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 소개]
- 삼성 스토어 검단 外 4개점, 한복석 대표
[프롤로그]
출근하는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지는 날이 계절성 감기처럼 한 번씩 찾아온다. 나의 경우 이런 정체성의 위기는 주로, 내가 하는 일에서 가치를 찾지 못할 때 온다. 예를 들어, 오직 상사를 위한 보고서 작성이 메인이 되어 업의 본질은 사라진 주객전도가 일상이 될 때나, 사람들에게 암울하고 영혼 없는 일이 주로 주어질 때다.
커다란 조직의 수많은 성과지표 리스트의 끄트머리 어느 언저리에 엮인 파편 같은 조각 ‘일’ 들이 정신없이 쏟아진다. 하루의 끝에 서면 오늘도 몹시 바빴으나 나의 노력이 어딘가에 가 닿고 있다는 작은 효용감 조차 느껴지지 않을 때, 허무했다. “우연님! 영혼, 의미, 진심, 가치 따위는 집에 놔두고 출근하세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존 버의 길입니다" 스마트한 후배가 한마디 건넨다. 정녕 내가 좋아하는 저 단어들은 이 직장 안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 인가?
문득 경쟁이 치열한 가전 시장에서 제 힘으로, 손에 잡히는 가치를 20년 째 만들어 내고 있는 자수성가 창업가 이신 한복석 대표님이 떠올랐다. 우리는 17년 전 초보 가전 대리점 사장과 본사담당인 신입사원으로 처음 만났다.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끊임없이 일을 벌리고 도전하시는 분, 천성이 부지런 하고,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 라는 걸 몸소 보여주시는 분. ‘한복석’ 이름 덕인지, 세상의 福은 모두 끌어당기는 것처럼 매번 위기를 기회로 전환 시키며 성공적으로 돌파해 내셨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늘 나를 감탄하게 만드는 분이셨다. 대표님은 어느덧 신축 4층 700평 규모의 초대형 삼성스토어를 오픈하시고, 체인점을 4개로 확장하였다. 명실공히 성공한 경영자가 되셨다.
그는 느닷없는 인터뷰 요청에 잠시 당황하시는 듯했으나, ‘별 재미없을 건데요’ 하면서 기꺼이 시간을 내주셨다. 그리하여 하늘빛이 고운 5월의 어느 토요일 오전 10시, 서비스 방문 고객들로 붐비는 삼성스토어 매장의 대표실에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규모는 작지만 깔끔한 대표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수십 개의 매출 기네스 트로피와 우수점포 인증 상패들이 눈길을 끌었다. 지난 20년간 그의 노고와 성실함의 역사가 한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반기며 최근 한달 간 휴대폰 메모장에 빼곡히 적어 둔 ‘생활속 불편 리스트’를 나에게 보여주며 비즈니스 아이템으로 어떠냐고 물으신다. 그의 아이디어 노트를 구경하며 오늘도 어김없이 나이를 잊은 그의열정에 감탄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40대에 삼성스토어를 창업하기 전, 대표님의 10대, 20대가 궁금해요.
제가 중학생 일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일곱형제 중 셋째인데 형님들은 모두 서울로 떠나고, 어머니가 혼자 힘들게 농사짓는 걸 보며, 나는 어머니를 도와 고향 영광에 남아 농사를 지어야겠다 생각했어요. 형편이 어려우니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꿀 때였지요.
그때 김포 큰형님이 건물을 얻어 도서관을 개관한다며 제가 그곳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1년 동안 공부해서 대학을 가는 게 어떠냐 해서 상경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도서관이 허가 문제로 성사가 되지 않았고, 형님이 업종을 중국집으로 바꾸는 바람에 졸지에 사서가 아니라, 중국집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주방장이 출근을 안 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제가 주방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자연스레 주방장일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때 우리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면 따로 짜장 따로 배달을 시작했지요. 면과 짜장이 섞여서 불어서 오는 게 너무 싫어서 생각해 낸 방법이었는데 당시 고객 반응이 엄청 좋았어요. 지금은 랩으로 싸는데 그때 우리는 은박지 호일로 쌌었어요.
짜장은 1시간 이상 기름에 춘장을 볶아 야 제맛이 나고 고소해요.
