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호] 가상과 현실의 리얼리티를 연결하다 : ‘기어이’ 인터뷰

💌 뉴스레터 32호

🌠인디&임팩트는 3회에 걸쳐 VR 영화를 제작하거나 배급하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기획기사로 소개하고 있는데요. 👩‍💻

[29호]'VR 영화 <소녀램프라디오> 제작노트'(최민혁 감독), [30호]'양날의 검을 지닌 VR 영화, 공감과 연대를 도모하기 위한 가능성에 대한 고민들'(조한결 감독) 에 이어 마지막으로 뉴미디어를 기반으로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시도하고 있는 '기어이' 스튜디오 이혜원 대표와의 인터뷰를 소개할게요. 🎤

'AR', 'VR' 등 아직은 낯선 XR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실험의 의미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따라가다 보면, 다가올 미래의 새로운 소통 방식과 스토리들을 만나보실 수 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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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최민혁 감독의 <소녀램프라디오> VR 영화의 드라마터그로 참여하면서 '기어이'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기어이의 작업과 활동을 지켜보면서 VR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어떻게 기어이와 같은 집단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이머시브 스토리텔링 스튜디오 기어이 (Immersive Storytelling Studio GiiOii)는 2020년 창립 이후 가상 현실(VR), 증강 현실(AR) 콘텐츠를 제작, 배급하며 우리나라 관객과 XR 콘텐츠의 만남을 주도해왔다. 기어이의 창립멤버인 이혜원 대표에게 기어이의 활동과 현황을 들어보았다.

[기획] 가상과 현실의 리얼리티를 연결하다 : 이머시브 스토리텔링 스튜디오 ‘기어이’

Q. XR 제작과 배급을 하는 곳이 있다는 게 낯선 분이 있을 것 같다. 기어이를 창립하게 되신 계기나 과정이 궁금하고 어떤 비전이나 미션을 가지고 창립했는지 이야기 듣고 싶다.

기어이는 2020년도 1월에 설립됐다. 기술이 어울리는 이야기라는 뜻으로 원래는 각자 VR과 뉴미디어 혹은 영화 영역에서 테크놀로지를 결합하는 작업을 하던 사람들 5명이 뭉쳤다. 멤버 각자가 당시는 XR(확장현실)이라고 불렀던 - 또 메타버스라는 표현으로 유행하다가 지금은 이제 공간 컴퓨팅(Spatial Computing)이라고 용어는 변경되고 있지만 - 그 기술의 지향점을 늘 관심 있게 지켜보며 새로운 기술이 하나의 스토리텔링 미디움(Medium)이 될 수 있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XR 콘텐츠의 봄과, 겨울을 보며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다

2012년, 2013년도에 세계적으로 이미 한번 VR 붐이 있었다. 그때 마치 VR이 미래의 기술이자 혁신적인 무언가인 것처럼 각광을 받았지만 붐은 곧 사그라들었다. 그 당시에 국내에서는 이 장르가 갖고 있는 본질적으로 다른 감각적인 측면에 주목했다기보다는 단순히 재미와 쾌감을 주는 기술로 여겨졌는데, 반면 해외에서는 다양한 예술가와 회사가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고, 많은 기술적 진보가 일어나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어떤 신(Scene)들이 형성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았다.

우리는 왜 기술 인프라가 뛰어난 한국에서는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우리도 충분히 좋은 아이디어와 창·제작자들이 있지만 프로덕션 회사 입장에서는 기획자가 없거나, 기획자는 프로덕션 회사를 만나기 어려운 등 생태계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가 그 중간에서 판을 짜서 아이디어를 직접 같이 작품화할 수 있다면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기술보다 스토리텔링이 기반이 되는 콘텐츠를 만들다.

