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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레터]의 매달 마지막 편지는 표기식 사진가가 이달 찍은 사진 한 장, 그리고 내가 쓰는 산문 한 편으로 구성된다. 작년과 달리 올해는 이번 달의 키워드를 공유하고, 그걸 주제로 작업하기로 했다. 사진 찍는 사람과 글 쓰는 사람. 공통점도 있겠지만 다른 점이 더 많은 사람들. 같은 서울의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은 전혀 다른 사람들. 그런데 비슷한 것도 있는 사람들. 이렇게 각자의 트랙을 돌다 보면 만나기도 하고, 아주 먼 곳으로 가 있기도 하고 그러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2월의 키워드는 ‘만남’으로 정했다. 키워드는 내가 정한다. 상의는 하지 않기로 했다. 간단한 일일수록 의논하고 고민하고 조율하다 보면 결론이 나기는커녕, 말과 말 사이에 말줄임표만 길어지고… 뭐 좋은 생각 있어요? 음… 글쎄요…. 이런 식으로… 우물쭈물과 어영부영이 점점… 길어지다가……. 시간만 한참을 냠냠 맛도 없게 잡아먹은 후 그냥 처음 키워드로 하자! 말할 가능성 90% 이상임을 우리 노련한 직업인들은 잘 알고 있지.
그래서 내가 말했다. “‘만남’ 어떠세요? (어떠냐고 묻고 바꿀 생각은 없음.) 2월엔 연휴도 있고 이벤트가 많잖아요. 그리고 저는 이번 달에 사람을 많이 만날 예정이거든요. (그러나 월말에 와서 보니 이 선언은 월초의 허세로 판명 남.)” 곤란한 사진가. “아니, 저처럼 사람 볼 일 없는 사람한테 너무 가혹한 키워드 아닙니까?” 어쩐지 의기양양한 나. “그럴수록 작가님껜 이 키워드가 필요해요!”
곤란해진 건 저였습니다. 애초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2월엔 만나고 싶었던 분들께 만남을 청한다. 그렇게 정해진 약속 덕에 처음 가보는 카페에서 커피 같은 걸 주문한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내가 처음 와본 당신 동네에 대한 감상.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한 불평. 실은 애정. 예전에 살았던 동네 이야기. 약간의 그리움, 동시에 어떤 시기를 지나왔다는 안도감. 우리가 마주 앉은 이 카페에 관해서도. 커피가 맛있으면 커피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근처 밥집이 괜찮으면 거기 이야기도 하게 될 거다. 그로부터 우리는 나아간다. 최근 주의 깊게 본 당신의 일, 요즘 내가 몰두하고 있는 일을 나눈다. 대체로 비관적인 전망에 공감을 표하고, 그럼에도 낙관을 견지하는 노하우를 함께 탐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을 함께 도모해 보거나 그저 훗날을 기약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를 타거나 걷거나 드물게 지하철을 타고, 좋은 만남이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려야지, 그분을 태그해도 되겠지? 하며 사진을 고르는 결말.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획은 많은데 실행이 어렵게 느껴지는 시간들. 딱히 힘든 것도 아니고, 그냥 뭔가, 선뜻 움직여지지 않는. 무거운 몸의 시간. 가벼운 만남조차, 청하기까지 많은 변수를 고려하는. 변수들. 습관적으로 떠올리는. 저항할 수 없이.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치밀한 계획을 세우게 되는. 아니 그보다… 그전에 어쩐지… 용기 같은 것이 필요한. 만남은 내가 상상하는 상대 시간의 가치만큼 고평가가 되며 게다가 자꾸 상한가를 친다. 만나자고 제안했는데, 기껏 내어준 시간인데 불만족스럽게 헤어지면 어떡하지. 근데 진짜로 상대를 걱정하는 거 맞아? 내가 매력적이지 않음이 들통나거나 어색해서 말을 많이 하거나 말을 많이 하다 보니 말실수할까 봐, 그래서 그 짧은 시간 안에 상대가 나를 완전히 파악해 버릴까 봐, 상대 걱정하는 척 내 걱정하는 거 아니고? 정답이고요, 정답이네….
걱정이 없는 삶. 그것은 아무도 만나지 않는 일. 제안이나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메일이나 메신저로 나누는 일. 그리하여 꽤 프로페셔널한 자아로 모든 걸 착착 처리하는 일. 누군가에게 호감이 있다면, 호감을 표현하고 싶다면 좋아요나 댓글로 표현하는 일. 내 근황과 고민은 SNS에 잘 정제해서 올리는 일. 그마저도 올릴 필요를 느끼지 않는 일. 그리하여 내 작은 집 반경 1km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일. 이렇게 쓰다보니,
나쁘지 않은데?
나쁘지는 않은데, 그것만으로는 서사가 생기지 않는다. 내게 있었던 수많은 서사들. 대단치 않아도 소중한 서사들. 혼자서 만들 수 없었을. 타인은 어떻게 내게로 와서 서사가 되었나.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떻게 친구가 되었나. 친구의 친구라서. 친구의 애인이라서. 또래라서. 같이 일을 하게 돼서. 사는 동네가 같아서. 영화를 좋아해서. 음악을 좋아해서. 말하는 걸 좋아하거나 듣는 걸 좋아하거나 둘 다 좋아해서. 술을 좋아해서. 취한 밤 우연히 옆자리에 있어서. 좋아하는 게 비슷해서. 싫어하는 것이 같아서. 무엇보다 만났기 때문에. 만났으므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만남은 둘 중 적어도 한 명의 제안으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님.
우리의 만남은 지난 인생에서의 수많은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바탕으로 무의식이 치밀하게 기획한 호감의 발현. 저 사람 삶의 약간을 조금은 가까이서 보고 싶은 호기심. 그러나 결코 대단한 사건을 바라지 않는 심정. 그저 아주 복잡한 존재가 내어줄 아주 시시한 이야기들에 대한 기대. 2월의 나는 뭔가 대단한 걸 하려 했을까? 시시한 사람으로서 만나 시시한 이야기를 좀 나누다 헤어지면 그것이 사건인데. 깜냥도 안되는 어려운 마음만 잔뜩 지닌 채 보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 2월엔 사람을 많이 만나겠다는 목표도 3월엔 사람을 많이 만나겠다로 은근슬쩍 바꿔쓴다.
나만큼이나 (혹은 나보다 더) ‘만남’을 어려워했던 표기식 사진가는 2월을 꽃을 찍어 기록한다. 만남에서 종종 꽃이 오가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는데, 사진 속 꽃은 누구한테 받았거나 누구에게 주려고 한 건 아닌 거 같다. 사진 찍은 날짜를 물으니 영수증에 찍힌 날짜로 알려준다. 나 원 참. 만남에 관한 만남 없는 사진을 보내온 사진가를 놀려보려 하지만 역시 만남 없는 2월을 보낸 나.
다행히 3월부턴 [인터뷰&레터] 시즌2가 시작된다. 누군가를 만날 수밖에 없고 만날 것이며 되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됐으면 하고 바라는 일이 [인터뷰&레터]다. 어렵고 무겁게 느끼는 일이 드물지 않음에도 나는 계속 만남의 사건을 기획하고 진행한다. 시작했기 때문에 흘러가고 만다는 하는 수 없는 사실에 안도하며, 3월엔 연락을 드리겠어요.
2026/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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