한여름에 주방에서 긴 장화를 신고 구슬땀을 흘리며 춘장을 볶던 어느 날 현타가 왔어요. 내 청춘을 춘장 볶다가 다 보낼 수는 없다. 이거 평생 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길로 중국집 일을 그만뒀어요.
도서관 사서 하러 갔다가 중국집 주방장을 하게 되다니, 파란만장 하셨네요. 중국집 다음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20대까지 해본 직업이 여섯 가지가 넘는 것 같아요. 정말 말도 못 하게 어려웠어요. 힘들게 취직을 했는데 버스비가 없어 출근을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는데, 첫 달 가불을 해서 겨우 다닐 수 있었어요.
그 시절 아내를 만났는데, 제가 단벌 신사였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는데 사람 성실한 것 하나 보고 결혼을 해줬어요. 사실 결혼 전까지는 목표가 없었는데, 결혼하고 나서야 소박한 꿈이 생겼어요. ‘이제 내가 가장이구나. 빨리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아서 처자식 굶기지 않겠다.’ 그때부터는 무슨 일이든 했어요.
창업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초기 자본금은 어떻게 마련 하셨나요?
결혼 후 얼마되지 않았을 때, 건설 현장에서 일하면 연봉의 두 배를 받을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어요. 얼른 경제적 기반을 잡고 싶은 마음에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보기로 했죠. 그렇게 악조건에서 무리하게 일하다 사고로 손을 크게 다쳤어요. (대표님은 오른손 손가락 세 개를 그때 잃으셨다) 그 후 1년간 치료를 받으며 집에 있는데, 주변에 컴퓨터 매장들이 막 생기는 게 보이 더군요.
창업은 다친 손 보상금 받은 것으로 시작했어요. 보상금이 당시 아파트를 살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었는데, 그걸 받아서 아파트를 살까 고민하다 아내와 상의 후 창업을 결정했어요. 이 손으로 앞으로 직장 생활은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고 집은 나중에 살 수 있으니 사업을 하자 했죠.
컴맹인데, 일주일 배우고 PC 판매점을 오픈하셨다고요?
처음에 부평 갈산역 큰 사거리에 20평 규모의 조립 PC점을 냈어요. 제가 컴맹이었는데, 일주일인가 배우고 시작했어요. 컴퓨터를 막상 뜯어보니까 너무 간단 했어요. 카드 몇 개 뽑고 검은 Dos 화면에 명령어 몇 개만 넣으면 탁 되는 거예요.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하다 보니, 주변 시세가 1천만 원에 30만원짜리 점포를 4천에 80만 원에 세 배 비싸게 계약했어요. 동네 사람들이 젊음 사람이 세상 물정 모르고 덤비니 곧 망할 거라 했었는데, 보란 듯이 4년 만에 조립 PC 매장을 2호점까지 냈어요.
어떻게 컴퓨터를 쉽게 판매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패키지 조합을 몇 세트 구성해서 가로수 신문에 광고를 실었어요. 학생용 PC, 사무용 PC, 게이머 PC 이런 식으로요. 몇 가지 질문으로 고객 니즈를 파악하고 제안했더니 빠르게 많이 팔 수 있었어요. 그때 부터 한달에 수익이 몇 천씩 떨어지는 거예요.
점점 장사가 일어나면서, 종지에서 밥그릇 밥그릇에서 냄비로 냄비에서 대야로 그릇을 바꿔가면서 점점 꿈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꿈은 언제 꾸어도 늦지 않는데, 그 꿈을 어떻게 키우느냐가 진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컴퓨터 매장 2개를 성공적으로 운영 중에, IMF가 터졌다. 모두가 위기였을 때 대표님은 기회를 잡았다. 취업난에 Spec경쟁이 시작되었고, 너도나도 컴퓨터 학습 열풍이 불었다. 내 아이만큼의 컴맹으로 만들 수 없는 부모들이 가세하여 어린이용 가정용 컴퓨터가 불티나게 팔렸다.
PC판매점을 하시다가, 어떻게 PC방 사업으로 확장하게 되셨죠?
