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제주에 오래 있었다고 느낀다면

부제 : <나의 문어 이야기> 다큐멘터리 리뷰

2022.02.16 | 조회 3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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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 잔

매일 자정, 제주 한 달 살이를 같이 하게 됩니다.

 

오늘의 글과 어울리는 ASMR 추천드려요.

 

사실은 그제부터 휴무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어쩌면 더 오래 전부터. 매일 글을 쓰는 것에 신물이 난 것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제주살이에 있어서 권태를 느낀 게 더 컸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길었던 걸까? 스스로 내향인이라고 여겼지만 아무래도 일주일을 오롯이 혼자 지내기는 버거웠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한 감정기복으로 돌릴 수도 있겠다.

동쪽에 오래도록 있으니 볼 만한 건 다 보았다는 자만이 들었다. 함덕부터 세화, 평대리, 성산은 당연하고 표선부터 서귀포까지. 누군가에게는 속 좋은 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젠 육지로 올라가 할 일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을 볼 때마다 오히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더 부러워졌다. 그래, 쉴만큼 쉬었나보다.

하지만 쉬었다고해서 큰 변화를 느끼진 못했다. 한 달 살이를 통해 달라진 게 있느냐는 뻔한 인터뷰 질문을 받는다면 난 아무 말도 못하고 누구나 할만한 말을 내뱉을 거 같았다. 도전은 중요해요. 시야가 넓어졌어요. 제주는 참 아름답더라고요. 그건 제주가 숨기고 있던 비밀 같은 게 아니었다. 한 달의 시간을 과대평가했는지도 모르겠다. 숙소에만 틀어박혀 살며 넷플릭스 정주행이나 하고 있는 자신을 자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달 동안 난 멈춰 있던 게 아닐까,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분명 초반 에세이에서 "오롯이 이 시간을 느끼자. 부담을 느끼지 말자"며 자신을 달랬는데, 나를 달래기엔 나의 의지가 아직 부족했다.

감정이 밑으로 꺼지는 기분, 심해 속으로 빨려들어갈 때마다 사람마다의 대처 방식이 다르다. 처음에는 일기를 썼다. 감정을 글로서라도 털어놓으면 괜찮아질까 싶었는데 오히려 묻어둔 안 좋은 감정이 모래 속에서 끌어당겨왔다. 쓰레기장에서 낚시대를 드리운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나에겐 맞는 방법이었다. 넷플릭스를 틀어서 슬픈 영화나 볼까 싶었는데 추천 콘텐츠에 이게 떠올랐다. <나의 문어 선생님>

<나의 문어 선생님>은 일 년 동안 다시마숲에서 문어를 관찰한 다큐멘터리다. 지능이 강아지, 고양이와 비슷할 정도로 고도의 지능을 가진 문어는 인간과 교감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수중촬영하는 감독의 손을 맞잡기도 했고, 때로는 몸에 붙었다. 천적인 상어에게서 도망치고, 심지어는 우위를 점하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끝까지 살아남는 현명함을 자아냈다. 문어에게 위로를 받을 줄은 몰랐다. 허울 좋은 조언이나 위로의 말을 건넨 게 아닌데도. 그저 바다속에서 살아가는 일생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마음이 일렁일 수가 있구나.

감독은 매일 잠수를 하며 집요하게 문어를 쫓았다. 일분일초도 빠뜨리지 않고 문어만 생각하고, 문어처럼 행동하려고 하고, 문어의 이야기만 했다. 매일 같은 곳을 잠수하며 자연의 공생관계를 이해함과 동시에 스스로 자연의 일부 속으로 녹아들었다. 끈질기고 집요한 시선.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 감독은 이제 여러 사람과 매일 잠수를 하며 바다 속의 다시마숲을과 자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제주 여행 끄트머리에 본 게 후회스러웠다. 만약 제주로 길게 여행을 간다면 첫날에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보기를 추천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가끔은 우리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게 된다.

