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내가 제주에 왜 왔더라

제주에서 꼭 무얼 이뤄야만 하나

2022.02.03 | 조회 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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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 잔

매일 자정, 제주 한 달 살이를 같이 하게 됩니다.

이제 제주 한 잔만 다 쓰면 끝난다!
이제 제주 한 잔만 다 쓰면 끝난다!

하루하루 계획이 세워져있지 않으니 저녁이 되면 침대에 누워 '내일은 뭐하지?'를 고민하게 된다. 일기예보를 보니 또 흐림이다. 어째 제주의 날씨는 맑은 날이 얼마 없을까. 바람은 어찌나 센지 가만히 있으면 날아갈 성 싶다. 바람이 센 날 하늘을 바라보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새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분명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고 있지만, 와이어로 감긴 것마냥 그 자리에서 제자리 날개를 하고 있는 새들. 잠깐 날개짓을 멈추면 바람에 떠밀리는데, 그런 새를 장난스레 놀리곤 했다. 어차피 나도 같은 처지였다. 바람에 덜덜 떨어 버스를 기다리는 뚜벅이 꼴이. 제주의 살얼음 같은 바람에 몇 번 당하니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어딜 돌아다니려고 해도 바람 때문에 고민하게 만든다. 내일 과연 날씨는 좋으려나.

내일은 뭘할까. 너무 멀리 나가는 건 제법 몸이 힘든데. 조용한 북카페에 가서 책도 읽고, 노트북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밥으로는 갈치조림. 방금 1인 갈치 조림 되는 곳을 검색하다가, 성산읍에 '부촌식당'이란 곳을 알아보았다. 점심을 어디서 먹을지 정했으니 카페도 그 근처에서 머물면 되는 거였다. 나의 계획은 이런 식으로 정해진다. 가고 싶은 한 곳이 명확하다면 밥이든 카페든, 기념품샵이든 그 근처로 알아본다. 뚜벅이의 루트를 최소화 하기 위함이다. 밥으로 갈치를 먹고, 광치기 해변을 갔다가 날이 좋다면 종달리까지 가볼 생각이다. 이러다가 안 갈 수도 있다. 원래 P형의 계획이 그렇지 뭐. (본인 INFP)

이렇게 내일 계획을 짜다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나, 제주도에 뭐하려고 왔더라.

이렇게 제주도 한달살이를 왜 왔더라, 하는 질문이 문득 찾아온다. 즐겁게 여행을 하다가도 '내가 이러려고 제주도를 왔나'하는 자책이 들곤 했다. 한 달 살기를 계획하며 제주도에서 하고 싶은, 해야 하는 일들을 몇 가지 적어왔다. 매일 아침 달리기, 제주도에서 프랑스어 공부하기, 제주 한 잔 메일 매일 보내기, 브이로그 촬영하기, 블로그에 제주 맛집 포스팅하기 등등. 수많은 일들을 계획했지만 이중에서 겨우 달성하고 있는 건 그나마 제주 한 잔이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감사가 가득 담긴 윙크를😉)

물론 브이로그나, 프랑스어, 맛집 포스팅은 가벼운 목표에 불과했기에 이루지 않아도 그만, 이뤄도 그만인 정도였다. 내가 제주도에 오고 싶었던 이유, 제주에 와서 꼭 이루고 싶었던 건 따로 있었다. 소설을, 그것도 장편소설을 써보는 거였다. 주기적으로 상기시키지 않으면 잊고 말 나의 목표들은 우리 밖을 빠져나간 양떼 같았다. 양이 어찌나 활기가 넘치던지 우리를 벗어나 저 멀리, 길을 잃어버릴 때까지 나아간다. 양을 몰고 우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끝이 나니, 그 이상은 할 수가 없다. 나의 빈약한 핑계다.

내 귀여운 인센스 스틱 깨알 자랑 (홀더는 그냥 제주에서 주운 돌이다)
내 귀여운 인센스 스틱 깨알 자랑 (홀더는 그냥 제주에서 주운 돌이다)

이것도 어쩌면 병인가. 무얼 하던지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 옛날에는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겼는데, 칼을 뽑으면 무라도 베어야 한다는 가치관이 어느새 나를 사로잡게 되었다. '연애의 참견'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데 그중에 '미라클모닝을 하는 남자친구'라는 제목으로 사연이 소개가 되었다. 남자친구가 극강의 자기계발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여자친구(사연자 본인)가 잠시 쉬러 제주도에 간다고 하니 "그럼 영상이라도 찍어보는 건 어때? 아니면 글을 써보던가"라면서 할 만한 거를 추천해주었다고 한다. 미안하게도 나는 이때 "남자친구 너무 좋은데?"라고 생각했다. (물론 사연을 보면 남자친구는 그 한 번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여자친구를 억압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친구들과 만날 때, 여자친구의 학벌이나 직장이 부끄러워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제주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기대가 높아지니 실망이 잦다. 내가 성공할 거라는 자신감은 있지만, 지금의 나 자신이 그 자신감과 기대에 비해 한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목표를 높게 세우니 달성할 확률이 적다. 스스로를 불성실하다고 여긴다. 저마다 자신을 붙잡는 굴레들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게임으로 치면 사대천왕. 웃긴 건 이 부정적 성향을 어떻게든 해결했다고쳐도 다른 게 나오기 마련이란 거다. "하하! 걔는 사실 우리 중에 가장 최약체였어!"라는 뻔한 멘트를 던지면서. 그래, 사람이 어떻게 완벽하겠어. 극복할 생각은 이미 접었다. 최대한 감정을 부풀리지 않고, 같이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제주도 한달살기 행복하게 보내기 11일차
제주도 한달살기 행복하게 보내기 11일차

내가 제주에 왜 왔더라, 하는 질문이 들면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왔다고. 굳이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다고. 습관을 만들려면 부담감을 없애야 한다. 하루 책 다섯 페이지 읽기, 푸쉬업 다섯 번 하기, 아니면 매일 글 다섯 줄 쓰기와 같이 이루기엔 부담없는 것들. 실패하더라도 "괜찮아"라고 하며 자책하지 않기. 이런 당연한 것들을 잊어버릴 때가 너무 많다. 그럼 오늘은 딱 다섯 줄만 써보기로 하자.

내일은 대신 카페에서 여섯줄을 쓰자. 딱 그 정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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