그때는 PC방이 또 핫하게 떠올랐어요. 이번에도 아무것도 몰랐지만 일단 뛰어들었지. 기존에 PC만 판매하던 방식과 달리, PC방 창업 사업은 PC+소프트웨어+인테리어+설비까지 풀 세팅을 해주는 토털 솔루션 사업이예요. 그때 제가 시도한 것이 제가 잘 할 수 있는 PC 공급과 네트워크 분야는 직접 하고 나머지는 인테리어 쪽을 목수를 섭외해서 아웃소싱 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PC방이 우후죽순 생겨 경쟁이 치열 해지니까 이번에는 폐업점포가 늘어났어요. 발빠르게PC방 폐업 전문 업체로 업종 전환했죠. 폐업 점포를 통째로 먼지까지 인수해서 조각조각 나눠 처분하여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러고 얼마 되지 않아 조립PC 시장이 저물기 시작했고 고객들이 브랜드 가전을 선호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가전제품까지 품목을 확장해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큰평수인 100평이 넘는 삼성전자 대리점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형님과 함께 김포에서 매장 2개를 오픈하고 운영하며 3년 일하는 동안 석 달에 딱 한 번 쉬었을 정도로 정말 힘들게 열심히 했어요. 그러다 형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저의 첫 삼성스토어 인 시흥점을 오픈 하게 되면서 본격 삼성스토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삼성스토어 시흥을 시작으로, 연이어 대형 체인점을 4개 더 오픈하셨는데요. 큰 투자 결정을 할 때,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으셨나요?
삼성 스토어 경영주 중에서는 오픈을 가장 많이 했을 거예요. 시흥, 대야, 검단, 김포, 일산동구, 발안, 청라, 서구 모두 제가 오픈한 매장들입니다. 신설도 있었고 상권 내 철수점이 생기면 과감하게 투자 결정을 해서 체인점을 확대해 나갔어요. 현재는 인천 서구와 화성발안 상권에 4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어요. 일단 일을 시작하니, 하게 되더라고요. 누구든지 그런 상황이 되면 하게 돼요. 그때는 프랜차이즈 본사의 지원정책, 상권 내 입주가 많고 가전 수요가 커지는 시장 상황, 저의 방향성 삼박자를 고려했을 때 확장할 시기라고 판단했어요. 삼박자가 딱 맞았죠.
처음 인천 검단에 신축 700평규모 메가스토어 급 매장을 오픈한다고 할 때 다들 무모한 도전이라고 했잖아요.
매사에 무슨 일만 하면 안 된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안된다는 말 이면에는 그 사람은 노력을 안 해요. 본인이 해야 할 일도 안 하면서 사고도 부정적이니 되겠냐고요.
진짜 되는 사람은 뭐든지 최선을 다 해요. 그러면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자기 확언을 반복해요. 제가 보면 그 차이예요. 타고난 재능의 차이는 모르겠어요. 제가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나는 모자라고 부족해. 이런 부족한 내가 최상위 레벨로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 야하지?’ 늘 이렇게 질문하고 채우려고 했어요.
스스로 가장 행복하다 느끼실 때는 언제 세요?
제가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화되었을 때 가장 행복해요. ‘내가 지금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안 되지 않나? 일단 해보자’ 하는 편이예요. 아이들에게도 늘 해주는 말이 있어요.
‘꿈은 그냥 꿈일 뿐이야. 진정한 꿈은 행동과 연결시켜, 현실로 만들어 내는 거야.’
처음 내가 이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동네 구멍가게처럼 작은 PC 대리점, 가전 대리점이 많을 때였어요. 시작할 때부터 대형 소매유통 전문 회사가 목표였어요. 무조건 대형 매장으로, 체인점을 많이 내서 규모의 경제를 가져가야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꿈을 현실로 만드는 대표님 만의 습관이 있다 면요?
저는 오랜 운전 습관이 있어요. 아내가 싫은 소리를 자주 하는데 운전하면서 왜 그렇게 부산스럽냐는 거예요. 저는 차를 운전하면서 늘 상권 모양이 어떻게 되는지 자꾸 둘러보게 돼요. 신축 건물이 올라가면 이 자리에 뭐가 들어가면 좋겠네 계속 머릿속으로 그려보죠. 사람들은 보통 어떤 업종을 할지 먼저 정하고 나서야 점포를 찾아다니잖아요. 저는 거꾸로 평소에 자리를 보면 그 자리엔 어떤 업종이 되겠다, 또는 안되겠다고 시뮬레이션을 자주 해요. 제가 입점하면 좋겠다 생각했던 업종이 들어와 성공하는 걸 볼 때 굉장히 뿌듯해요.
