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더하고 나누며, 하나>展을 다녀와서 ...
“커다란 통나무를 앞에 두고 며칠씩 바라보면서 나무의 소리를 듣습니다. 나무의 생김새나 껍질과 결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리와 냄새와 존재의 근원까지 느끼고자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느낌과 정신이 하나 되었을 때 톱을 들어 작업을 시작합니다. 잘라진 면으로 새로운 면을 창조해나가며 나무와 나는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로서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는 김윤신 작가를 남서울 미술관에서 만났다. 예술 작품을 통해 감동을 받는다는 건 예술가의 삶에 공명한다는 뜻이다. 작가의 삶이 투영된 작품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 1935년생 김윤신 작가는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이다. 강원도 원산 출신, 일제 강점기와 6.25 등 격동의 시대를 거쳤다.
산에서 서울까지 목숨을 걸고 피난을 떠났고, 수용소 생활까지 한 적 있다. 힘겨운 시절을 다 거치면서 1955년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하고, 1960년대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상명대 교수를 지내기도 했는데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후 평생 아르헨티나를 거점으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아르헨티나는 지금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나라인데, 1980년대 아르헨티나로 떠났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활동 공간이 국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김윤신 작가는 한국 사회에는 덜 알려진 면이 있다. 고국을 떠나 낯선 곳에서 오랜 세월 예술가로 살면서 기도하듯이 작업했다. 그녀의 삶의 궤적을 담은 전시가 서울 관악구 남현동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리게 되었다. <김윤신:더하고 나누며, 하나>展이다.
김 작가는 2022년 부터 경기도 화성의 작업실에서 새롭게 작업을 시작하면서 ‘김윤신:더하고 나누며, 하나’ 전시를 준비했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 이뤄졌지만 가장 최근 화성 봉담의 작업실에서 제작한 목조각으로 ‘노래하는 나무’라는 섹션을 완성하였다.
김윤신은 북한의 원산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이하고 6.25전쟁 등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았다.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 후 1964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다양한 실험적인 조형 예술언어를 발전시켰다.
1969년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여류조각가회의 설립을 하였고, 1973년 제12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등 조각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84년 아르헨티나로 완전히 이주를 결심한 것은 팔로산토, 알가로보 등 현지의 단단한 나무의 질감을 만났기 때문이다. 조각가는 어떤 재료로 물성을 표현하는가가 매우 중요한데 한국에서 흔치 않은 수종으로 전기톱 작업을 하면서 70년대부터 시작한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라는 작품세계를 펼쳐나갔다.
“같은 거 같으면서 같은 게 하나 없어요. 자연이 그러하듯 나만이 하는 독특한 방법과 기법과 모든 것이 오롯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창조적인 세계에요”
김윤신 작가는 현재 88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작업복을 입고 톱밥가루를 날리면서 전기톱을 들고 작업을 하기로 유명하다. 현재 머물면서 작업하는 곳은 그의 제자이기도 한 이윤숙 조각가의 봉담 작업실이다. 이제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예술가의 길을 걸으면서 아침부터 밤 늦도록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둘의 인연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이윤숙 작가의 말을 들어 본다.
“김윤신 선생님이 성신여대 출강하던 시절 1년간 배웠죠. 그 때 배웠던 1년의 시간 때문에 저는 평생 조각가의 삶을 살게 된 것이고, 지금껏 스승과 제자로서의 연을 이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에 2008년 김윤신 미술관 및 2018년에는 아르헨티나 한국문화원에 김윤신 상설전시관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신 분인데 국내에서는 조명되지 않아서 제자로서 안타깝기도 해요.
요즘 6개월 넘게 선생님과 작업실에서 동거동락하면서 작업을 해나가는데 오히려 90세가 다 되신 스승님의 열정에 감동받을 때가 많아요. 새벽부터 밤 늦도록 온 힘을 다해 작업하시는데 정말 대단하세요. 평생 혼자 살면서 예술과 결혼한 분이시죠.”
