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제주 한달살기를 끝내며

저는 서울보다 제주도가 더 추웠습니다

2022.02.23 | 조회 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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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 잔

매일 자정, 제주 한 달 살이를 같이 하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제주 한 잔 입니다. 

섭지코지의 바다물결
섭지코지의 바다물결

바로 어제 저는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소감이 어떤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새도 없이 피곤에 지쳐 오자마자 곯아떨어졌습니다. 비행기에서도 야경을 볼 정신 없이 그냥 눈을 감아버렸네요. 눈을 뜨자 오늘이고, 서울이고, 한파주의보가 떴습니다. 제주도는 눈은 내렸어도 영하로 내려간 적은 없었는데 서울은 영하 10도더라고요. 제주도의 찬 바람을 예상하지 못하고 얇은 코트나 숏패딩만 들고 갔었기에 추위에 많이 떨었습니다. 집에 있는 두툼한 파카를 꺼내 입으니 영하 10도여도 퍽 춥진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래요, 제게는 제주도가 더 추웠습니다.

제 메일을 처음부터 받으신 분들도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고?" 이제 다음주면 삼월입니다. 저는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 제주에서 기억나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버버, 하며 우물쭈물할 게 뻔합니다. 재미있게 썰을 풀진 못하겠네요. 제주에 처음 왔을 때도 "지금 제주라고?"하며 얼떨떨했는데, 서울에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서울이라고?" (좀 더 사실대로 말하면 경기도이지만요. 경기도민입니다.)

특정 사건이 기억난다기보단 바다의 풍경과 햇살이 드리우던 카페, 그곳에서 책을 읽을 때 느낀 감정이 생각납니다. 차마 말로 풀어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직 삼달의 앞바다만큼은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습니다. 움직이기 귀찮아 침대에 누워있다가도, 몸을 겨우 일으켜 창문을 열면 펼쳐지던 청량한 바다의 빛깔. 

물보라가 거칠게 일어나는 파도를 좋아합니다
물보라가 거칠게 일어나는 파도를 좋아합니다

저는 좀 뒷북을 치는 타입입니다. 그리움이 바로 몰려오진 않죠. 벌써부터 그립다거나, 다시 돌아가고 싶다거나, 눈물이 찔끔 나오지는 않습니다. 후폭풍이라고 하죠. 중학생 때 홈스테이를 하러 미국에 간 적이 있습니다. 미국 친구들과 이제 헤어지게 되어 인사를 나누고서 공항에 올랐어요. 그런데 공항에 오르고 얼마 안 있자 갑자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쏟아지는 거였습니다. 슬퍼서 벅차오른다는 감정보다는, "왜?"라는 의문이 들만큼 갑자기였습니다. 그때는 왜 제가 울었는지 몰랐지만 지나고보니 헤어져서 슬픈 게 그제야 반응한 건가 싶더라고요. (하필이면 같이 홈스테이 갔던 한국인 친구끼리 커플이 되었다고 발표할 시점에 눈물이 나와서 상황이 난감했습니다. 누가 보면 치정 싸움인 줄 알았겠네...)

저는 변화에 적응하는 게 워낙 빨라서 즐겁게 세상 살아가지만, 드문드문 그리워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언가 허전해서, 그 허전함을 조금이라도 채우려고 몸을 부단히 움직이는데도 여백은 여전할 때. 제주를 다녀오며 마음의 여백이 한 움큼 더 생겼습니다.

한창 제주도로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일기장 한 켠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습니다. 

- 매일 아침 파도를 보며 깨어나는 아침을 상상하니까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상상 속에서의 나는 감동 받았고,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눈물을 흘린다.

물론 실제로 아침 바다를 보며 눈물을 흘리진 않았습니다. 그렇게까지 감성적인 사람은 아니거든요. 이젠 제주도로 가고 싶다는 말은 일기장에 쓰이지 않을 거 같습니다. 대신, 제주도를 아주 많이 그리워한다고 쓸 겁니다. 제주도는 더는 제게 가야만 하는 여행지나 섬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라는 명사는 그리움이나 후회, 미련, 혹은 다시, 라는 뜻으로 새롭게 자리잡게 되었네요.

