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산, 내 뜻대로 설계하는 방법 '신탁'

경제 신문을 자주 들여다 보는 사미들이라면 최근 몇 년 사이 신탁이라는 단어가 이전보다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거, 눈치 챘을 거예요. 유례없이 빠른 고령화와 1인가구 증가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새로운 자산 관리 방식이 필요해졌기 때문이에요. 

과거에는 돈을 열심히 벌어 자산을 불리는 건 고민거리가 되지 못했어요. 굳이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아도 내가 남기고 갈 유산은 당연히 내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법적 가족이 되진 못했어도 평생 나와 함께한 동거인이나 반려동물에게 남겨주고 싶다는 이도 있고, 사회의 좋은 일에 쓰이길 바란다는 사람도 있죠. 

🌱信託: 믿고 맡긴다 

믿을 신(信), 부탁할 탁(託). 

신탁은 믿고 맡긴다는 이름 그대로 위탁자가 특정 재산을 수탁자에게 이전하고 수탁자는 정해진 목적에 따라 재산을 관리, 운용, 처분하는 제도예요. 단순한 재산 보관을 넘어 위탁자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유연하고 체계적인 금융 인프라로 기능하죠. 

좀 더 간단히 말하자면, 내 재산을 믿을 수 있는 금융사에게 맡기고 내가 정한 방식대로 쓰이도록 설계하는 제도라는 건데요. 여기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먼저 위탁자예요. 재산을 맡기는 사람이죠. 그리고 그걸 관리해주는 주체를 수탁자라고 하는데요. 은행이나 보험사 같은 금융사가 대부분 담당합니다. (최근에는 증권사나 자산운용사들도 일부 특화 신탁을 내놓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그 결과물을 받는 사람은 수익자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수탁자는 수수료를 수익으로 가져가게 되는데요. 보통 신탁한 재산의 규모나 운용 방식에 따라 수수료율이 달라지기 때문에 계약 전 반드시 확인하는 게 좋아요. 

🙋상속이나 유언이랑 어떻게 달라?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재산은 어떻게 될까요?

가장 전통적인 방식은 바로 상속이에요. 법에서 정해둔 순서와 비율에 따라 법정 상속인이 자동으로 나눠 갖게 되는 거죠. 

예를 들어 부모와 자녀가 있을 땐 자녀와 배우자가 일정 비율로 나누고, 배우자가 없으면 부모가 받는 식이죠. 장점은 별도 절차가 없어도 자동으로 진행된다는 거예요.

하지만 단점도 뚜렷하죠. “딸에게는 집을, 아들에게는 예금을”처럼 원하는 방식으로 나눠주고 싶어도 법정 상속 비율이 우선이기 때문에 내 의지가 반영되기 어렵습니다. 남은 가족 간 분쟁이 생기기도 쉽고요. 

ⓒgettyimagesbank

유언은 어떨까요? 유언장을 작성해두면 훨씬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무엇을 줄지”를 정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내 통장은 조카에게, 내 수집품은 친구에게”라고 명시할 수 있죠.

하지만 유언은 사망 후에야 공개·집행되기 때문에 내용의 진위 여부를 두고 법적 분쟁이 생길 수 있고 유언장이 아예 분실되거나 훼손될 위험도 있죠. 

반면 신탁은 조금 다르게 작동해요. 내가 살아 있을 때부터 내 자산을 맡겨두고 원하는 방식으로 운용·분배되도록 설정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돈에서 매달 100만원씩 생활비를 쓰고 사망 이후엔 남은 돈을 매달 조카에게 용돈으로 지급하다 조카가 결혼하면 1000만원을 한번에 지급한다”는 식으로요. 유언이나 상속으로는 불가능한 세밀한 설계가 가능한 거죠. 

