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험만 보면 망치는 거야! (下)
고3 수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성적 문제였다. 고2때까지만 해도 성적은 만족스러워서 나는 꽤 자신만만해져 있었다. 중학생때는 중하위권이었던 성적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계속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치솟기만 하던 성적에 처음으로 정체기가 왔다. 내가 문학치료와 상담을 공부했다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순도 100%의 문과형 인간이라 가장 내 속을 썩였던 건 수학이었다. 수학 성적은 찔끔 올랐다가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다음 시험에서 수직낙하를 해 버렸다. 2등급을 턱걸이로 넘기면 다음 시험에서는 4등급이 나오는 식이었다. 기를 쓰고 수학을 공부하며 나는 인생에서는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나는 내 머리가 특별히 비상하거나 내가 대단한 노력파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잔머리는 굴러가는 편이라 조금만 공부해도 성적은 곧잘 나왔지만, 나는 객관적으로도 게으른 편에 가깝다. 재수를 할 때 자습하는 시간을 분 단위로 재어 보니 하루에 두 시간을 넘는 날이 별로 없었을 정도니까. 학교에서 하루종일 공부만 했던 건 그게 내가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주변에 으스대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하니 성적이 올라가는 데 한계가 찾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때의 나는 그걸 몰랐다. 내가 엄청나게 비상한 머리를 가진 대단한 노력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뭐, 그 나이에 성적이 좀 오름세를 타면 그 정도 자뻑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 우월감을 갖게 된 것은 내가 같은 반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몇 안 되는 내 친구들은 죄다 이과여서 나는 점심 시간마다 이과 반에 올라가 그 친구들과 어울렸다. 같은 반에 있는 학생들은, 거친 표현을 쓰자면, 절반 정도는 양아치였다. 내가 나온 곳은 인문계 고등학교였는데 예체능반이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예체능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문과에 몰려 있었다. 그 중에 진지하게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공부는 하기 싫고 몸 쓰는 건 만만해보이니 생활체육이나 하겠다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런 학생들과는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쳐둔 것처럼 교류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실이 떠나가라 낄낄대며 음담패설을 해대고 상스러운 장난을 치는 것까지도 그 보이지 않는 벽이 막아주지는 못했다.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던 나는 그런 음담패설은 듣는 것만으로도 질색이었다. 나는 내가 저런 양아치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걸 입증해주는 것이 성적이었다.
내가 그때 겪은 수험 스트레스는 내가 가진 우월감과 현실이 다르다는 인지부조화로부터 왔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는데 내 성적표는 아무리 봐도 천재가 받아들 만한 성적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수능은 점점 가까워지는데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수학 성적은 롤러코스터를 탔고, 그 롤러코스터는 대체로 하향세였다. 수능 전 마지막 모의고사를 앞두고는 나도 나름대로 극약을 처방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과목은 다 제쳐놓고 수학만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 모의고사 점수는 수능 점수나 다름없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었고, 그래서 이 때 나는 진심으로 절박했었다. 단 한번이라도 수학 1등급을 받아보고 싶었다. 여기서 수학 점수를 올리지 못하면 앞으로도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그 마지막 모의고사를 보는 날에는 아니나 다를까 긴장이 도졌다. 이번에 망치면 수능에도 망친다는 생각으로 손을 덜덜 떨면서 시험지를 넘겼던 것 같다. 가장 난관이었던 그 놈의 수학은 하필 지독하게 어려웠다. 이번 시험도 망했다는 패닉에 빠져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는데,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감독을 보던 선생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오 분, 십 분이 지나도 선생이 나타나지 않자 양아치들이 슬금슬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 씨발, 문제 존나 풀라고 만든 거야? 병신새끼, 공부를 좀 하고 지랄을 하던가. 남 말 하네. 너 3번에 몇 번 했냐? 나? 찍었는데? 푸흐흐흐, 좆병신 새끼가. 그런 실없는 욕지거리가 교실 여기저기서 툭툭 비어져 나왔다.
그런데 가장 욕을 푸짐하게 지껄이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나였다. 다만 입 밖으로 그걸 내뱉는 대신 속으로 꾸역꾸역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씨발, 대가리에 똥만 쳐든 새끼들이 존나 시끄럽네. 니네 때문에 내가 집중을 못하잖아. 제발 아가리 좀 닥쳐, 좀 닥치라고!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끈질기게 문제를 풀었다. 주변이 시끄럽던 어쨌든 이번엔 성적을 올려야 하니까. 이번에도 망하면 수능도 망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나도 저 양아치들과 다를 게 없어지니까. 그러나 그렇게 기를 쓰고 작성한 답안지를 제출하는 순간에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번 성적이 역대 최악이 되리라는 직감이었다.
뜻밖에도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아서 더 문제였다. 수학 외에 다른 과목들은 그럭저럭 양호한 성적이 나왔다. 수학은 간발로 1등급을 놓쳤지만 지금까지 모의고사를 보면서 나온 것 중엔 가장 괜찮은 성적이었다. 그런데, 그 패닉 상태에서 푼 것 치고는 성적이 잘 나왔던 게 더 문제였다. 저 양아치 새끼들이 입만 닫고 있었으면? 그 때 시험 감독이 자리에만 있었으면? 그럼 1등급 나왔을 거잖아. 저 새끼들만 아니었으면, 저 미친 양아치 새끼들만 아니었으면. 성적표를 받아들자마자 나는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울었다. 슬픔이 아니라 분노에 찬 통곡이었다. 지나가던 선생님 한 분이 놀라서 달려와 등을 토닥였다. 나는 독기에 찬 목소리로 신경 끄고 가세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음날 나는 힘들게 마음을 추스리고 등교했다. 그 양아치들이 나를 흘긋흘긋 보며 비웃고 있었다. 신경 끄고 가란다, 킥킥, 지나가며 그런 소리도 들었던 것 같다. 어눌한 말투가 콤플렉스였던 건 그 때도 여전했다. 내 말투를 흉내내며 놀리는 소리가 귀에 선연했다. 그러나 나는 애써 내가 잘못 들었으리라 생각하고 무시했었다. 그리고 그 날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전교 1등에게도 말을 걸 일이 있었다. 사소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었고, 아마 담임 선생님이 했던 말을 내가 대신 전달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때 전교 1등이 했던 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 심드렁한 표정,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그냥 신경 끄고 가시던가.”
그 말은 송곳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고통이 누군가에겐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날 나는 처음 알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 일을 잊어버리려 오래 애썼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성공했다. 지금은 저 시절 같은 반 양아치들과 전교 1등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잊으려 애썼기 때문에 나는 치유되지 못했다. 용서는 더더욱 하지 못했다. 가증스러운 이들의 이름을 잊었기에 이들을 향했던 미움과 분노는 갈 곳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미움과 분노는 나 자신을 향했다. 최근에 들어서야 나는 전교 1등의 목소리가 나의 내면에서 자기혐오의 목소리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넌 노력해도 어차피 안 된다. 애써봤자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그런 목소리였다.
자기혐오의 목소리는 죽어있는 동시에 살아 있었다. 그 목소리를 깨달은 후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정말 수학시간에 시험 감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때 이미 나는 자기혐오와 신경증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일은 그저 끓는 기름에 튄 불꽃 하나였을 뿐이다. 이때 이 일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다른 일로 터졌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다. 내가 조금만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어땠을까. 그래서 가시를 바짝 세운 고슴도치처럼 타인을 경계하는 대신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타인을 바라볼 줄 알았더라면, 그래서 그 양아치들을 미워하지 않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이번에도 나는 답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 같다.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