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행궁동이라는 곳을 가면 오래된 골목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옹기 종기 낮은 건물들이 들어선 주택가 사이를 걷다 보면 시간이 멈춘 듯하다. 아파트와 빌딩 숲 사이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편안함이랄까. 만약에 아파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산다면 바로 행궁동과 같은 동네에서 살고 싶다는 바램을 가진 적 있다. 6-7년 전쯤 행궁동에 단골이 된 찻집이 한 곳이다. 주택을 개조한 찻집 ‘다전1973’(다전차문화교육원)에서는 처음 보이차를 마셨다. 붉은 빛깔의 보이차는 우릴수록 깊은 맛이 났고, 몸이 따뜻해지면서 세포 하나하나에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차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고, 애정이 있는 주인장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 궁금해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다전(茶田)을 들르곤 했다. 지금은 매일 오픈하는 찻집이 아닌 예약제 티클래스를 운영하면서 한국다도, 중국차, 다식, 원데이 클래스 등을 운영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다전(茶田)이라는 공간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 조병주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와 함께 살아온 반평생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 보게 되었다.
Q : 다전을 열기 전 선생님이 좋아하던 찻집이나, 차와 인연이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A : 오랫동안 차공부를 하고, 전문적으로 차를 다루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었나봐요. 어릴 때는 수원 찻집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시인과 농부’라는 곳을 다녔는데, 그곳이 삶의 아지트 같은 장소였거든요.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다 보면 어떤 고민이나 스트레스도 사라지는 듯 했고요. 그렇게 ‘시인과 농부’ 사장님과 인연을 맞고 오랜 시간 언니·동생 사이로 지내며, 차와의 만남도 점점 깊어져갔죠. 커피보다는 녹차, 백차, 보이차 등의 잎차에서 다양한 맛과 향이 느껴지고 정적인 제 성격과도 잘 맞다고 느꼈어요.
우리는 어떤 장소를 사랑하게 되면 꿈을 꾸게 되는 것 같다. 그곳을 닮아가며 염원하는 꿈을 말이다. 커피와 달리 차는 느림의 미학을 갖고 있다. 다구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천천히 우려낸 찻잔에 따라 한 모금 입 속에 머금을 때 모든 감각이 살아난다. 아이스아메리카노처럼 벌컥 벌컥 마실 수가 없다. 왠지 차를 마실 때면 의식이 명료해지고 또렷해진다. 바쁘고 정신없는 삶 속에서 여유있는 쉼의 시간을 주기도 한다. 공간의 매력에 빠지고, 차의 맛과 향에 빠져들면서 넓고 깊은 차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진 않을 것이다.
다도(茶道)란 차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건강한 마음가짐과 몸 가짐을 수행하며 예절을 실천해나가는 교육이다. 다도를 통해서 심신수양, 자기조절능력, 섬세한 집중력 등을 키울 수 있게 된다. 타인에게 차를 올릴 때는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표현하게 되므로 예절을 자연스레 배우게 된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관혼상제 중 ‘차례’라고 하여 중요한 제례로까지 생각했다. 차는 밥을 먹고 숨을 쉬듯 생활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찻잔에 차를 따르는 소리부터 향기와 맛을 음미하며 미각과 오감을 깨우면서 한 잔의 차를 통해 마음을 갈고 닦게 된다.
Q : 행궁동이라는 동네에 찻집을 열게 된 과정을 이야기해주신다면...
A : 차를 좋아하면서 자연히 찻집을 꿈꾸게 되었죠. 그렇지만 돈도 없고, 아이들도 어리다 보니 선뜻 저지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잘 알고 지내던 선배가 이런 말을 해주시는 거에요. “병주야, 꿈이 길어지면 흐물거려지더라.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한 번 알아보기라도 해” 라고요. 그 글을 본 순간 여러 생각이 떠올랐어요. 큰 애가 몇 살이 되면 내가 찻집을 시작할 수 있을까, 막내가 고등학생이 되면 내가 오십이 넘는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찻집을 차리고 싶은데...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면서 한 번 알아보기라도 하자고 맘 먹었어요. 그리고 행궁동이라는 동네를 알아보게 된 거에요. 행궁동은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젊은 이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오래 된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옛날 동네같은 느낌이 컸어요.
