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채원입니다.
어느덧 올해의 마지막 분기로 접어들었네요. 매일 새로운 소식이 쏟아지는 와중에, 흥미로운 소식이 있어 소개합니다.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벤처캐피탈인 a16z가 샌프란시스코에 학교를 만들었다는 뉴스, 보셨나요?
이름은 The Horowitz Andreessen Academy입니다. 창립 파트너가 어마어마하더라고요. OpenAI, 앤스로픽, 엔비디아, 구글, 메타, 팔란티어 같은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커리큘럼을 함께 만든다고 해요.
내년 9월에 문을 연다고 합니다. 첫 기수는 단 50명. 학비는 0원. 게다가 5,000달러로 3~4주 동안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흥미로워서 저도 지원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대상은 주로 2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이고, 대학을 2년 넘게 다녔다면 지원 대상이 아니더라고요.
대체 뭘 가르치려고 이 시점에 이런 학교를 세웠을까 궁금해져서, 살펴봤습니다.
62개의 강의
트랙은 "이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업계 리더 여러 명이 번갈아 나와 릴레이로 가르칩니다. 코스는 "그래서 어떻게 만드는가"를 다루는데, 한두 명이 끝까지 강의를 이끌어 가는 형태로 보였어요.
핀테크 분야로 예를 들어볼까요. 핀테크&금융 인프라 트랙은 코인베이스 창업자, 어펌 창업자(페이팔 공동창업자), 플레이드 창업자 등이 '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함께 말합니다. 반면 'Own the Transaction' 코스는 a16z의 파트너 한 명이 작은 기능 하나에서 시작해서 결제와 금융으로 넓혀가는 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치더라고요.
코스 하나씩 열어 나름대로 나눠보니 크게 네 갈래였습니다. AI , 창업/성장, 산업/하드테크, 그리고 삶을 다루는 코스까지. AI 코스는 모델 원리, 인프라, 그리고 AI로 무언가를 만들고 굴리는 방법에 관해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펴보다보니, 세 가지가 보였습니다.
발견 1. AI를 '아는 것'보다 '실제로 굴러가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AI 코스 13개 중 6개를 추려보면 이렇습니다.
- Inside the AI Machine : 토큰, 임베딩, 트랜스포머, 파인튜닝. 모델이 왜 성공하고 실패하는지
- Building and Evaluating AI Products : AI 제품의 '좋음'을 정의하고, 실패 모드를 찾아내고, 평가 체계를 만들어 측정 가능한 개선으로 연결
- The AI Product Playbook : 인상적인 데모를 실제 쓰이는 제품으로
- Harness Engineering : 에이전트를 둘러싼 시스템(컨텍스트, 메모리, 툴, 검증, 관측성)을 만들어 실사용에서 믿을 만하게
- Building on the Frontier : 모델이 계속 좋아진다는 걸 전제로, 지능이 올라갈수록 가치가 커지는 시스템 설계
- The Modern Software Developer : 코딩 에이전트로 아이디어에서 프로덕션까지
AI와 관련된 코스들을 살펴보면 전부 만들고, 평가하고, 굴려보는 과정에 가깝더라고요.
코스 설명에는 반복되는 단어가 있었어요. 'reliable(믿을 만하게)'. 에이전트 운영, AI 제품화, 추론 엔지니어링, 백만 사용자를 버티는 소프트웨어까지 4개 코스 설명에 이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데모가 아니라, 실제로 굴러가게 만드는 게 공통 주제였던 거죠.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이 학교는 AI를 '아는 것'보다 '실제로 굴러가게 만드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발견 2. 'AI 역량'에도 단계와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잘 굴러간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기서 막히더라고요. 그간 저는 스스로 AI 활용 경험을 표현한다고 하면, "AI를 활용해 업무를 자동화했습니다."가 전부라고 생각했는데요. 위의 코스를 보니 이 과정도 세밀하게 쪼개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원리를 알고 → 좋음과 나쁨을 정의해서 측정하고 → 제품으로 만들고 → 운영하면서 굴려보고 → 모델이 좋아질 것을 전제로 설계하고 → 그걸 매일의 작업 방식으로 반복하는 것
그간 저의 경험 역시 위 과정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도구를 쓰고, 워크플로우도 짜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만든 게 잘 작동하는지를 숫자로 측정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되면 됐구나, 안 되거나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고치는 정도만 했거든요. '전보다 나아졌네' 정도만 체감하고 지나갔습니다.