시작하면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기술보다 스토리텔링이 기반이 되는 콘텐츠를 제작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기업들은 그냥 단편적인 기술을 콘텐츠에 갖다 붙이면 된다는 1차원적인 접근들이 많았고 이것이 VR 붐이 꺼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몰입하고 경험하고 기억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서 파생된 감정적인 새로운 발화가 일어났을 때다. 창립 멤버 대다수가 영화나 다른 내러티브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어서 이게 우리의 가장 큰 핵심 역량이자 경쟁력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영화는 흑백에서 컬러가 되고 또 영화관에서 다양한 스크린으로 유통의 방법만 바뀌었을 뿐 계속 변화해왔으나 그 핵심에는 스토리텔링이 있었기에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팀이 되어 이 장르가 충분히 창의적인 미디엄으로서 가치가 있음을 느끼게 해줄 만큼의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 내자는 내부적인 미션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제작해보니 기술적 장벽과 난이도가 엄청나게 높았다. 우리가 관객의 인생을 바꿀 만한 콘텐츠를 만들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 같고, 이제 기어이는 그 과정 중에 있다고 볼 수 있다.

Q. 기어이는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부터 유통 배급까지 XR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활동을 인상적으로 펼쳐가고 있는데, 주요 활동을 소개해달라.

우리가 만든 콘텐츠를 누가 볼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유통이나 배급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분야는 배급의 개념이 존재한다고 보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시장이 작고 관객이 콘텐츠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다. 해외에 좋은 작품들이 있어도 영화제를 통해 일 년에 한 두 번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사람들의 인식이 2013년도 콘텐츠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좋은 작품들을 빠르게 보여주는 기회를 만들고자 ‘가상이상’이라고 하는 작지만 정기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다. VR을 보는 사람들은 영화처럼 리뷰 사이트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반응을 알기가 어려워서, ‘가상이상’에서 한 2년 동안은 적극적으로 관객 설문과 일대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한 2~3년 동안 콘텐츠를 만들고 보여주면서 계속 관객들 피드백을 받았다.

VR의 라이브니스(Liveness)와 공동체성을 발굴하는 장르 실험

동시에 이 이머시브 스토리텔링이라는 장르 탐색과 실험을 해나갔다. <미싱 픽쳐스>는 위대한 감독들이 여러 이유로 제작에 실패한 작품을 만들 기회를 제공하는 VR 다큐멘터리 시리즈이다. 총 5부작 시리즈로 미국 아벨 페라라 감독 편을 시작으로 대만 차이밍량 감독편, 한국 이명세 감독, 일본 가와세 나오미 감독 등이 참여했다. 이 작업은 해외 스튜디오들과의 공동 제작 프로젝트였고, 당시 무리가 되는 작업 규모임에도 기어이가 글로벌 지향의 스튜디오를 미션으로 가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시도한 작업이다.

한편으로는 내러티브 실험 측면에서 이머시브 씨어터(Immersive Theatre)라고 하는 XR과 실시간 퍼포밍이 결합된 작업을 배급하고, <파인드 윌리>라는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기도 했다. <파인드 윌리>는 가상현실 공간에서 배우와 관객이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는 이머시브 연극이다. VR을 경험한 사람들은 고유의 매력을 빨리 알아채지만, 같이 하는 사람이 없기에 쉽게 지친다. 내가 왜 영화관에 가고, 극장에 공연을 보러 왜 갔는가를 생각해보면 작품이 좋아서도 있지만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의 아우라가 좌중을 압도했을 때의 그 느낌과 옆에서 사람들이 집중하면서 함께 웃고 우는 이런 공동체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우리가 진짜 예술 경험이라고 정의하는 것에 원래 본질성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VR이 공간적인 미디어로서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무대의 공간을 옮겨온다는 표현을 하지만 실제로 공연장이 갖고 있는 속성 중에 이 라이브니스(Liveness)와 배우의 실시간 퍼포밍, 그리고 함께 관극하는 이런 공동체적인 체험을 갖고 올 수 있다면, VR에 지속성과 생명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해외에서 이런 작품들이 아주 초기 단계지만 한두 작품씩 나오는 걸 보고 해봤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해외에서 했던 <웰컴 투 레스피스>라는 작품을 보자마자 우리가 한국 버전 해보겠다고 제안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기술적인 노하우를 많이 습득하게 되면서 자체 스토리로 이머시브 시어터인 <파인드 윌리>까지 하게 되었다.

