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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저작물의 이용과 생성형 AI

인사이트브리즈의 다섯 번쨰 뉴스레터

2023.10.27 | 조회 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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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책으로

글에서 시작하여 책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공유저작물의 이용과 생성형 AI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국가마다 저작물의 보호 기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저작자의 사후 몇 년이라는 규정을 두는데 우리나라는 사후 70년이라는 규정에 따르고 있습니다. ‘세계저작권협약을 제정한 유네스코조약(UCC)은 원칙적으로 저작자 생존 중이나 사후 모두 25년 이상 보호하는 것으로 정하였습니다만, 보호 기간이 자꾸만 길어져서 한미FTA의 교역 조건에 따라 우리나라도 저작자의 사망 후 70간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정부에서 공공의 목적으로 생산한 저작물과 저작권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공공 이용을 가능하게 한 저작물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이미 저작자가 사망한 지 오래된 작품들은 문자나 그림, 조각, 혹은 음악 저작물을 포함하여 모두 공정한 사용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구글의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같은 경우지요. 우리가 아는, 혹은 모르던 고전들이 거의 모두 올라 있습니다.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의 시창자는 미국인 마이클 하트인데 그의 이상은 전 세계 모든 책을 가상 도서관에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공유저작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대표적으로 공유마당이라는 사이트에 어문자료와 이미지, 영상, 음악, 폰트까지 올라 있어서 공정 사용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를 무료로 사용하게 하는 데에는 지적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라는 개념이 확산하면서 오히려 많이 사람들에게 창작물을 개방.공유하고자 하는 선의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스Creative Commons나 오픈소스Open Source라는 것들이 그런 예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터넷 상에서 여러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개된 저작물들의 공유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ChatGPT를 비롯한 Dall-E와 같이 수익을 위한 AI 프로그램은 무료로 제공된 수많은 인터넷 상의 자료를 학습하여 상업화하는 길을 열어버렸습니다. “디지털 공유지가 약탈되었다는 것인데요. 지난봄 미국 헐리우드에서 배우 및 작가들이 장기간 파업을 했던 것도 이러한 AI 산업의 무분별한 폭주에 저항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SF 작품(소설이나 영화 등)에서는 일찌감치 경고했던 일이지만 정작 눈앞에 그런 AI 세상이 현실로 조금씩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사회적으로 대화와 협의가 필요하고 그 합의를 바탕으로 제도적이고 법적인 조치가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창작성은 보호되어야 하니까요.^^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의 감상문 하나를 소개 합니다.

저는 스터디그룹 이음에서 격주로 행해지는 <중일독서회>에서 같이 책을 읽고 있는데요. 업무상 책을 많이 접하기는 하지만 순수하게 지식과 교양을 위한 독서는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많이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음이나 독서모임이 궁금하시면 https://cafe.naver.com/eeum1 네이버카페 eeum에 들어오시면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지난주 읽었던 책은 쓰시마 유코의 빛의 영역이라는 일본 작가의 소설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이혼 통보를 받은 젊은 여성이 4살 된 딸과 함께 독립적인 삶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매우 섬세하고 몰입감 있게 서술해서 저는 매우 좋았습니다. 같이 읽은 분 중에 오늘 리뷰를 쓰신 최지원 선생님은 번역자로 활동하시는데 제가 글을 공유하게 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좋은 생각, 좋은 글은 나눠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 최근 최지원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이 출간되었더군요. 영화가 좋다 여행이 좋다축하드립니다!!

 

결핍이 곧 힘이 되는 마법의 공간

쓰시마 유코의 빛의 영역을 읽고

 

화려한 상점가 한구석에 있는 어두운 골목에서 젊은 남녀가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다. 그때, 큰길 쪽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그러자 남자가 움찔하며 멈춰 선다.

소리의 근원은 너덧 살짜리 소녀. 뒤따라온 엄마는 둘째를 둘러업은 채 갓난쟁이를 태운 유모차까지 밀고 있다. 큰딸의 시선을 따라 남편을 확인한 여자가 아이를 잡아끌며 말한다. “아빠는 일하시는 중이니까 방해하면 안 돼.” 2019년에 개봉한 일본 영화 <인간 실격(원제: 다자이 오사무와 3명의 여자)>의 한 장면이다. 세 아이의 아버지인 다자이 오사무(본명: 쓰시마 슈지)는 위의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 애인과 함께 하천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났다.