‘아! 내 판단이 맞았구나.’
제 가치판단의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자료가 내 안에 축적되는 거죠. 제가 수립한 가설에 대해 스스로 틀렸네, 맞았네 자주 활성화하다 보면 상권이나 점포를 보는 나의 안목도 점점 적중률이 올라가기 시작하죠. 처음 에는 내 점포를 언젠가는 가지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 한 거였는데 그후로 40년간 해오고 있네요
스트레스상황에는 어떻게 멘탈 관리를 하시는지? 도망가버리고 싶으실 때는 없으셨어요?
있죠 왜 없겠어. 그런데 상황을 극복하는 저만의 루틴이 준비되어 있달까요. 먼저 화가 나면 밥을 많이 먹어요. 탄수화물의 힘을 보충하고 나면 그 다음에 제가 늘 이미지 트레이닝하는 문장을 반복해서 외웁니다.
“나의 몸과 마음은 항상 건강하고 건전하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그 무엇이든지 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능력을 믿는다.”
어떤 나쁜 상황에 부딪히면 저는 터지기 전까지 피나게 노력하는데, 오히려 터지고 나면 아주 담담 해져요.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는 게 가장 현명하고 신속정확 깔끔하게 정리되지? 오직 이 생각에만 집중해요.
그가 20대 때 버스에 앉아 우연히 창밖을 내다 봤을 때, 모처 건물 담벼락에 쓰여 있던 이 문장이 마음 속으로 훅 빨려 들어왔다고 한다. 그렇게 운명 처럼 만난 문장을 1년에 수백 번씩 외운다고 한다. 그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사지 육신 멀쩡하고 정신건강한 내가 못할 게 없지 라고.
자금력이나 영업력에서 더 앞선 매장도 많았는데, 더 뛰어난 분들을 보면서 위축되고, 좌절한 적 없으셨나요?
저는 그분들과 경쟁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제가 그분들이 될 수 없고, 그분들이 제가 될 수 없잖아요. 나는 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잘하는 게 중요한 거죠. 그들과 나는 가는 길이 다릅니다. 참고는 할 수 있지만 시기 질투를 할 이유는 전혀 없어요. 거기 좋은 게 있으면 내가 갖다 쓸 수 있는가 없는가 판단하고 취하면 되는 거예요.
완벽해 보이시는 대표님께도, 콤플렉스 같은 게 있 실까요?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고 기대고 싶을 때가 있어요. 물론 아내나 가족들이 있지만요. 그런데 성공에 가까워질수록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없다는 것이 콤플렉스라면 콤플렉스 랄까.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는 진짜 콤플렉스가 생길 수가 없어요. 왜냐면 원래 없던 게 너무 많았으니까. 많이 가진 자들이 조금 빈 부분을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거죠.
수십명의 직원과 딸린 식구들까지 백여명의 생계의 무게를 짊어진 창업자의 고독과 책임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혹시 잘린 손가락의 장애가 콤플렉스인 적은 없으셨나요?’ 라는 나의 우문에
‘이 손은 내가 열심히 살아온 증표인데 외려 자랑스럽지요’ 하셨다.
깡패와 50:1로 싸우면서 생긴 상처라고 무용담도 풀 수 있고, ‘야~너는 손가락이 없냐 왜 전화 안 해?’ 하면 ‘형님 나 진짜 손가락이 몇 개 없잖아요’ 라며 너스레 떨 수도 있다고 하시며 유쾌하게 웃으시는 통에 나는 나의 부끄러운 질문을 주어 담고 싶었다.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으시다 면요?
기본과 신의입니다. 그 두 가치를 지키는 것이 여전히 가장 어려워요. 제 자신과 주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되면 그 순간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해요.
회사를 경영하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있어요. ‘내가 우리 직원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행동을 하고 있나?’, ‘내가 우리 직원들에게 올바름을 보여주고 있지 않으면서, 나는 직원들에게 외려 부당한 올바름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나?’
.
정상에서 오래 머물기를 원하지만, 시간은 우리를 산 아래로 떠민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지금은 정상이시라 이른 질문일수도 있지만, 내려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산에 올라갔으면 내려가야지 안 내려올 꺼예요? (웃음)
대신에 너무 골이 깊게 만들지는 말자 그런 주의예요. 너무 골이 깊으면 다시 나오기가 힘드니까 최선을 다해서 천천히 힘 좀 덜 들게 내려오자.