Q : 선생님이 집을 찾아낸 걸까요? 아님 집이 선생님을 만난 걸까요?
A : 이 집과 인연이 깊은지 일이 술술 풀리게 된 거에요. 집과의 만남도 운명이 있다고 생각돼요. 행궁동에서 여러 집을 보았지만 다 맞지 않았어요. 계약하기로 날짜를 정한 어떤 집은 다른 사람이 먼저 사간 경우도 있고, 집이 너무 커서 경제적 여건이 안되는 것들도 있었죠. 그러던 차에 어느 할머니가 혼자 살다가 돌아가신 후 아무도 살지 않은 집이 있다고 해서 보러간 거에요. 사람의 온기가 없는 집이지만 집안에 들어선 순간 정말 따뜻해졌어요. 다락방이 정겨웠고, 2층 계단을 올라가는데 햇빛이 비치는 것이 마음을 말랑하게 해주었어요. 그 집을 보고 난 후 3일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에요. 남편도 같은 마음이었다고 해요.
돈이 없어서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남편과 잘 아는 선배가 “계약금이 얼마인데? 내가 빌려줄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바로 행궁동의 집을 계약했고, 살고 있던 아파트도 한 달 만에 팔리면서 금전 문제가 해결되었어요. 이런 것이 운명같은 만남이 아닐까요? 일이 되려고 하면 어렵지 않게 순리대로 풀려가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말이죠.
다전(茶田)1973이라는 찻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장소는 구해졌으니 찻집을 꾸미고 만드는 일이 남았는데, 그동안 살면서 모았던 옛 물건들이 빛을 발하였다. 오래된 물건이 늘 아파트 베란다에 있었는데 남편은 그것을 보면서 항상 좀 치우라고 했다고. 하지만 조병주 님은 “언젠가는 꼭 쓸거야” 라고 하면서 지켜왔다고 한다. 문짝, 낡은 찬장, 조명, 문갑, 수납함 등은 다전에서 새 생명을 다시 찾은 듯 빛이 났다. 사과박스 하나도 버리는 것을 주저하다 보니 물건의 쓸모를 생각하게 되며, 예상치 않은 곳에 사용하기도 한다. 동네 이웃이 주고 간 사과박스를 버리지 않고 화장실 벽면에 붙이고 광목 천으로 가리개를 만들어 수납함으로 변신시키기도 했다.
Q : 차 마시러 오는 사람들은 커피 마시러 카페 가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을까요?
A : 예전부터 내가 잘 하는 게 뭘까를 고민해봤는데,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얘기 나누는 것이에요. 다도 수업을 하면서 만난 분들은 수업 시간에 이런 저런 얘기를 풀어 놓는데 특히 갱년기 여성들이 많아요. 아이들, 남편, 시댁, 자신의 미래의 삶 등등. 마음의 갈등이나 답답함을 다도수업에서 스스로 해결하고 평온함을 찾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요. 그러다 보면 90분 수업이 네 시간, 다섯 시간 이상 이어지기도 하고요. 시간이 아깝다거나 지친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어요. 저 역시 직장생활, 결혼, 고부갈등, 두 아이 엄마로서의 삶을 살다 보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어요. 비슷한 경험이 공유되면서 서로 편히 얘기를 나누게 되는 것 같아요.
Q : 선생님이 그렇게 다도 수업에 오신 분들과 대화 나누고 사람들과 교감하는 태도를 어디에서 습득한 걸까요?
A : 생각해 보면 친정엄마가 그러셨네요. 80년대 초반이었지만 저희 동네에 동냥 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엄마는 커다란 양푼그릇에 밥과 반찬을 덜어 넉넉하게 나누셨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집에 사람들이 늘 북적였어요. 동네에 유일하게 전화기와 TV가 있었거든요. 텔레비전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함께 무언가를 보고 듣고 음식을 나눠 먹는 모습이 떠올라요.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저 역시 엄마처럼 살게 되었나 봐요.
Q : 좋은 공간은 좋은 사람과 만나게 해 준다고 하는데요, 다전을 하면서 만나게 된 특별한 인연이 있다면?