이윤숙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기획 전시의 내막을 전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60년대 작가가 프랑스 유학 시절 판화과에 전과하여 석판화 세계에 빠지면서 작업한 석판화 작품도 선보였다. 당시 한국에서 보내온 한지에 석판화 찍기를 하는 등 그때부터 남들과 다른 방식을 추구했다. ‘예감’이라는 작품이 최우수 학생 작품으로 선정되어 파리의 한 TV방송에도 소개되었다. 석판화지만 조형적 특징을 담아낸 작업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상명대학교 교수를 지내기도 했는데 1988년 갑자기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조카가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었어요. 그 때 저에게 한 번 와보라고 했죠. 나라도 아주 크고, 작품 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면서. 어떤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실행에 옮겨 버렸어요. 실제로 가 보았더니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고 크고 귀한 나무가 많았죠. 뭔가에 홀린 듯 작업을 시작했어요. 며칠 만에 한국 대사관 찾아가 공보부에 전시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이력서를 갖고 오라기에 써 갔어요. 무작정 찾아가서 전시를 했던 건데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몰라요. 1년동안 30작품을 했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 식물 공원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고, 미디어 관심을 받으며 작가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모르던 일이었다. 근무하던 학교에서도 혈육이던 오빠도 몰랐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으니 소식을 전하려면 편지를 주고 받아야 했기에 사람들도 그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남미에서 조각가로 커야겠다고 결심했고, 뭘 먹고 살지에 대한 계획도 하나 없었던 때이다. 어릴 때는 전쟁을 겪으면 북한 원산에서 서울로 피난을 왔었고, 10살 무렵에는 난민 수용소에서 산 적도 있다. 총 맞을까봐 두려워하면서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를 보면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 컸다. 독립운동가였던 오빠 김국주의 영향을 받아 여성도 남성도 똑같이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스물 여덟 프랑스로 홀로 유학을 떠나는 길도 외롭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살았던 오빠를 보면서 ‘나도 무언가를 해야겠다,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느릿느릿 황소걸음을 가자는 생가과 함께.
프랑스, 한국, 남미 등지를 오가면서 다양한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이어갔다. 아르헨티나 말고 멕시코에서도 작업 활동을 했는데 어떤 작업들을 주로 하셨는지 물어보았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멕시코 예술 궁전 미술관 초대전을 계기로 세계적인 오닉스 산지로 유명한 멕시코 푸에블라 주의 테칼리 마을의 작업장에서 오닉스 작업을 하였어요. 준 보석으로 분류되는 경도 7의 광물을 조각하면서 혹독한 육체 노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닉스 석조각은 지구의 축약본처럼 우주가 지나온 시간이 층층이 쌓인 듯해요.
멕시코에서는 하루 한 끼만 먹고 작업했어요. 타코라고 강냉이 갈아서 지짐이처럼 만든 건데 그 위에다 선인장 이파리 연한 것과 풋고추 조그마한 걸 넣어서 먹어요. 작업했던 곳이 테칼리라는 마을이었는데 먹을 게 별로 없었어요. 저녁에 배고프면 맥주로 버티기도 하고. 한국 문화원에서 가끔씩 갈비를 해서 가져와 주시면 그 때 고기를 먹는 거죠. 일주일만에 오실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이주일, 한 달 넘게 안 오시던 때도 있고. 작업에만 빠져서 살았고 다른 것은 하나도 상관없었어요. 먹는 것, 자는 것, 미래 걱정 하나 없이...”
꾸준히 작업만 생각하면서 지냈던 김 작가는 다양한 재료를 탐구하며 시기마다 새로운 시도를 했다. 1990년대는 이상향에 대한 갈망으로 수직적인 형태의 날개 형상과 십자가 형태인 T자 조각을 하기도 했고, 2000년대는 남미의 토테미즘에 영감을 받아 목조각 채색을 시도하기도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마푸체를 알게 되면서 한국적 토테미즘과 남미의 토테미즘을 결합한 원시적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작품도 있다. 200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김윤신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앞으로 백세가 되어도 전기톱을 들고 조각을 하겠다고 말하는 김윤신 작가의 열정과 닿을 수 없는 이상향에 대한 열망은 젊은 생명력까지 느껴진다. 목조각, 석조각, 석판화, 회화까지 김윤신 작가의 삶의 궤적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던 <김윤신:더하고 나누며, 하나>展를 통해 깊은 영감을 받았다.
평생 조각을 해 왔던 그에게 과연 예술은 무엇일까. “그냥 예술은 삶이야” 라고 말한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라고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나무의 소리를 들으며 명상하듯이 작업을 해온 작가는 구순을 앞둔 오늘도 톱을 들고 나무를 자른다.
<김윤신:더하고 나누며, 하나>전시는 2023년 5월 7일까지 사당역 인근에 위치한 구)벨기에 영사관 건물관인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 이어진다. 미술관 야외에도 두 점의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나무조각을 알루미늄 주물로 캐스팅하고 김윤신 작가만의 터치를 거쳐 색동저고리 같은 컬러로 생명 가득한 나무의 원시성을 표현하였다.
인터뷰어 : 김소라 작가
수원에서 작은 책방 ‘랄랄라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e수원뉴스 시민기자로 13년째 활동중이다. 사람의 이야기에 감동받고, 사람에게서 배운다.
『타로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좋아하는 일을 해도 괜찮을까』 『여자의글쓰기』 『바람의끝에서마주보다』 『사이판한달살기』 『맛있는독서토론레시피』 등 다양한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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