기어이는 XR과 관련된 교육과 전시 등의 활동도 하고 있다. XR 장르는 아직까지 생태계가 완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작품을 만드는 동시에 관객을 ‘만들면서’ 가야 한다. VR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크다보니 인식을 바꿔줄 수 있는 좋은 콘텐츠를 제공하는 일도 해야 하고, 창작자 입장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펼쳐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가 교육이나 전시를 통해 관객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이런 부가적인 활동도 하고 있다.

가상과 현실의 리얼리티가 만나는 지점

그리고 최근 기어이 활동에서 공연과의 접목도 두드러지고 있는데, 아무래도 VR이나 AR 등에서 쓰이고 있는 게임 엔진이나 모션 캡처와 같은 기술들이 여러 퍼포먼스에서도 사용 가능하다보니 이 기술을 통해서 조금씩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장점들이 있다.

우리가 기어이를 만들 때부터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앞서 말한 스토리텔링, 오리지널에 대한 추구와 더불어 리얼리티와 다른 리얼리티의 연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건 현실이니까 이 감각을 절대 놓치지 말자라는 기조가 있었는데 그렇기에 VR을 감상하는 오프라인 공간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중심점이다. 기어이는 가상 현실(VR), 증강 현실(AR) 기반의 콘텐츠를 만들지만 진짜 현실과 동떨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까 <동시감각> 등 오프라인에서 더 강력한 공연 장르와의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게 성공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시도이고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감각을 열어줬다는 측면에서는 많은 분들이 긍정적인 신호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어서 이런 활동을 이어나가게 될 것 같다.

Q. 기어이는 가상과 실제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관객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다. XR이 기존의 영화나 다른 미디어와 어떤 다른 경험을 관객에게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조금 원론적인 얘기지만 요즘 기어이에서 정의하는 우리만의 이머시브 경험은 영화와 비교하자면, 영화는 스크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우리의 뇌에서 다시 자신의 것으로 갖고 와서 우리 내부에서 뇌와 심장이 반응하는 경험이라면, VR은 헤드마운트를 쓰는 순간 내가 직접 움직이면서, 예전에 영화가 만들어 냈던 그 세계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경험이다. 그냥 글로 쓰면 너무 단순한 얘기지만 이건 공연처럼 직접 체험해봐야 아는 미디어이다.

초등학생들이랑 작업하면서 느낀 점은, 이들은 친구와 또래를 항상 게임에서 만났기 때문에 게임화(Gamification)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들은 컴퓨터로 만들어진 세상이 내 일상인 것처럼 여기기에 그동안은 컴퓨터 안에서 그냥 마우스를 움직여서 상호작용했던 것을 넘어서 VR에서 온 몸을 통해서 상대방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쉽게 체득한다. 컴퓨터를 매개로 소통한다는 것이 부정적인 이미지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기술이 완전 내재화된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훨씬 더 적극적인 형태의 미디어 체험을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VR에서는 관객이 주인공이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VR에서는 카메라의 권한이 관객에게 넘어가 있다. 물론 여전히 감독이 중심이 되는 연출을 하는 작품도 많기에 이런 접근이 보편적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관객이 주인공이 된다. 나는 이 경험이 레거시 미디어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모두가 좋아하진 않지만 그동안 디지털 환경에서 대중에게 주도적인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주인공이 되는 것을 훨씬 선호하는 경향성이 보인다.

VR의 내러티브는 3차원의 건축적이고 테마파크적인 경험을 설계하는 것

또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VR은 물리적인 거리를 없앤다. 우리가 했던 이머시브 시어터 <파인드 윌리>도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접속해서 함께 체험할 수 있기에 물리적인 경계, 지역적인 경계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언제든지 우리가 VR 기계만 쓰면 우리가 만들어놓은 세계관이나 세상 속으로 관객이 접속할 수 있다. <파인드 윌리>를 할 때 그 작품에 출연하셨던 배우분조차도 각각의 공간에서 참여를 했는데, 배우가 최초로 재택근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신기해했던 게 인상적이었다.

