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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내 첫 번째 독립출판물『MORI IN PROGRESS: 까마귀의 모음 1집』을 낸 지 10년이 된다. 판권지를 보니 2017년 9월 17일이 1집의 생일이다. 베를린 친구 집에 한 달간 놀러 갔다 온 일기다. 처음 해본 장거리 비행, 처음 가본 베를린, 동쪽과 서쪽을 산책인지 헤맸는지 아무튼 걸은 이야기, 푸른 벽의 성당과 무지개 네온사인의 지하철역, 서점들, 파스빈더 전시와 독일 키네마테크 본 이야기, 여전히 좋아하는 친구와 햄버거도 먹고 드랙쇼도 보며 잘 지낸 이야기, 거대한 숙취와 매일 같은 해장의 일화가 적혀있다. 표지는 베를린 동물원에서 찍은 하마 사진이다. 뒷면에는 안 먹는다고 해놓고 막상 너무 많이 먹은 베를린의 루나 피자 사진으로 했다. 둘 다 아이폰5s로 찍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도움받는 일에 훨씬 거리낌이 없었다. 친구 중 평소 같이 일해보고 싶던 이들에게 (나는 재능 있는 사람과 친해지면 꼭 함께 일이 하고 싶어지는 버릇이 있다) 디자인, 일러스트, 교정교열, 홍보를 위한 낭독과 리뷰 등을 부탁했다. 그때 우리는 지금보다 덜 노련하게 일할 때였다. 쳐내야 할 수많은 일과 사이에서 선뜻 친구를 돕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지금도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책 만드는 일도 재밌었지만 쓰는 일은 그보다 더 재미있었다. 책을 만들기로 했기 때문에 마감일이 생겼다. 주중에는 회사 일을 하고 주말에는 글을 썼다. 부지런히 찍어둔 사진첩과 인스타에 올린 베를린 포스팅을 번갈아 보며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그날 쓴 글의 분량이 하루의 성패였다. 대부분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던 망원동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썼다. 마감이 닥쳤단 핑계로 단골 술집에 노트북을 가져가 쓴 날도 있었다. 어차피 내가 정해둔 마감이라 넘기기 일쑤였지만, 결과적으론 책을 완성했으니 잘 지켰다고 치자.
그렇게 열심히 만들어 놓고 300부만 찍었다. 무언가를 만들고 그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이 너무너무 부끄럽고 민망했기 때문이다. 많은 독립출판생산자들이 비슷한 어려움을 경험한다. 어떤 말로 꾸며도 홍보의 뜻은 단 하나. “이거 좋은 거니 사세요!”인데, 내가 만든 걸… 좋다고 자평하는 게 가능한가…? 열심히 만든 건 사실이다. 그런데 열심히 만들었다고 남들이 읽어줘야 하나? 지금은 생산자지만 평소엔 냉혹한 독자인 내가 말한다. 그건 아니지. 그럼 재밌으니까 읽어달라고 말해! 나는 말한다. 더 못해. 읽고 괜찮으면 사람들이 말해주겠지. 친구들은 뭘 하겠다고 나선 친구가 기특해서 홍보를 많이 도와줬다. 나도 거기에 힘입어 열심히는 했다. 그럼에도 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괜찮으면 남들이 말해주겠지. 그런데말입니다. 독자가 책을 읽고 별로인 점보다 좋은 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는 사건은 (세상에 나온 책 수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드물다. 그 좋음을 주변에 알리고자 자발적으로 나서는 일도 귀하다. 무엇보다, 누군가가 책을 살 수는 있어도, 그가 실제로 그걸 읽기까지는 수많은 동기가 필요하다. 홍보는 그 동기를 만들어주는 일이다. 책꽂이로 직행시키기 전에 표지만 넘겨 보세요! (묵-이런이런 부분은 별로지만-음) 이런이런 부분이 좋으니 특히 그 부분에 집중해 주세요! 그렇다는 걸 이제는 좀 안다. 그때는 몰랐다. 홍보란 남한테 부담을 주거나 잘난 척 하는 일처럼 느꼈던 거 같다. 게다가 잘난 척할수록 사람들은 내가 만든 걸 흰 눈 뜨고 볼 것 같았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대단한 걸 만드는 건 둘째치고 잘난 척할 패기도 없었다. 그렇게 누구의 눈치인지도 모를 눈치를 보느라 어중간한 지위, 다시 말해 욕먹지 않는 수준에 머물기 위해 애썼다. 너무 많은 애를 썼다. 나의 평가와 노력보다 남들의 평가와 호의에 매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때 어떤 노력을 했든『MORI IN PROGRESS: 까마귀의 모음 1집』의 절대적 가치 수준은 변화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지금 삶의 흐름이 조금은 달랐을지도. 만약 내가 만든 것에 내 할 수 있는 이상의 힘을 기울였다면? 에너지를 소진한 나머지 까마귀의 모음 2집을 만들 수 없었을까. 혹은 지금쯤 까마귀의 모음을 10집까지 해냈을 수도! 그 다른 가능성은 이제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겐 작은 책 한 권이 남았다.