A : 찻집을 운영하면서 항상 ‘내가 가진 능력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어요. 그러다가 2년 전 주민센터에 가서 봉사할 곳을 찾았는데 지역아동센터를 연결해주시는 거에요. 다전과 멀지 않은 곳의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과 다도체험을 하게 되었어요. 차마시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만 누리는 호사스러운 취미가 아니에요. 아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차를 느끼고 마시고 궁금해해요. 다도 수업을 하고, 예쁜 한지에 다식을 포장하여 나눠주면 아이들도 정말 기뻐해요. 한 번의 경험이 인생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긍정적이고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지 않을까요.
Q : 차 공부도 쉬지 않고 계속 하신다면서요...
A : 네. 지난 학기까지 2년 동안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서 생활예절·다도전공을 공부했어요. 한국의 예와 다도문화 영역 탐구, 전문가로서 깊이 있는 공부를 한 것이요. 한 분야를 깊이 배우고 연구하면서 조금씩 앎을 넓혀나가는 중이에요.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저도 계속 채워나가야 하니까요. 공부를 하다 보니 찻집 운영이 어려워져 예약제로 변경하고, 공간도 작게 변화하게 되었어요.
Q : 본인이 경험한 차의 효능이라고 한다면?
A : 과학적인 효능이나 차의 이로운 점은 인터넷만 쳐 보아도 다 나와 있지요. 그런 이론적인 것보다 개인적으로는 차 마시며 정신적으로 여유롭고 편안함을 찾게 되는 듯해요. 화가 날 때나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면서 원인 찾아요. 차(茶)를 꺼내고 물을 끓이면서 물소리를 듣습니다. 온도가 오를수록 요동치며 커지는 물방울의 움직임도 쳐다봐요.
100도가 되면 탁! 소리와 함께 온도는 내려가고 조용해집니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서운함이 배가 되는데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하면 서운함이 반으로 줄어들더라구요. 차분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수 천년동안 인류의 조상들은 차를 마시면서 정신수양을 해왔던 것 아닐까요.
Q : 앞으로 차(茶)와 관련하여 소망이 있다면?
A : 다양한 지역 행사 및 행궁동 축제 등에서도 다도와 관련한 체험을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차에 대한 좋은 경험을 알리고 있어요. 이와 함께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현지의 차에 관한 공부와 경험을 이어나가는 것이요. 현지에서 실질적인 얘기를 나누고 체험하는 시간들을 꿈꿔 봐요.
차(茶)를 좋아하고 사랑하면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된 조병주 선생님과의 만남은 물 흐르듯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사람의 마음이 대화에서도 스며드는 것 같았다. 좋은 차를 권하고, 함께 마시고, 시간을 공유하는 것은 특별한 만남이 된다.
최근에는 ‘티룸’이라고 하여 시간을 예약하여 차를 마시는 공간도 늘어났다. 각자의 취향의 찻잎을 고르고 그 찻잎을 다관이라는 찻주전자에 넣고, 뜨거운 물에 여러 번 우려 오랫동안 차의 향과 맛을 느끼는 그 과정에서 마음의 편안함을 얻게 된다. 오로지 차에 집중하고 일상을 뒤돌아 볼 수도 있다.차명
일상에서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차를 좀더 깊이 배우거나 다도(茶道)체험을 원하는 분들이 있으면 행궁동의 다전 차문화교육원에서 조병주 선생님을 만나보면 어떨까. 달고, 짜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차맛을 알게 하는 것은 어렵지만 한 번 은은하고 정갈한 향과 맛에 끌리게 되면 몸에 나쁜 것을 멀리하게 된다. 차 한 잔을 마시는데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느림의 가치를 온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최근에는 싱잉볼 명상과 타로상담까지 섭렵하여 독특한 차 명상 수업을 안내하신다고 하니 궁금증이 더욱 커진다.
다전차문화교육원 ;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42번길 10 201호 / 031-8031-5677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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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
왠지 마음이 편안하고 경건해지는 곳. 그런 장소의 힘을 믿습니다. 선생님을 응뭔합니다~~♡
라라언니
다전에서 차를 마시고, 차이야기를 하는 시간만큼 고요해지는 때가 없는 듯요. 오늘도 차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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