상속은 법대로, 유언은 내 뜻을 담을 순 있지만 불안정, 신탁은 내 뜻을 미리 계약으로 확정해 실행력까지 보장된다는 차이가 있다고 보면 되겠죠. 그래서 요즘처럼 가족형태가 다양해지는 사회에서 신탁이 더 현실적인 자산 관리 도구로 주목받고 있는 거예요. 

📂신탁도 종류가 있다 

신탁은 맡기는 재산의 종류와 운용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는데요. 크게 3가지 축으로 먼저 나눠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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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특정금전신탁은 이름 그대로 금전, 즉 돈을 맡기면서 그 돈을 ‘특정한 방법’으로 운용하도록 위탁자가 직접 지시하는 상품이에요. 보통 은행 창구에서 판매되는 특정금전신탁은 원하는 기간 동안, 원하는 방식으로 굴려달라는 성격이 강하죠. 

비교적 단순한 방식의 상품이기 때문에 진입 장벽이 낮지만 통상적으로 단기적인 수익률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자산 관리 및 상속과는 그 목적이 달라요. 

재산신탁(비금전신탁)은 현금이 아닌 부동산, 주식, 채권 등의 재산을 맡기는 신탁이에요. “이 아파트를 대신 관리해 달라”, “이 주식을 팔아 수익금을 나눠 달라”처럼 구체적인 자산 관리 요청을 할 수 있죠. 특정 자산을 목적에 맞게 관리할 수 있지만 해당 자산에 대한 감정·등기·관리 비용이 따로 발생해요. 

마지막으로 종합재산신탁은 여러 종류의 자산을 한 번에 맡겨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신탁이에요. 내가 가진 자산 전부를 한 통에 담아 운용·분배할 수 있는 거죠. 올인원 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치매·노후 대비 자산 관리 도구로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다만 우리나라에선 여러 제도적 장벽으로 인해 종합재산신탁 활성화가 아직 더딘 편이에요. 

🔎요즘 주목받는 신탁 상품은 

이제 고령화와 1인가구 증가로 최근 특히 주목받는 신탁 상품들을 소개할게요. 

먼저 유언대용신탁이 있어요. 혼삶레터 98호에서도 한 번 소개한 적 있었죠? 이름 그대로 유언장을 대신하는 신탁이에요. 

평생 모은 재산을 내 뜻대로 남기고 싶지만 일반 유언장은 작성도 까다롭고 법적 분쟁도 많죠. 그런데 이 신탁은 생전에 은행이나 금융사와 계약을 맺으면 내가 죽은 뒤 자산이 어떻게 분배될지 계약 내용대로 실행돼요. 

예를 들어 “조카가 대학에 입학하고 난 후부터 졸업하기 전까지 매월 80만원씩 지급하고, 졸업 이후 남은 돈은 일시금으로 준다” 같은 구체적인 조건을 거는 게 가능해요. “내 재산 일부는 환경 단체에 기부한다”처럼 일반 유언장으로는 복잡하게 처리될 수 있는 내용을 유연하게 설계할 수도 있고요. 

보험금청구권 신탁도 있어요. 사망보험금을 일시에 주지 않고 신탁사가 대신 받아 조건대로 나눠주는 제도인데요. 기존에는 가족이 한 번에 거액의 보험금을 받으니 자산 관리가 서툰 경우 금방 다 써버리거나 분쟁이 생기기도 했죠. 이 신탁은 그런 문제를 막아줘요. 

예를 들어 “내가 사망하면 아내에게 매월 200만원씩 생활비를 지급하고 손자가 결혼할 때는 3000만원을 일시금으로 준다”처럼 나눠 지급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 보험금이 내 의도대로 오래 쓰이게 만드는 장치인 거죠. 

다만 현재 제도상 제한이 있어요. 최소 보험금 3000만원 이상, 대상은 생명보험 계약에 한정되고,  수익자도 배우자와 직계가족으로만 제한돼요. 그래서 동거인이나 반려동물에게 직접적으로 보험금을 남기는 건 불가능하죠.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며 특히 주목받는 상품으로 성년후견·돌봄 신탁이 꼽혀요. 치매나 중증 질환으로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게 될 상황에 대비하는 신탁이죠. 