2번 코스 설명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좋음'을 정의하고, 실패 모드를 찾아내고, 평가를 만들고, 측정 가능한 개선으로 연결한다.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좋음의 정의'더라고요. 무엇이 잘한 건지 혹은 무엇이 좋은 것인지는 사람이 정해야 하니까요. 도메인을 알수록 더 정확할 테고, 그건 기획에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이건 커리큘럼을 보고서 제가 혼자 해본 생각입니다. 이 내용이 맞을 수도 있고, 2027년쯤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다만 그간 한 덩어리로 생각하던 걸 여러 단계로 쪼개어서 보니, 어느 단계를 놓치고 있었는지가 보였습니다.
발견 3. 정규 과목에 '운'이 있습니다
트랙을 살펴보다 보니, AI나 기술만 가르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정부/정책 트랙, 제도/사회 트랙, 글쓰기/문화 트랙도 따로 있었습니다. 코스 쪽도 마찬가지였어요. 연애, 취향, 돈, 브랜드처럼 삶을 다루는 과목도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신기했던 건, 이것이었어요.
The Geometry of Luck(운의 기하학).
소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운에도 기하학이 있다. 추론할 수 있고, 다룰 수도 있는 구조가 있다. 이 수업은 행운이 흘러 지나가도록 삶을 배치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운을 확률이 아니라 '배치'로 본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운 자체는 만들 수 없지만, 운이 지나가는 길목에 나를 놓을 수는 있다는 관점입니다. 강의자인 Soleio의 다른 강연을 찾아보니, 운을 세 가지로 나누더라고요. 어디에 나를 둘 것인가, 행운이 나를 찾아오기 쉽게 만들어둔 정도, 그리고 본 것을 실제로 해보는 용기. 이렇게 세 가지였습니다.
강연에서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 "Luck isn't something that you have. It's something that you leave behind." - 운은 가지는 게 아닙니다. 남기는 겁니다.
- "True prosperity does not merely accumulate with you, but it flows through you." - 진짜 풍요는 내게 쌓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를 통해 흘러갑니다.
즉, 운은 계속해서 흘러가는 것이고 우리 각자가 다른 누군가에게 운이 지나가는 길목이 된다는 거죠. 그 말을 듣고 저도 생각의 방향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행운이 나를 얼마나 쉽게 찾아오는지보다, 내가 무엇을 남기고 있는지에 집중해보기로요. 이 뉴스레터 끝에 붙인 목록도 그런 마음으로 남겨보았습니다.
정리하면
이 학교에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 세 가지로 보였습니다.
- AI를 쓰는 능력이 아니라, 실제로 굴러가게 만들고 그걸 평가하는 능력
-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놓일 세상에 대한 감각 (그래서 트랙의 3분의 1이 비테크입니다)
- 실력만이 아니라, 기회가 나를 지나가게 만드는 배치
솔직히 말하면, 요건 제약만 없다면 정말 지원해보고 싶었습니다. 너무 궁금해서요. 하지만 요건은 안 되니, 다른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찾아보니 여기서 강사로 나오는 분들 대부분 블로그, 뉴스레터 등으로 자기 글을 공개해두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글들을 모아서 제 나름의 목록을 만들어봤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 읽을 것들을 순서대로 늘어놓은 정도예요. 이게 잘 짠 순서인지도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당분간은 이 글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목록은 아래에 공유할게요 :)
덧붙임. 목록
1. 원리 — Inside the AI Machine (Hamza Farooq, Traversaal.ai 창업자)
- The Production Gap — 강사 본인이 쓰는 뉴스레터입니다. 목록에서 자물쇠 표시가 없는 글은 바로 읽을 수 있어요. 최근 글엔 유료가 좀 있는데, 조금만 내려가면 무료 글이 30편 넘게 있습니다.
