에서 벗어나, 바로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나로서.

-조비온


게슈탈트 치료(Gestalt Therapy): 1950년대 프리츠 펄스와 로라 펄스 부부가 창시한 실존주의 심리치료 이론으로,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치유할 힘이 있다고 믿으며 다음의 세 가지 핵심을 강조한다.

지금-여기 (Here & Now):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이 아닌, 현재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

알아차림 (Awareness): 현재 내 몸의 신체 감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알아채는 것.

전체성 (Gestalt): 독일어로 '전체'를 뜻하며, 좋은 모습뿐 아니라 아프고 나쁜 감정까지 있 는 그대로 수용하여 온전한 '하나의 전체'로 살아가는 것.

 

 

 

 


📖감상 한마디

 

 

현진건의 소설을 제목으로만 차용한 게 아니라 구조적으로 잘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특히 일상적인 사건들의 진행을 함께 따라가며 느꼈던 왠지 모를 불길함이 가족과의 대화에서 결국 터지는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구체적인 소재들을 통해 변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박현경

 

 

운수 좋은 날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고민할 만한 주제를 담고 있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듯한 날이 주는 위안이 있으면 그럴듯한 고통을 수반하는 인생이 참 부질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그런 날들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한 사람의 일상을 통해 많은 위로를 얻은 글이었습니다. 마지막 문단처럼 삶이 더 윤택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오광락

 

 

초반에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중간에 불길한 예감과 맞물리는 사건을 배치한 구성이, 유명한 소설의 제목을 인용한 것과 맞물려 효과를 극대화시킨 것 같습니다. 글이 진행되면서 쫓기듯 몰아치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고 그 과정을 개인의 신체반응으로 나타내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게 만든 점도 좋았습니다. 짧은 글을 풍요롭게 해주는 많은 장점들을 만날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안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자신만의 운수 좋은 날로 변신시킨 그 발상과 절묘한 구성이 빛나는 글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기에 원작보다 오히려 더 공감하며 긴장하며 기대하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원작과는 다르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결말인 것도 좋았습니다.

 

-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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