구름에 짓눌리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구름에 짓눌리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오늘의 제주도는 햇빛이 비추는 맑은 날에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는데도 구름이 걷혀 파란 하늘이 보이기도 했다. 구름이 바다와 하늘 사이에 내려앉았다. 제주는 유독 흐린 날이 많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이 무겁게 짓누른 구름이 하늘에 깔려 있었지만, 항상 그 사이로 햇빛이 어둠침침하게 나타났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하늘이 맑았다. 바람이 구름을 밀어주자 그제서야 햇살이 바다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파도에 반사된 햇살에 눈이 부셔 눈가를 찌푸려야했다. 가늘게 뜬 시야 사이로 윤슬은 여전히 반짝였다.

앞에서는 한 달 동안 이룬 게 없다며 자책하는 말을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바다 사진을 원없이 찍었다. 매일 제주에서의 하루를 기록했다.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이라 사진이나 글이 없으면 금세 잊어버린다. 메일을 쓰기로 마음 먹은 건 제주 여행 중 가장 잘한 일이다.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메일을 쓸 때마다 이런 고민을 많이 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거에 어디까지를 써야할까. 너무 깊어지는 이야기는 부담스러울까봐 일부러 빼두는데, 그렇다고 가벼운 여행기를 쓰기에는 할 말이 없는 날이 제일 쓰기가 어려웠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은 거리감을 지녀야 한다. 작가는 글에 매몰되면 안 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감정에 깊이 파고들면 시선이 나에게로만 향하여 주변을 놓쳐버린다. 멀리서 바라보는 연습이 아직 많이 필요하다.

그래도 멀리서 바라보는 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온전히 바다속에서 유영하기로 했다.


결론 : <나의 문어 선생님> 한 번 보세요. 두 번 보세요.

추신 : 참고로 제주도에서 정주행하던 넷플릭스는 <애나 만들기>입니다. '가짜 독일 상속녀'라는 실화 사건을 토대로 만든 건데, 연출이 기가 막힙니다. 꼭 보세요.

추신2 : 메일을 쓰기 잘했다고 느끼는 건, 여러 사람들이 보내주는 애정 덕분도 있습니다. 댓글이나 이메일 답장, 카톡으로 오는 반응들 등 볼 때마다 힘이 생겨요. 이 자리 빌어서 다시 감사 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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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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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라니

    0
    about 2 years 전

    매일 읽다가 오랜만에 댓글을 남겨보네요, 모두가 긍정적으로 제주 살이에 대해 좋은 추억에만 집중했다면 작가님은 약간의 고단함을 느끼신 것 같아요...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다보면 외려 외로움이나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에 휩쌓이게 되는 것 같아요. 그건 누구나 어느 공간에 있던 부딪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문어 선생님' 정말 추천 많이 받았는데 이렇게 또 추천을 받으니 안 볼 수가 없겠어요! 우리도 모두 자연의 일부라는 말이 참 좋았습니다! 가끔 찬 바람을 느끼며 가만히 서있다 보면 춥다라는 느낌보다는 개운하다, 마음이 후련해진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제가 자연의 일부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겠죠? 다큐멘터리를 통해 위로 받으신 작가님의 으른미에 오늘도 엄지를 치켜세우게 됩니다. 당신은 정말 단단한 사람입니다! 메일함을 열어볼 때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번에는 어떤 글이 올라왔을까, 하면서 꼼꼼히 읽어가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제주에서는 자신만의 시간을 더 자유롭게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또 다른 바쁨이, 또 다른 일이 작가님을 찾아갈테니까요!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당!

    ㄴ 답글 (2)
  • 김하물

    0
    about 2 years 전

    ㅎㅎ오 나의 문어 선생님 짧게 짥게 소개로만 봤는데 정말 좋구나 ! 사실 동물 나오는 거나 바다 속을 꺼리는 경향이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보겠습니다. 껄껄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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