- 그중 모델 내부를 다루는 무료 글 세 편을 골라봤습니다.
2. 평가 — Building and Evaluating AI Products (Hamel Husain, Bryan Bischof)
3. 제품화 — The AI Product Playbook (Rohan Varma, OpenAI Codex)
- Inside OpenAI: The Operating Model That Makes 2 Engineers Beat 200 — 본인이 직접 쓴 글입니다.
- Inside How OpenAI Uses Codex to Do Product Work — 무료 영상입니다.
4. 에이전트 운영 — Harness Engineering (Aishwarya Naresh Reganti, Kiriti Badam)
- Why your AI product needs a different development lifecycle — 두 강사가 레니 뉴스레터에 함께 쓴 글입니다. 무료로 전문을 읽을 수 있어요. AI 제품을 계속 보정하면서 만드는 방법(CC/CD)을 다룹니다.
- Why most AI products fail (Lenny's Podcast) — 두 사람이 AI 제품 50개 넘게 출시하며 얻은 교훈을 이야기하는 무료 영상입니다.
5. 개발 워크플로 — The Modern Software Developer (Mihail Eric)
- The Modern Software Developer 강의 사이트 — 같은 이름으로 스탠퍼드에서 여는 강의입니다. 강의계획서가 그대로 공개돼 있어요.
- The Emperor Has No Clothes: How to Code Claude Code in 200 Lines of Code
- Claude Code Demystified
6. 결제/금융 — 핀테크 트랙과 Own the Transaction 코스
- Bits About Money (Patrick McKenzie) — 몇 년째 무료로 쓰고 있는 뉴스레터입니다.
- Alex Rampell 블로그 — 본문에 나온 'Own the Transaction' 코스 강사(a16z 파트너, 어펌 공동창업자)의 개인 블로그입니다. 구독 없이 모두 읽을 수 있어요. 그중 세 편을 골라봤습니다.
- Distribution v Innovation — 코스 소개문의 "유통을 쥐는 것"과 가장 가까운 글입니다.
- Payment Network Effects and Incentives — 결제 서비스가 돈을 줘서 사용자를 옮겨 오려는 시도가 왜 거의 실패하는지 다룹니다.
- Delegated Authority, Payments, and Fraud — AI 에이전트가 대신 결제하면 본인 확인과 책임이 어떻게 꼬이는지 다룹니다.
7. 운의 기하학
- The Geometry of Luck — 이 코스를 맡은 Soleio가 올해 2월 도쿄 디자인 포럼에서 한 24분짜리 강연입니다. 코스 소개문이 사실상 이 강연의 요약이에요. 운을 orientation(어디에 나를 둘 것인가), surface area(행운이 나를 찾아오기 쉽게 만들어둔 정도), novel action(본 것을 실제로 해보는 용기)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합니다. 그가 책으로 쓰는 중인 내용의 첫 공개 버전이라고 해요.
- 강연 영상 (유튜브, 24분)
8. 제품 감각 — How to make highly successful products (Shreyas Doshi, 전 스트라이프·트위터·구글 PM)
- Shreyas Free Newsletter — 강사 본인이 쓰는 뉴스레터입니다. 이름처럼 글이 전부 무료예요. 그중 두 편을 골라봤습니다.
- Why Product Sense is the only product skill that will matter in the AI age — AI 시대에도 남는 PM 역량은 제품 감각이라는 글입니다. 코스 소개문의 "모호한 상황에서 더 나은 제품 결정을 내리는 법"과 가장 가까워요.
- The Fundamental Cognitive Bias of Product Builders — "내 제품은 좋은데 마케팅이 문제"라는 착각을 짚는 짧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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