예를 들어 “치매 진단을 받으면 매월 요양원 비용으로 200만원씩 지급하라”, “간병인 비용은 OO재단을 통해 지급해라”처럼 생활비·의료비를 자동으로 처리할 수 있어요. 

만약 이런 신탁을 미리 걸어두지 않으면, 치매 진단 이후 일정 단계가 되면 본인 명의의 계좌인출이나 부동산 매매가 법적으로 불가능해져 자산이 사실상 ‘동결’되는 문제가 생겨요.

이렇게 치매로 인해 묶이는 자산을 치매머니라고 하는데요. 2050년이 되면 이 치매머니가 500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우려스러운 전망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 성년후견·돌봄 신탁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죠. 

다만 아직 제도적으로 초기 단계라 상품 다양성이 부족하고 돌봄 기관이나 사회복지단체와 직접 연결되는 구조가 미비하다는 지적도 많아요. 

마지막으로 내 특정한 목적에 맞춰 자산을 쓰게 하는 기부·특수 목적 신탁도 있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기부신탁과 반려동물 신탁이에요. 

내가 사망하고 난 뒤 이 재산을 특정 단체에 기부해 달라고 계약할 수 있고, 반려견을 평생 돌보는 비용으로 매월 80만원을 지정 보호자 계좌에 지급해달라는 것도 가능해요. 실제로 일부 은행들은 ‘펫 신탁’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상품을 내놓기도 했죠. 

다만 현재 법적으로 반려동물은 권리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람을 수익자로 지정해야 해요. 수익의 혜택을 반려동물이 받게 되는 구조인 거죠. 또 기부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세무 이슈나 신뢰성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도 단점으로 꼽혀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높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사미들도 느꼈을 거예요. 여러모로 참 유용해 보이는데 왜 아직 우리 주변에서 신탁이 흔히 쓰이지 않는 걸까?🤔 하고 말이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제도적인 벽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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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종합재산신탁을 예로 들 수 있어요. 모든 자산을 한데 묶어 관리할 수 있는 올인원 신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이 제도가 유명무실한 상태거든요. 국내 전체 신탁 수탁고 중 종합재산신탁 비중은 0.06%에 불과해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첫째, 재신탁이 사실상 금지돼 있어요. 예를 들어 은행이 현금과 부동산을 맡았다면, 부동산은 부동산 전문 신탁사에 다시금 위탁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죠. 그런데 이런 재신탁이 현재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예요. 한 기관이 모든 걸 직접 맡아야 하니 효율도 떨어지고 금융사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힘든 거죠. 

둘째, 현금 비율 규제예요. 종합재산신탁 안에서 현금이 40% 이상이면 공동운용이 제한되거든요. 고령층 자산 구조를 생각해보면 예·적금 같은 현금성 자산 비율이 높잖아요. 그래서 이 규제 때문에 정작 필요한 사람들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생기는 거예요. 

우리보다 고령화사회에 일찍 진입한 일본의 사례를 보면 차이가 더 확연히 드러납니다.

일본은 포괄신탁이라는 이름으로 종합재산신탁을 적극 활용하고 있어요. 고객이 가진 현금·부동산·증권 등을 한데 묶어 신탁사가 관리하고 상황에 맞게 나눠쓰도록 설계할 수 있죠. 덕분에 일본 전체 신탁 자산 중 포괄신탁이 50% 이상을 차지한다는 통계도 있어요. 

일본은 우리와 달리 재신탁을 허용하고 공동운용 규제도 완화했기 때문인데요. 금융사가 못하는 분야는 다른 전문기관과 협업하고 자산 구조에 따라 운용을 유연하게 할 수 있으니 자연스럽게 시장이 커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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