VR은 훨씬 더 큰 영역과 공간을 다 에워싸고 있는 환경 안에서의 어떤 배우나 내러티브가 펼쳐지고 있다 보니까 이게 되게 연극적이면서 동시에 또 게임적인 성격을 띤다. 영화가 편집의 미학이라서 연출가가 이야기를 숨겼다가 펼쳤다가 하면서 서사를 만들어낸다면, VR 제작은 건축과 비유할 수 있다. 그동안은 우리가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고민을 했다면 이제부터는 마치 건축가가 사람들의 동선을 예측하고 건물을 짓는 것처럼 관객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고민해야한다. 원래 인간이 3차원에 살고 있어서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전의 영화적 문법과는 완전히 다른, 테마파크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Q. 비선형적인 스토리텔링으로 VR 이머시브 시어터를 진행하다 보면 관객이 예상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이 필요하기도 하고 이야기가 갈라지는 다양한 분기점에 대해서도 고민했을 것 같은데 VR 영화나 이머시브 시어터를 하면서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게 있는지?

XR 스토리텔링을 하나로 정의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요새 거꾸로 고민하는 것은, 결국 창작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왜 꼭 VR이나 혹은 이머시브 시어터로 해야 되는가에 대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런 저런 내용이 들어가야 된다고 얘기해도 이 대답이 탄탄하지 않으면 끝에 가서는 스토리가 계속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라이브 퍼포밍 VR을 왜 이머시브 ‘시어터(연극)’라고 부르나, 연극계에서는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결국은 장소 특정형 연극할 때와 마찬가지로 넓은 공간에 펼쳐진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해야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파인드 윌리> 같은 작업을 이머시브 시어터라고 표현하고 있고, 새로운 이야기 전달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거다.