영화 속에서 유모차를 타고 있던 갓난아기는 아버지처럼 소설가로 자랐다. 1979년에 발표한 작품이 바로 빛의 영역이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인 만큼 화자와 저자를 동일시하면 안 되겠지만, 작중 주인공의 처지가 쓰시마 유코 본인과 비슷해도 너무나 비슷하다. 자전적 소설로 오해받기 싫었다면 공통점을 이렇게 많이 넣었을까 싶다. 게다가 다자이는 생전에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라 연예인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창작물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가 어떻게 죽었고, 그의 딸들이 어떻게 아버지를 잃었는지, 일본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이다.

빛의 영역에서도 죽음이 곳곳에서 출몰한다. 남편의 성 외에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그래서 더 작가 본인과 겹쳐 보이는) 주인공 는 주변에서 누군가가 죽기 전에 빛을 통해 미리 죽음의 기운을 느끼며, 이 때문에 마치 자신이 죽음을 끌어들인 것만 같아 괴로워한다.

남편과 별거 후, ‘와 아이가 단둘이 살게 된 집은 햇빛이 가득 들어와 밝고 따뜻하다. 이제부터는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 그런데 이 집의 바닥은 온통 붉은색이다. 피와 죽음을 상징하는 색. 상충되는 이미지. 하지만 붉은색은 동시에 힘과 온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여기서 얼핏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빛과 죽음이 연결된다. 이후에 불꽃이나 화재처럼 반복해서 출연하는 불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주인공에게 빛과 죽음은 하나로 연결돼 있는 듯 보인다. 왜 그럴까?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살 집을 내 손으로 찾아본 일이 없었던 는 혼자 집을 보러 다니며 서서히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 그녀는 여태까지 늘 문제를 회피하며 다른 사람의 뒤에 숨어왔다. 별거 중인 남편과 처음 살림을 합쳤을 때, ‘한 남자에게 삶을 온통 맡기는 환희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제는 내 인생을 구원해줄 어떤 존재를 간절히 바라며 또 다른 대체물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내면의 결핍은 타인을 통해 매워지지 않는다.

애인이나 남편으로 대표되는 낭만적 관계는 근원적 상실이 반복되는 무대이다. ‘는 어머니와의 분리라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상실에 더해, 영아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현실적인 상실까지 겪었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결핍을 경험한 것이다. 그녀는 다른 여자와 이미 살림을 차리고 자식을 키우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는 남편을 원망하지만, 사실은 일부러 그런 남자를 골랐다고도 볼 수 있다. 오히려 정상적인가정을 가꿀 능력이 있는 성실한 남자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상실과 고통을 반복하려는 인간 정신의 신기한 작용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버려짐에 대한 오랜 두려움과 내가 부족해서 버려졌다는 자책감은 나의 자격 없음을 탓하게 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엄마로서(혹은 인간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고뇌한다. 그래서 이혼을 결심하지도, 그렇다고 다시 합치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태에 머무른다. 별거 중인 남편의 성과 같은 후지노 빌딩에서 조금은 그와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려 한다. 가부장적 사회의 담론도 그녀의 용기를 꺾어놓는다. “여자가 이혼녀로 살아봐야 제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면서.

하지만 빛으로 가득한 붉은 집에서, 주인공을 짓누르고 있던 초자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사를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건물 맨 위에 있는 물탱크에 금이 간다. 콸콸 쏟아지는 물에 아래층은 물난리가 나고, 옥상에는 은빛 바다가 펼쳐진다. 내면 깊이 헤엄쳐 들어갈 환경이 마련된 것처럼, 이때부터 주인공은 꿈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과 만난다. 처음에는 꿈속에서도 넌 뭘 해도 안된다는 남들의 비난을 듣지만, 점차 자신의 욕망이 그대로 투영된 꿈을 꾸게 된다. 욕망의 근원은 어린 시절에 빼앗긴 아버지이다.

꿈속에서 주인공은 병약해서 나를 안을 수도 없는 남자(아버지의 상징)에게 성적인 쾌감을 느낀다. 비행기를 타고 실종자(부재하는 아버지)를 찾다가 검고 깊은 진흙 속에 묻히며, “늪 어딘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그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워한다. 그리고 4~5살 때 자주 꾸던 꿈을 떠올린다. 꿈속에서 어린 그녀는 이미 죽고 없는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부친의 등에 몸을 기대곤 했다. 망자에게 온기가 있을 리 없건만, 아버지의 몸에서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공포와 환희가 뒤섞이고, 죽음 충동과 그에 따른 죄책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이렇게 그동안 억압해온 욕망의 실체가 드러난다. ‘는 삶보다 죽음에, 살아있는 자들보다 죽은 아버지에게 애착을 느낀다. 그것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신비로운 욕망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인간인 만큼, 죽음이 무서운 것도 사실이다. 죽음이 너무 무서워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 쾌락을 탐한다. 그녀에게 몸의 접촉은 곧 생()의 확인이다.

