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시선으로부터

남의 시선을 엿본다는 것

2022.02.17 | 조회 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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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 잔

매일 자정, 제주 한 달 살이를 같이 하게 됩니다.

오늘의 제목은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인 '시선으로부터'에서 빌려왔다. (참고로 책의 내용과는 무관하다. 책은 읽다가 중간에 어쩌다보니 멈췄다. 다시 읽어야지.) 그리고 이번 메일은 바로 어제 보낸 '나의 문어 선생님' 다큐멘터리와도 또 연관이 있다. 가끔은 우주가 나를 위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는 그걸 사명이라고, 거창하게 말한다. 나는 사명까지는 아니고 메일 소재 정도이지만 혹시 모른다. 오늘 느꼈던 것이 나중에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는.

길을 가다가 발견한 새. 제주에 오면 새를 많이 찍게 된다.
길을 가다가 발견한 새. 제주에 오면 새를 많이 찍게 된다.

<나의 문어 선생님> 다큐를 보면서 자연이란 무언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끈질기고 집요하게 자연을 들여다보는 감독과 그 시선을 따라가는 연출. 어제는 영상을 통해서 시선을 엿보았다면, 오늘은 사진을 통해 내가 모르던 자연의 일부분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삼달리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들렀다. 제주의 오름에 반한 사진작가가 평생토록 제주에 매달리며 찍은 사진들이 있는 갤러리였다.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작가는 갤러리를 열기로 했다. 자신의 유품이 될 사진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언젠가는 가야겠다고 생각한 게 제주를 떠나기 전 일주일도 채 안 남은 시점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원래 오늘의 계획은 종달리를 가는 거였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 날씨도 흐렸고, 바람이 많이 불어 추웠다. 바깥에 오래 있을 날씨는 아니어서 가까운 갤러리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버스 시간표를 보니 갤러리로 가는 버스가 두 시간 뒤에야 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걸어서 30분 걸리는 거리.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꽃 한송이의 데코가 마음에 들었다
꽃 한송이의 데코가 마음에 들었다

삼달리 깊숙이 들어가면서 집 몇 채를 발견했다. 벽과 지붕 모두 새파란 집을 발견하고서 반가웠다. 인터넷에서 종종 보던 삼달리 유명 펜션도 지나갔다. 갤러리에 가기 전에 식사도 파는 카페에 들려 파스타를 먹었다. 가족단위로 두 팀이 와있었는데 그 사이에 껴서 혼자서 파스타를 먹었지만 크게 신경쓰이진 않았다. 식탁에 앉아 보이는 풍경이 예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파스타는 맛있었고, 사장님이 선물이라며 연필을 주셨다. 누구에게 재미있는 일이 있다며 말할 만한 에피소드는 아니었으나, 이런 소소한 행복이 결국 여행을 채워주는 게 아닐까.

김영갑 갤러리에 들어가 사진 앞에 서서 집요하게 보는 연습을 했다. 아직도 미술품이나 사진 앞에 서면 어떤 방식으로 들여다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멍하니 서서 하나하나 곱씹기만 했다. 소가 몇 마리 보이고, 오름의 그림자가 어디에 비춰져 있고, 파도의 물결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그러다가 카메라 렌즈 뒤에 서 있을 작가를 상상했다.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제주의 사진을 찍었을까.

제주 여행에 있어서 아쉬운 점은 오름을 몇 번 오르지 못했다는 거다. 표선에 있는 매오름과 성산일출봉, 그리고 우도봉이 다이다. (곧 가족들과 한라산 등반이 예정되어 있기는 하다.) 오름은 뚜벅이에겐 썩 친절하지 않아 가는 버스도 얼마 없고, 버스정류장에 내린다고 하더라도 좁은 길을 지나 도보 30분은 걸어야 오름 입구에 도착한다고 한다. 뚜벅이가 오름을 오르고 내려오다가, 택시도 잡히지 않은 채 해가 져서 난감했다는 글을 보고서 지레 겁먹고 가지 않은 것도 있었다.

김영갑 갤러리 안의 풍경
김영갑 갤러리 안의 풍경

작가는 제주에게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고 말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오름에 올라 최고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하여 기다렸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는 장르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기다림이 가장 큰 예술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언제올지 모를 그 장면 하나를 건지기 위하여 몇날 며칠, 몇 주 동안 무거운 카메라를 이고서 가파른 오름을 올랐을지.

언젠가부터 제주의 자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감성적인 소품샵, 예쁘게 꾸며놓은 카페를 전전했다. 자연을 보기에는 날이 너무 춥고 바람이 세다는 핑계였다. 제주에 오고나니 오히려 핑계거리가 자꾸만 쌓여갔다. 어차피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으니까, 라며 무턱대고 시간을 빌려왔더니 남아나는 게 없었다.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일출을 본 적이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긴 했다. 내일은 꼭 일출을 보고 말 거라고 이 메일을 빌려 다짐해본다.