제주도에는 벌써 매화가 피었습니다
제주도에는 벌써 매화가 피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미용실을 가는 거였습니다. 제주도를 가기 전에도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했으니 한 삼사개월은 머리를 자르지 못한 거였습니다. 부스스해진 머리를 도저히 못봐주겠어서 바로 미용실을 예약했습니다. 새로운 마음을 하고자 빌드펌이란 걸 해보았는데요, 잘 어울릴진 모르겠네요. 새롭게 봄옷도 마련했습니다. 저는 곧 개강이란 걸 합니다. 대면수업을 하는데 죽은 듯이 학교에 다니려고요. 이젠 시작을 준비해야 할 단계입니다.

제주도에 가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를 말하자면, 미룰 수 있기 때문이라 답하겠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고민을 미룰 변명거리가 됩니다. 지금은 제주도니까, 나는 제주도에 있으니까, 이런 고민들은 나중에 해도 돼. 물론 쌓이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꽤 편해지더라고요. 잠시나마 놓는 순간마저 없을 때가 있을 테니까요. 집에 있다고 하더라도 바로 옆에는 어질러진 옷가지와 책무더기, 휴대폰에서 울리는 마감일자, 누군가와의 거절할 수 없는 약속과 빠르게 줄어가는 통장잔고와 같은 것들이 눈에 거슬리잖아요. 제주도는 거기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입니다. 핑계를 대야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명분이라는 이름의 티켓을 들고서 잠깐 여행을 가는 걸 추천해요. 카카오톡 프로필상태창에는 '제주도입니다. 카톡 X'라고 잠깐 켜두고 실제로는 방 안에서 홀로의 시간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비행기모드를 틀어두고서요.

눈이 쌓인 1100고지의 풍경
눈이 쌓인 1100고지의 풍경

저녁 10시, 늦어도 11시에는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습관은 생겼습니다. 휴무를 할까 말까, 마음 속 양심과 투쟁을 하던 시간도 이젠 없네요. 가상으로 마감이 있다고 생각하며 매일 글을 써내려가고자 해요. 제주 한달살기를 하며 가장 잘한 일은 당연코 이 메일링을 시작한 거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약속을 했기에 지킬 수 있었어요. 항상 봐주었기에 글을 쓸 힘이 났습니다.

이제는 내일 봅시다, 라고 말할 수 없네요.

물론 저는 또 다른 글로 찾아올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에세이는 아니겠지만요. 메일링으로 하는 사업에 관심이 생겼거든요. 기회가 된다면 그에 대한 내용도 여러분에게 전달드리고 싶습니다. 제주한잔의 글을 재편집해서 브런치에 올릴 예정입니다. 제 글을 쭉 보고 싶은 분들은 브런치로 와주길 바라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매일 글을 주고, 그걸 읽어주는 이 관계가 인연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메일을 쓰면서 여러 사람에게 응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느낀 건, 누군가 무얼 시도하려고 하면 꼭 응원해주어야겠다. 굳이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하지 않아도, 그걸 관심있게 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될 테니까. 제가 당신께 받은 것처럼요. 그러니 어떤 일을 한다면 저한테도 홍보해주길 바라요. 당신을 응원하고 싶으니까요.

더는 내일 보지 못하는 사이더라도,

마음속으로 응원했던 사이는 되니까요, 우리.

 


 

이번주내로 Q&A 글이 올라올 예정입니다. 정보성 위주로 진행될 거 같아서 마무리 인사는 여기서 마칠게요.

 

그동안, 제주 한 잔을 사랑해주신 구독자님.

당신만의 제주를 기대하며.

 

제주한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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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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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하물

    0
    about 2 years 전

    와 바다도 그렇고 풍경도 그렇고 넘 가슴이 뻥 뚫리는군. 이제 학교에 다닐 시간이군요. 죽은 듯이 다니지는 말구 가끔 술 한잔 합시다 ㅎㅎ (너를 맞이하기 위한 집 단장 진행 중..) 메일링 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ㅎㅎ 덕분에 좋아하는 사람의 제주 한 달을 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나저나 미용실에 오랫만에 갔다니, 새로운 머리인가? 암튼 보고 싶군.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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