와 딸은 아빠를 상실했다는 같은 상처를 안고 있다. 딸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엄마인 는 딸이 지닌 기쁨의 안테나가 무뎌지기를 바란다. 젊은 시절의 자신처럼 고통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녀의 첫 남자친구는 너랑 있으면 내가 짐승이 된 것 같다며 의 성욕을 혐오했다. 하지만 서로를 나누는 일, 그건 몸의 감촉을 나누는 일 아닌가? 그것 말고는 대체 서로에게 무얼 구할 수 있는 건지라며 자신과 딸의 증상을 배척하지 않는다. 분노발작을 겪는 아이의 배를 쓰다듬으며나쁜 꿈은 물러가라고 주문을 외우고, 감기에 걸려 둘이 차례로 열 덩어리가 됐을 때는 물수건으로 서로의 몸을 닦아준다’. 모녀가 술에 취해 골목에 쪼그리고 있는 남자의 등을 쓸어주는장면은, 마치 현재의 와 과거의 내가 함께 손을 뻗어 연약한 아버지를 위로하는 것만 같다.

소설 속에서는 추락의 이미지도 반복된다. 추락하는 물체는 언젠가 땅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는 충돌의 순간을 상상으로 대체한다. 한 발달장애아(실제로 어려서 죽은 쓰시마 유코의 오빠도 발달장애가 있었다)가 아파트 통로에서 놀다가 난간을 넘어버려추락사하는데, 나는 그 아이가 추락하는 순간 빛의 급류 속에서 함성을 지른 듯한 환영을 본다. 초등학교 시절에 그녀의 동급생들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아이를 두고, 방화용 수조로 쏙 들어가 생명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환상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받아들일 방법을 창조한 것이다.

추락은 죽음이기도 하지만, 사회가 허용한 선을 넘어가는 타락혹은 탈출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딸은 자꾸만 창문을 통해 옆집의 거무죽죽한 기와지붕 위로 알록달록한 색종이를 떨어뜨린다. 어린아이의 장난은 인간의 가장 진실한 욕망을 반영한다. 이는 주인공이 꿈에서 본 화려한 색상의 모란앵무새와도 일맥상통한다. 집에서 탈출해 야생화된 새들은 나무에 주렁주렁 앉아 생명력을 발산한다. 사회적 몰락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딸과 함께 벚꽃 구경을 간 주인공은 연못 속에서 미끌미끌한 수초에 손발이 묶인 채 뼈로 변한 사람들이꽃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실제 작가의 아버지인 다자이 오사무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떠오른다.) 그 위에선 노랑, 분홍, 파랑 같은 색들이 반짝반짝빛나고 있다. 죽음은 암흑이 아니다. 오색찬란한 에너지이다.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일도 그리 두려워할 게 못 된다. 그 너머에선 새로운 생명이 요동치고 있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쳐 는 빛(혹은 죽음)의 힘과 뜨거움이 내 안에 존재함을 인정한다. 약품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여러 명이 사망한 밤에는, 예전과 달리 어떤 죽음도 예견하지 않고 붉게 빛나는 하늘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동안 잡지도 놓아주지도 못했던 남편과의 결별 또한 받아들인다. 이제 그녀는 불안정에 기대에 고통을 무한히 핥아먹던 나약한 인간이 아니다. 정식으로 이혼이 성립돼 남편의 성인 후지노에서 부모의 성으로 돌아오자, 드디어 후지노 빌딩에서 나갈 결심을 한다. 3층의 반쪽 공간만이 계속해서 비어있는 건물은 상실을 두려워하면서도 거기에 매혹되고, 괴로우면서도 자꾸 그곳을 찾아가는 나의 내면과도 닮아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공백을 공백인 채로 남겨두고 새로운 걸음을 내디딜 만큼 강해졌다. 빛이 조금 덜 드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내 안의 힘을 발견했기에.


최지원 번역가.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 <마이 샐린저 이어>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writing4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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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조의 프로필 이미지

    미조

    0
    about 2 years 전

    요즘 재미있는 소설책 추천받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대표님 덕분에 희망사항 하나가 그냥 해결되어 버렸네요. 이음에도 가입신청 냈어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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