내 발길을 멈추게 한 노을 사진
내 발길을 멈추게 한 노을 사진

사진을 하나씩 둘러보다가,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 사진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흰 색의 구름 역시 물감이 흩뿌려진 듯이 각각의 색을 껴안고서 하늘에 휘몰아쳤다. 인스타그램이나 핀터레스트에서도 아름다운 사진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사진이 작은 휴대폰 기기에서 나와 벽에 전시된 순간, 작은 기기로는 볼 수 없었던 장엄함이 나를 압도했다. 사진을 크게 인쇄할수록 가격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크게 인쇄해야만 하는 그런 사진이 있다. 크기와 감동이 비례한다는 건 자본적으로 슬픈 사실이지만, 실제의 풍경을 마주한 감동을 따라가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나는 모르던 제주를 찾아내는 이 작가의 시선이 부러웠다. 내가 보는 풍경과 그가 보는 풍경이 같더라도, 분명 다른 게 있을 거였다. 숱하게 지나왔던 풍경들이 그의 눈에서는 모두 작품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하니 지나간 것들이 아쉽고 꽤 분했다. 이런 게 예술가적 감수성이라는 걸까.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는 이들은, 태생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시선이란 건 배울 수 없는 것이다.

그 작가는 삼달 앞바다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작가는 삼달 앞바다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같은 걸 볼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같은 거에 즐거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감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때론 실망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선을 가진 이들을 찾아 헤맨 적도 있다. 그래서 항상 똑같은 자리에만 머무른 실수를 반복하기도 했다. 다른 걸 보려고 헤매야만 새로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때론 잊어버리고는 한다. 

덕분에 오늘은 바다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겨울은 여행하기 썩 좋은 계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추워서 밖에 있지를 못하니 가만히 앉아 바라보기에는 몸이 덜덜 떨렸다. 대신에 테라스에 나가서 밤바다를 엿보았다. 흐린 날이었음에도 보름달이 구름 너머로 비쳤다. 바다의 형체도 못 알아볼 정도로 새까만 밤이었는데 오늘따라 그랬다. 마치 환한 빛 아래에 밤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제주에도 이토록 밝은 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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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하물

    0
    about 2 years 전

    제주가 섬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제주만의 무언가가 있는지. 작가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가 있나봐. 자연이 가득한 여행지라면 거의 그런 사연들이 있지만 제주는 특히..? 긁적..그렇게 치면 안성도 은근히..? ㅋ 희정이 보는 시선은 영갑씨의 시선으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해. 최근에 우리 수업 때 잠깐 교재였던 스티븐 킹 단편집 5권을 다시 읽었는데, 책의 앞에 스티븐 킹이 작가의 말로 남긴 서문? 에서 꽤 많은 위로와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불씨를 얻었다..! 대충 아래와 같은 말. '글쓰기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일해야 하는 종류의 직업이다. 사람들은 모두 정신 안에 어떤 망을 가지고 있는데, 망의 크기나 촘촘한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의 망에는 걸린 것이 여러분의 망은 그냥 통과할 수도 있고, 여러분의 망을 통과한 것이 나의 망에는 걸릴 수도 있다. 그걸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또한 자신의 망에 걸린 침전물을 파헤쳐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의무가 있는데, 거기서 찾은 것이 한 개인을 가두는 일종의 한계가 된다. 사진을 찍는 공인 회계사나 동전을 수집하는 우주 비행사가 있듯이 석탄으로 묘비를 열심히 문지르는 선생님도 있을 수 있다. 정신의 망에 걸린 침전물, 그냥 통과되지 못하는 그 대상들은 종종 한 개인의 강박 관념이 되는데, 문명 사회에서는 암묵적인 합의하에서 그러한 강박을 '취미'라고 한다. .. (중략) .. 매일 나의 침전물을 새로 거르는 것이다. 버려진 조각들을 꼼꼼히 살피는 것은 물론, 관찰하고 기억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듬으며 망을 통과하지 못한 채 무의식으로 떨어져 버릴 대상들에서 무언가를 얻어 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망에 걸린 것은 두려움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내용. 또, 진솔한 마음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대가가 주어지지 않아도 계속 그 행위를 할 것이라는 말도 나를 돌아보게 하는 말이었고 .. 흠. 망에 걸리는 알갱이들이나 시선이나 치환이 가능해 보여서 생각이 났어. .. 곧 가족들과 한라산 등반이 예정되어 있다니..! 그 썰도 궁금하다 ㅎㅎ 늘 덕분에 가슴 뚫리는 바다 사진과 좋은 경험 대리로 잘 보고 있어 고마워 !! >3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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