창업자의 눈에 비친 대기업 직장인은 어떤 모습인가요?
개인 역량이 정말 뛰어난 훌륭한 인재들이고 큰 기업에서 배운 일 하는 방식도 있어요. 그런데 이분들은 본인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본인의 일에 대한 자긍심이 없어 보일 때 안타깝습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어마어마한 철옹성인데 딱딱한 껍질을 깨고 나면 속은 물렁물렁한 코코넛인 거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경영주라면 당신을 채용하겠는가? 혹시 당신은 지금도 10년 전 20년 전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
대표님이 꿈꾸는 은퇴 후 모습은요? 공휴일에 더 바쁜 유통업에 종사하시면서 맘편히 쉬지도 못하셨는데, 버킷 리스트에 담아 놓으신 거 있으세요?
저는 밖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라,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나가서 잘 먹고 잘 놀고 싶어요. 하고 싶은 거는 그때그때 하면서 살면 되지 버킷 리스트는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거 만들어 놓으면 못 가면 이거 언제 가지, 해야 하는데 하며 스트레스예요. 날마다 생일이고 날마다 그냥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저는 좋아하는 일을 버킷리스트에 담아 놓고 미루고 싶지 않아요.
나에게 나 한복석은 어떤 사람 이라고 말해주고 싶으세요?
‘넌 정말 좋은 사람야’ 라고 제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내가 잘 못하고 있지 않나?’ 끊임없는 자기 검열과 반성 속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내가 되려 늘 노력하는 점을 셀프 칭찬해 주고 싶어요.
[에필로그]
안전한 회사 안에 나를 가두고 멈춘 채,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 다면 어쩌면 나는 진짜 나를 영원히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를 세상에 내 놓고 부딪히며, 체득한 나에 대한 생생한 ‘감각’이 없으니 작은 풍파에도 속절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배운 것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나의 능력을 믿고 일단 시도하면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점점 더 예측 가능한 타율 높은 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극 내향형인 내게 인터뷰를 청하고, 만나고 글로 정리하는 모든 과정은 불편함과 직면하는 고통의 시간이다. 쉽지 않는 도전이지만 2년째 이 사이드 프로젝트를 계속하는 이유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슴 깊은 곳에서 벅차오르는 그 뜨거운 감동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매일 출근하면 수많은 글감과 이야기를 만난다. 하기 싫던 보고서 업무도 설득의 글쓰기의 한 장르가 될 수 있다. 나는 까다로운 내 상사를 설득하며 내 글쓰기 근육을 단련할 수 있다.
“모든 스트라이크는 다음 홈런 가까이로 나를 이끈다”는 전설의 야구선수 베이브루스의 말처럼, 가슴에 큰꿈을 품고 더 많이 시도해 보기로, 뜨겁게 다짐해 본다.
인터뷰어: 생활기록자_우연
저서:
《좋아하는 일을 해도 괜찮을까:인터뷰로 묻고 글쓰기로 답하다》
인스타그램:
https://instagram.com/my_daily_writing_note
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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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출근길에 우연님의 인터뷰글을 읽으니 평범한 하루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저도 대표님의 말씀처럼 '너 참 좋은 사람이야'라고 저에게 얘기해주겠습니다. 힘이 되는 인터뷰글 감사합니다!
생활기록자_우연
오지님의 댓글이야 말로 저에게 큰 힘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나다운 길을 걷고있는 주변멋진분들의 인터뷰 계속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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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사장님, 열정적으로 인생을 이끌어 오신 모습이 대단하십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ㅎㅎ 인생극장 한 편을 본 것 처럼 생생하게 이야기 전달해주시는 우연님, 응원합니다!
생활기록자_우연
나무님 읽어주셔 감사해요. 나무님의 응원에 제가 조금더 행복해졌답니다~!! 고맙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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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같은삶
인생은 한복석대표님처럼 : 살아보는 연습과 실천을 병행해보려고 합니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알고..절실함이 주는 나의 삶의 원동력에 자신을 비롯한 주위분들까지 감싸 안으시는 대표님의 (인생은 아름다워)한국판 영화를 본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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