VR은 융합적인 기획이 필요한 예술

관객에게 주도성이 있다는 것은 관객을 몰입시키거나 집중시켜야 하는 필요가 커졌다는 뜻이다. 프로시니엄 무대라면 관객은 무대에서 보이는 것에 (가끔은 졸지라도)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VR에서는 아무리 배우가 화자로서 얘기하고 있어도 잘 들리지 않는 환경이다. 만지고 싶은 오브젝트가 많고, 돌아다니고 싶은 공간이 끊임없이 있기 때문에 관객을 지금 말하고 있는 화자나 상황에 몰입시키기 위해서는 결국은 게임(Gamification)적인 요소, 즉 뭔가 선택지를 주거나 주도권을 관객에게 넘기는 설정 같은 것들이 필요해진다. 예를 들어 <파인드 윌리>에서는 기억을 주워오라는 미션 수행을 하는데, 이런 미션 수행을 통해서라도 스토리에 집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콘텐츠의 길이도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점인데, 어느 정도 길이여야 몰입이 깨지지 않을까 예측한다는 점에서는 디지털 기반의 기획 방식이 많이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VR을 진정한 융합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정말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공간은 건축가처럼 생각해야 하고, 시나리오나 스토리텔링이 그 자체로도 흡입력이 있으려면 연극이나 영화적인 것도 고민해야 된다. 또 구체적인 구현에 있어서는 게임적인 요소들이 게임 레벨 디자인하듯이 고안되어야 하는데, 관객이 장면1에서 뭘 하고, 장면2에서 무엇을 해서 집중이 떨어지지 않게 할 것인가 하는 게임의 레벨 디자인 기획이 필요하다. 동시에 디지털 미디어 관점에서는 애플리케이션 기획이나 웹사이트 혹은 전자제품 기획을 할 때 UI나 UX를 고민하는 것처럼 VR을 체험하는 관객의 관점에서 UX를 고민을 안 하면 이게 또 다 무너지는 거다. 관객이 각 장소에 몇 분을 머무를 수 있는가 등의 촘촘한 설계도 필요하다보니 기획 난이도가 높고, 그러다 보니 작업자들이 처음에 들어와서는 너무 흥미롭고 즐거워하다가도 다른 영역에서 부딪히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VR이 스파셜 미디어(Spatial Media, 공간 미디어)라는 관점을 끝까지 유지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이머시브 시어터에서는 공간성이 중요한데, 관객이 각 공간에 들어설 때 폐쇄적인 혹은 개방적인 느낌처럼 그 공간이 주는 느낌을 느끼고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공간이 주는 아우라도 필요하다. 기존 연극에서는 무대 세트보다는 배우가 끌고 가는 아우라가 중요하고, 뮤지컬만큼 화려하지 않아도 느낌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VR의 공간은 어떻게 보면 화려하거나, 화려하지 않더라도 정교하고 공간의 이미지만으로도 우리가 전달하려고 한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어야 의미가 생긴다. 이것은 연극과는 다른 미디어 기획에서 쓰이는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Q. 흥미로운 관점이다. 산업이나 지형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XR에 대한 관심이 분명히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생소한 관객들도 많고 심지어 영화 제작자들도 낯설게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한국에서의 지금 XR 콘텐츠의 현황과 지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서 잠깐 말했지만 2010년대 초반에 VR에 대한 관심도가 엄청나게 올라갔다가 사그라졌고 또 메타버스 때 확 올라서 작년까지도 영향이 있었다가 작년 말에 또 약간 수그러들었다. 얼마 전 애플의 비전 프로가 나오면서 다시 스멀스멀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부천국제영화제의 Beyond Reality는 몇 년 간 계속하고 있었는데 잘 모르고 있던 사람들도 관심을 많이 주고 있다. 이쯤에서 다시 VR을 봐야 되나라는 관심이 생겼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우리나라는 VR 분야의 활동은 대다수가 산업계에서 두드러지는 반면 AR은 상대적으로 VR보다 굉장히 범위가 넓다. 하다못해 인스타그램 필터처럼 카메라가 켜지면서 현실의 모습과 그 위에 덧입혀지는 것도 결국 넓은 범주에서 AR로 보다 보니, VR과 대비해서 AR은 일상에서 즐기는 수준으로 올라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두가 핸드폰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된 게임이나 AR 관련된 프로모션 활동들도 늘어나고 있다. 반면 VR은 사실 우리 국내에 배급된 기기가 15만 대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이 현격한 차이를 생각했을 때는 AR에 비해 VR을 스토리텔링적으로 경험하는 일은 좀 드문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비전 프로 보급형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고 VR 제작 수업을 하는 학교들이 많아지다보니 향후에 많은 창작자들이 VR을 할 걸로 예상이 된다. 예전에는 XR 지원을 주로 콘텐츠 진흥원처럼 콘텐츠 업계 혹은 미디어 업계만 주목해서 했었는데 요즘은 문화예술위원회나 문화재단과 같은 예술 영역에서도 아트&테크라는 넓은 이름 안에서 적극적으로 XR을 포함하려는 환경이 되었다. 따라서 지원과 교육도 늘어나고 사람들의 인식이 점점 더 바뀌고 있다. 내년 혹은 내후년 쯤에는 이런 변화가 결과로 드러날 거라고 생각하지만 현재의 현황을 두고 봤을 때는 아직은 정말 한국이 만들어낸 콘텐츠 자체는 아주 절대적으로 적다.

아직 기술이 완성된 것도 아니고 디바이스가 스마트폰처럼 게임 체인저로서 하나의 혁명이 되는 수준만큼 보급에 도달해 있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 모두가 과정에 있지만 그럼에도 사실상 정말 VR을 콘텐츠의 하나로 볼 수 있을 만한 콘텐츠는 많이 나와 있지 않다. 기기보다는 콘텐츠 부족이 핵심적인데, 이 부분을 쉽게 해결하기가 어려운 게 관객은 스펙타클은 이미 영화관에서 즐기고 있고, 탄탄한 내러티브는 OTT 시리즈물에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VR만이 보여주는 뭔가 유니크하고 정말 독창적인 경험이 있어야 VR 콘텐츠를 볼 것이다. 그래서 VR, AR도 ‘나는 이게 너무 좋아’라고 하는 견고한 로열 팬층이 생겨야 되고, 그러려면 그럴 만한 콘텐츠가 나와야 되는데 아직은 VR 작업이 다른 장르 콘텐츠만큼 완성도 있는 작업이 많지 않고 시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새로운 창작자들이 젊은 감각으로 이런 고민을 많이 한다면 향후 한 2~3년 안에는 훨씬 더 새롭고 좋은 작업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 한다.

