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둠을 소개합니다 (12) - 내게 어울리는 곳 (2)

내게 어울리는 곳 (2)

2022.08.10 | 조회 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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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별 에세이

나의 어둠을 소개합니다

 

내게 어울리는 곳 (2)

 

마침 네이버 카페란 것이 인터넷에서 스멀스멀 나타나던 시기였다. 몇몇 글쓰기, 또는 판타지 소설을 주제로 하는 카페를 들락거리다 나는 그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을 끌어모아 호기롭게 새로운 카페를 차렸다. 다행스럽게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 친구들은 90년생, 또는 91년생이 대부분이었다. 빠른 생일로 91년에 태어나 90년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닌 내게 그 친구들은 학교에서 만난 또래들이나 나름이 없었다. 나이도 성별도 없이 누구나 자유로운 곳이 인터넷이라고 법석을 떨던 시절이었지만, 동갑내기들과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뭔지 모를 든든함이 있었다.

 

처음 만들었던 카페의 이름은 시크릿 드림이었다. 비밀스러운 꿈. 누구나 비밀스러운 꿈 하나쯤은 안고 살아가지 않을까. 나처럼 학교나 집에서는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아이도 근사하게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마음 속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글쓰기로 풀어보자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지만, 아마 시크릿 드림이라는 이름에는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진하게 묻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곳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오래 고민했다. 길게 풀어 쓰자면 책 한 권도 너끈히 나올 만큼 이야깃거리가 많고, 그렇게 줄줄이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어둠을 소개하기 위한 글이니 굳이 군더더기를 길게 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짧게 쓴다.

 

중학교 3학년의 겨울 방학, 기억하기 편하도록 1월 1일에 맞춰 열었던 네이버 카페 시크릿 드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카페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쁜 한국어 이름을 쓰고 싶다는 마음에 흰 종이 위의 날개, 줄여서 희나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운영자도 몇 번 바뀌었지만 지금은 내가 다시 희나의 장을 맡고 있다. 

 

희나에서 나는 두 번의 연애와 이별을 했다. 나 말고도 많은 친구들이 이 곳에서 연애를 하고 웃고 싸우고 헤어지고 눈물을 짰다. 연애를 하고 실연을 할 때마다 친구들은 나를 술자리로 불렀다.

 

친구들끼리 작당을 해서 다른 카페에서 분탕질을 하기도 했다.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을 보아 아마 사소한 이유였겠지만, 그 때의 우리는 도원결의를 맺는 삼형제 못지 않게 비장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런 분탕질마다 승전을 거듭했다. 아마 패전이 있었더라도 내가 까먹어버렸을 것이다. 죽이 맞는 악동들이 모여 사고를 치고 다니는데 한두 번 패배의 쓰라림 따위가 무엇이 중요했을까.

 

우리는 일요일 저녁마다 채팅방에서 합평을 열었다.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를 나온 전공자는 거의 없어서 내용은 어설펐을지언정 분위기는 화기애애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개싸움이 벌어졌고, 누군가는 눈물을 터트렸다. 다행히 내가 입을 열 때만큼은 다들 나에게 집중해주었다. 내가 뭐라고, 내가 뭐가 그리 잘난 사람이라고. 덕분에 눈물이 터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달래주는 것도 항상 내 몫이었다.

 

동대문의 아늑한 카페를 아지트 삼아 정모도 열었다. 우리는 에이포 한 쪽도 되지 않는 유치한 엽편들을 쓰고 읽으며 동대문 골목골목의 식당을 탐험했다. 8할은 맛이 없었고, 1할은 기막히게 맛이 없었으며, 비로소 먹을 만한 1할을 발견하면 우리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내가 여는 정모에 오고 싶다며 부산에서, 대구에서 당일치기로 친구들이 서울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방에 사는 회원들을 위해 지방에서 정모를 열어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일 년에 두 번씩 정모를 빙자한 MT를 열고 있었다. 보통은 여름에 서울, 겨울에 부산에서 정모를 열었다. 아르바이트로 힘들게 모은 돈을 정모에서 교통비와 술값으로 탕진하는 대학생 시절이었다.

 

글이라는 장난감을 어떻게 해야 더 재미있게 가지고 놀 수 있을지 우리는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후라이드 치킨 한 마리를 걸고 글쓰기 대회를 열고, 가상의 인물이 되어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낭독회를 열고, 가끔은 상품을 모아 단편제 같은 것도 열었다. 좀 엉성하고 뒤죽박죽이면 어떠랴. 재미는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족했다.

 

우리는 그렇게 어린 시절의 흑역사라고 해도 좋을 글들을 인터넷 게시판에 쌓아 갔다. 차곡차곡 쌓인 것이 글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나이를 먹었다.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고, 대학원에 갔으며, 이따금은 누군가의 결혼 소식도 들려왔다.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몇 백 배는 더 많은 시간을 나눴을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피로연 밥을 먹으며, 나는 새삼 인연이란 참 신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13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는 다른 친구에게 모임의 장 자리를 넘겨 주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글쓰기 모임의 운영자로서 정체기를 맞았다는 판단이 있기도 했다. 내가 발전하지 않는다면 이전보다 이 모임을 더 잘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중학생 꼬맹이가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어깨에 지고 있었던 책임감에 지친 탓도 있었다. 한동안은 후련했지만, 나는 오래 공허함을 느꼈다.

 

그 13년이 남들보다 특별히 가치있는 시간이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긴 어려울 것이다. 남들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듯 나 또한 좋아하는 것을 밤을 새며 파고들고, 친구들과 작당하여 사고를 치고, 사랑을 하고, 울고 웃으며 자라났다. 차이라면 그 곳이 제도권의 학교가 아니라 내가 만든 놀이판이라는 것 뿐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주눅 든 시선을 문제집으로 내리깔았던 아이에게도, 대학교에서 들어가서는 학과 행사와 술자리를 어색하게 어슬렁거리다 이내 자취를 감추곤 하던 아싸에게도 날개는 있었다. 그 날개를 당장 여기서 펴지 못한다면 그럴 수 있는 곳을 기어이 찾아 헤맬 수 있었던 용기가 내게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용기 또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같다는 점이다.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라고 말한다면 우스울까. 그건 내가 기어코 아버지를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유 중 하나이다. 앞서 나는 사회적 민감성과 자극추구가 높은 편이라고 이야기했고, 이건 나의 선천적인 기질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만큼 나에게 정서적 안정을 줄 수 있는 집단이 절박했을 것이다. 그게 높은 자극 추구와 결합하면서, 믿을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라면 겁없이 새로운 모험에 뛰어드는 ‘꿈쟁이’다운 행동으로 나타난 것 같다.

 

늙은 아버지는 여전히 나와 같은 꿈쟁이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기어코 일을 벌리고 만다. 그게 골프였다가, 샌드아트였다가, 빨래방 사업이었다가, 이제는 당구가 되어서 요즘 아버지의 서재엔 조그만 미니 당구대가 놓여 있다. 서재의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앙증맞은 당구대를 볼 때마다 나는 왠지 웃음이 난다. 내가 아닌 나를, 아버지 속의 나를 보는 기분이다. 아버지도 내가 글을 쓰는 모습을 볼 때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글쓰기 공동체 흰 종이 위의 날개 소속 작가입니다. 심리상담과 문학치료를 공부했습니다.

https://litt.ly/heena_day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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