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둠을 소개합니다 - 깎아지른 벼랑 너머에는 (7)

군대에서 겪은 우울증 이야기

2023.02.15 | 조회 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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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별 에세이

나의 어둠을 소개합니다

 

깎아지른 벼랑 너머에는 (7)

 

아버지 기수의 전역 이후 경비소대에서 두어 달 정도를 더 있었던 것 같다. 두어 달 동안 있어야 하는 일이라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시간이었다. 그건 누군가의 말처럼, 우울한 사람에게는 시간이 멈추기 때문일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처럼 위안과 절망을 동시에 주는 말은 없었다. 숨통을 죄는 우울감은 영원불멸할 것만 같았다. 그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만 할 것 같았다.

 

신병 시절에는 훈련소에서 화생방 훈련이라는 걸 받았다. 방독면을 쓴 채로 최루 가스를 터트린 실습실 안으로 입장한 후, 잠시 방독면을 벗고, 다시 쓴다.  그 안에서 방독면을 벗은 채로 몇 분이나 머물렀는지는 모르겠다. 숨을 잘 참고 있으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얼굴을 불로 지지는 듯한 느낌에 날숨 한 번을 들이신 것까지는 선명히 기억한다. 그 후의 기억은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실습실 밖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을 뿐이다.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자청해서 돌아왔던 경비소대에서의 마지막 두어 달이 그랬다.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든 버티려 악다구니를 썼지만, 어느 순간 나는 들숨을 마시고 말았다. 그 안에서 수많은 몸부림과 눈물과 고함과 악다구니가 있었지만, 지면을 길게 할애하며 이 곳에 쓸 가치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처음 경비소대에서 겪은 생활과 소름이 끼치도록 똑같았기 때문에. 결말까지도 그러했다. 나는 경비중대의 행정병으로 돌아왔다. 대전의 군인 병원에 2주일에 한번씩 다니며 약물 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일과 시간이 끝나면 도망치듯 교회에서, 교회를 가지 못할 때는 휴게실에서 기타를 쳤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간부의 감시망 아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처지는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병사 두 명이 전역을 앞두고 있었고, 나는 그 중 한 자리를 꿰어찰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집중력이 엉망이었고, 하는 일마다 실수 투성이었고, 선후임들과 척을 지고 있었지만 주어진 일이 있었고 그 일을 어떻게든 해냈다. 

 

그러나 나의 자리에서 나의 할 일을 하고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부끄러움은 소대에 경비병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내 동기들은 여전히 경비소대에 있었다. 낮에는 뙤약볕을 쬐고 밤에는 서슬 퍼런 바람을 맞으며 초소를 지키고 있었다. 잘하든 못하든, 그 친구들은 여전히 처음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심지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시도에 실패하기까지 했다.

 

아마 나는 그 절망감과 부끄러움으로부터 도피하려 몸부림을 쳤던 것 같다. 그랬던 시도 중 하나가 핸드폰을 몰래 가져온 것이었다. 간부가 아닌 일개 병사가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상상도 못 하던 때였다. 덕분에 병장들이 휴가를 다녀오며 챙겨 온 핸드폰은 짬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주변 선후임이 하나 둘 핸드폰을 몰래 들여오는 것을 보며 나도 슬쩍 핸드폰을 기타 가방에 숨겨 가져왔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으면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것만 있으면 부대의 철책 너머의 세상과 언제든 연결될 수 있었으니까. 손바닥만한 핸드폰은, 군복을 벗은 나는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희나에 올라온 글을 읽고 댓글을 달거나, 여자친구와 마음대로 카톡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몇 안 되는 숨구멍이었다. 기타를 치거나, 소위 짬타이거라고 부르는 부대 안의 고양이들과 놀아주는 건 시간을 죽일 수 있게 해줄지언정 외로움을 해소해주지는 못했으니까.

 

문제는 그 핸드폰을 간부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나도 짬이 찰 만큼 차서 함께 생활관을 쓰는 병사들 중에 내 위에 선임들은 모두 전역하고, 내 아래의 후임들 일고여덟 명만 남아있을 즈음이었다. 소위 말하는 왕고가 된 것이다. 내 핸드폰을 적발한 군견소대장은 다행히 이 일을 조용히 넘겨 주어서, 별다른 징계 절차는 없이 핸드폰을 택배로 집에 돌려보내도록 시켰다. 문제는 내 후임들이었다. 간부들이 이 일을 계기로 핸드폰 단속에 나서면 자신들도 몰래 쓰던 핸드폰을 못 쓰게 되지 않겠느냐고 자뭇 심각해졌다. 나는 왕고가 되고 나서야 후임들의 주도로 기수열외를 당하게 되었다. 그 후로 나를 볼 때 내게 경례를 하는 후임은 없었다.

 

병사는 핸드폰을 가지고 오면 안 되는 규정을 내가 고의로 어겼다는 것에 대해 변명을 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 후임들의 대응이 그리 합리적인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도둑질은 나쁜 일이다. 그런데 들킨 도둑질과 안 들킨 도둑질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나쁠까? 들키지 않은 도둑이 들킨 도둑에게 돌을 던지는 게 도의적으로 옳은 걸까? 더욱이 죄질에 비해선 가벼운 처벌이었다만 들킨 도둑이 이미 그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은 후라면?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나를 몰아세우는 후임들에게 제대로 된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대역죄를 지은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얼마 안 남은 전역까지 생활관과 중대 행정실에서 보내는 일 초 일 초마다 나는 납으로 된 대기를 헤엄치는 것 같았다. 온 힘을 다해 헐떡여야 겨우 폐 속에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겨우 들이쉰 한 줌의 납은 나를 더 숨막히게 만들었다.

 

2년의 군 생활이 마치 깎아지른 벼랑을 맨 손으로 오르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바위 모서리를 움켜쥔 손을 놓치는 순간 어떤 무저갱으로 굴러 떨어질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지치고 숨이 막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를 더 공포에 질리게 한 것은 그 끝이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이 벼랑의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기진맥진해 도착한 마지막에는 무엇이 나를 기다릴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더 올라갈 길이 없으니 내려갈 길만 있을 것이다. 그 내려갈 길이 완만하고 평화롭다면, 애초에 이 길이 벼랑길일 리가 없었다. 깎아지른 벼랑의 너머에는 추락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게 전역을 기다리는 나의 마음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절망에 익숙해지기 충분하도록 길었다. 나는 그 익숙한 절망이 사라지는 것마저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마 다음 편으로 군 시절 이야기도 끝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독 길고 힘든 연재였습니다.

 

 

글쓰기 공동체 흰 종이 위의 날개 소속 작가입니다. 심리상담과 문학치료를 공부했습니다.

https://litt.ly/heena_day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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