영화 쪽에서 VR을 다시 주목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영화가 요즘 IP 비즈니스 개념으로 바뀌다보니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어떤 건 웹툰으로 만들고 어떤 건 웹드라마로 만드는 식의 경우가 많은데, VR도 이 세계관의 하나로 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SF 기반의 작업들은 촬영 자체를 요즘 버추얼 스튜디오에서도 많이 하고 컴퓨터 그래픽스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3D 소스가 있으면 이를 VR로 만드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쪽에서도 VR 작업을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Q. 마지막 질문이다. 말씀처럼 최근 몇 년 사이에 정부와 기관에서 XR, 메타버스로 재정적인 지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재정적 지원 안에 XR의 사회적 역할 등에 대한 고민은 적었던 것 같다. XR 관련 공적 지원 방식이나 시스템 상에서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는지 궁금하다.

지원과 관련해서 프랑스나 대만 사례를 많이 언급하는데 프랑스는 XR을 아예 처음부터 스토리텔링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관점이 강했다. 그래서 결과물이 어떻든 간에 창의적인 이야기에 훨씬 더 집중한다. 프랑스는 2년씩 지원하기도 하고 창작작업 자체에 중점을 두지, 배급이 되어야 된다거나, 무슨 기술을 썼나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만도 창작자를 발굴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서 이번 부천국제영화제에서도 좋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이 작품들은 VR 안에서도 장르가 세분화될 수 있고, 이 장르를 계속 구축할 수 있는 아티스트로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만큼 열린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중요한데, 한국은 단순하게 양적이고 성과로 보여줘야 하는 지원이 너무 많다. 보통 5개월 만에, 10개월 안에 만들어야 하는 이런 구조 안에서 절대 창의적인 작업이 나올 수가 없다. 우리나라도 지금 VR 생태계가 성숙한 단계가 아니기에 많은 창작자가 나와서 이 매체가 사라지지 않게끔 창작 환경 조성을 위한 지원이 가장 우선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관객의 높은 기대치도 당면한 어려움 중에 하나다. 왜 그렇게 다들 XR에 실망을 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정부에서 만들어낸, '이제 앞으로 메타버스 시대가 온다더라, VR이 미래다' 하는 선전이 한 몫 하는 것 같다. 이런 과도한 기대 없이 백지 같은 상태에서 VR 콘텐츠를 경험했어도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부정적이였을까. VR의 매력은 한번 봐서는 잘 모른다. 관객 분들이 편견을 내려놓고 여러 번 경험을 해보기를 권장 드린다.

동시에 창작자의 네트워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VR 기술 난이도가 높아서 맨땅에 헤딩하는 케이스들이 여전히 나오고 있는데, 정보가 공유되는 커뮤니티만 있어도 이렇게까지 개별적으로 힘들어하지 않을 거다. 해외에서는 깃허브나 디스코드 등으로 서로 공유하는데, 우리나라만 이상하게 폐쇄적인 것 같다. 오히려 폐쇄적이지 않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공공이 해줬으면 하는 역할 중에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창작자가 더 많아질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 그래야 생태계가 생기고, 생태계가 있어야 우리가 만들고 있는 콘텐츠가 그냥 사장되지 않고 보여질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정말 좀 더 많은 분들이 이 안에 들어와서 좋은 커뮤니티가 형성됐으면 좋겠다. 필요하면 우리에게 많이 물어보고, 네트워크를 통해서 서로를 도와주는 구조가 되기를 바란다. 🔗

🌈 인터뷰어 | 권세미

연극 연출가이자, 드라마투르그, 극작가이다. 젠더, 소수자, 비정상성이 무대에 수행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뉴미디어 기술과 극장의 결합을 통해 관객 경험을 확장할 수 있는 작업에 주목한다. 현재 다매체를 활용한 트랜스미디어 그리고 공연과 연계한 뉴미디어 기술을 주제로 수학하며 공연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본 뉴스레터는 미디어운동에 대해 새롭게 질문하고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여러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찾아가기 위해 발행됩니다.

미디어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각종 담론과 현상이 범람하는 가운데 과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어 정작 중요하게 필요한 미디어의 변화는 무엇인지 관점을 제공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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