작은 책은 무엇이 되었나. 큰 것들에 비해 참으로 쬐끄맣고 열어보면 간혹 귀여운 그것. 너는 10년을 살고 무엇이 되었나. 300명보다 많은 사람에게 가닿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내게 다음 작은 책을 만들게끔은 했다. 그다음 작은 책을 만들게도 했다. 이후 작업에 대한 일종의 관성으로 작용해 준 것이다. 이 경험을 가지고 몇 권의 다른 책에 참여할 수 있게도 해주었다. 이렇게 책을 만든 경험으로 책과 작가에 관한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레터와 모임 서비스도 만들었다. 올 1월에는 팟캐스트도 런칭했다. 모임을 했더니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그런데 이제 말로 해보고 싶으니, 팟캐스트면 어떨까 해서. 팟캐스트의 이름은 오래 고민하다 [까마귀의 모음: 스몰톡] 이라고 지었다.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내 것인 게 [까마귀의 모음]이었기 때문이다. 10년 후를 내다봤다면 좀 더 단순한데 복잡하고 새로운데 익숙하며 감성과 지성을 겸비한 동시에 한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을 지었을 것이나, 그런 건 대부분 못하지 않나… 라고 하면 죄송하고, 적어도 내겐 가능하지 않은 일. 그런 운은 시대가 돕는 사람들의 것이다. 나라면 설령 그런 걸 해냈다 해도 어안이 벙벙할 수 있다. 내가? 이런 걸? 해냈다고?? 그리고 나를 믿지 못한 내가 그 아이디어를 버리는 결말. 울면서 말하지만 웃자고 하는 이야기.
지금 봐도 [까마귀의 모음]은 약간은 엉성한 숲이다. 독립출판도 하고 영화도 있고 책도 있고 이런저런 프로젝트도 껴있고 이젠 팟캐스트까지 추가된, 남들이 봐도 내가 봐도 경계가 분명치 않은 수풀. 잘 가꾼 정원처럼 보이고 싶지만 실상은 각각의 이야기들이 나무처럼 풀처럼 얼기설기 자생하는 한 뼘짜리 영토. 그래도 아끼는 것. 뭔가 잘해보고 싶은 곳. 여기에 처음 심어 키운 걸 시작이라 부른다면 [MORI IN PROGRESS: 까마귀의 모음 1집]이 그것인데, 마침 표기식 작가가 보내온 사진은 13년에 걸쳐 자라난 숲이다. 사진 속 자리는 원래 숲이 아니었다. 억새 군락이 있고 거기 나무가 딱 한 그루 서 있었을 뿐이다. 사진가가 촬영한 때는 어제인 1월 29일, 마침 겨울. 한겨울인 이유로 우리도 약간의 설명을 곁들이면 그 나무를 인지할 수 있다. 우측 뒤편에 조금 흐린 색깔로 배경처럼 찍힌 나무다. 13년간 그 나무를 보아온 사진가야 그렇다쳐도, 우리로선 우거진 푸른 잎사귀 사이에서라면 그 존재를 결코 알아채지 못했을 거다. 마침 1월이 한겨울인 덕으로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에서 한 나무를 알아본다.
까마귀의 모음 1집 제목인 [MORI IN PROGRESS]의 ‘모리mori’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라틴어의 죽다, 하나는 일본어의 숲(森)이다. 어법에도 안 맞고 좋아하는 단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모두가 같은 뜻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좋아서 붙인 제목이다. 내가 두 개의 제목을 감춘 10년 전 책에 관해 쓰고 있을 때, 표기식 사진가는 자신의 첫 한강 작업이자 지금은 숲이 된 나무를 촬영해서 보내왔다. 사진가와 나는 그저 1월 레터에 ‘시작’에 관한 무언가를 싣자고 이야기 나눴을 뿐이다. 그렇게 오늘의 모리는 숲이 되었다.
숲은 진행 중이며, 진행 중인 이유로 명쾌한 예측이 어렵다. 따라서 브랜딩이 쉽지 않고 한줄 요약도 안 된다. 확실한 게 있다면 나무는 자라고 시작은 나아간다는 것. 관성이든 순리든 일단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것. 딴 얘기지만 내가 자주 쓰는 아이디 moriapt에서 apt는 아파트다. 아, 아파트 살고 싶다! 하며 붙인 건데, 그로부터 몇 년 후, 지은 지 50년이 훌쩍 넘은 바람에 서울에서 가장 싼 아파트로 불리는 곳에서 살게 됐다. 별 거 아닌데 이상해서 소중한 사건들은 결국 먼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 시작에 대해서라면 두려울지언정 지겨울 일은 없을 거 같다.
2026/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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