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주 한 잔 입니다.
바로 어제 저는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소감이 어떤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새도 없이 피곤에 지쳐 오자마자 곯아떨어졌습니다. 비행기에서도 야경을 볼 정신 없이 그냥 눈을 감아버렸네요. 눈을 뜨자 오늘이고, 서울이고, 한파주의보가 떴습니다. 제주도는 눈은 내렸어도 영하로 내려간 적은 없었는데 서울은 영하 10도더라고요. 제주도의 찬 바람을 예상하지 못하고 얇은 코트나 숏패딩만 들고 갔었기에 추위에 많이 떨었습니다. 집에 있는 두툼한 파카를 꺼내 입으니 영하 10도여도 퍽 춥진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래요, 제게는 제주도가 더 추웠습니다.
제 메일을 처음부터 받으신 분들도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고?" 이제 다음주면 삼월입니다. 저는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 제주에서 기억나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버버, 하며 우물쭈물할 게 뻔합니다. 재미있게 썰을 풀진 못하겠네요. 제주에 처음 왔을 때도 "지금 제주라고?"하며 얼떨떨했는데, 서울에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서울이라고?" (좀 더 사실대로 말하면 경기도이지만요. 경기도민입니다.)
특정 사건이 기억난다기보단 바다의 풍경과 햇살이 드리우던 카페, 그곳에서 책을 읽을 때 느낀 감정이 생각납니다. 차마 말로 풀어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직 삼달의 앞바다만큼은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습니다. 움직이기 귀찮아 침대에 누워있다가도, 몸을 겨우 일으켜 창문을 열면 펼쳐지던 청량한 바다의 빛깔.
저는 좀 뒷북을 치는 타입입니다. 그리움이 바로 몰려오진 않죠. 벌써부터 그립다거나, 다시 돌아가고 싶다거나, 눈물이 찔끔 나오지는 않습니다. 후폭풍이라고 하죠. 중학생 때 홈스테이를 하러 미국에 간 적이 있습니다. 미국 친구들과 이제 헤어지게 되어 인사를 나누고서 공항에 올랐어요. 그런데 공항에 오르고 얼마 안 있자 갑자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쏟아지는 거였습니다. 슬퍼서 벅차오른다는 감정보다는, "왜?"라는 의문이 들만큼 갑자기였습니다. 그때는 왜 제가 울었는지 몰랐지만 지나고보니 헤어져서 슬픈 게 그제야 반응한 건가 싶더라고요. (하필이면 같이 홈스테이 갔던 한국인 친구끼리 커플이 되었다고 발표할 시점에 눈물이 나와서 상황이 난감했습니다. 누가 보면 치정 싸움인 줄 알았겠네...)
저는 변화에 적응하는 게 워낙 빨라서 즐겁게 세상 살아가지만, 드문드문 그리워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언가 허전해서, 그 허전함을 조금이라도 채우려고 몸을 부단히 움직이는데도 여백은 여전할 때. 제주를 다녀오며 마음의 여백이 한 움큼 더 생겼습니다.
한창 제주도로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일기장 한 켠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습니다.
- 매일 아침 파도를 보며 깨어나는 아침을 상상하니까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상상 속에서의 나는 감동 받았고,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눈물을 흘린다.
물론 실제로 아침 바다를 보며 눈물을 흘리진 않았습니다. 그렇게까지 감성적인 사람은 아니거든요. 이젠 제주도로 가고 싶다는 말은 일기장에 쓰이지 않을 거 같습니다. 대신, 제주도를 아주 많이 그리워한다고 쓸 겁니다. 제주도는 더는 제게 가야만 하는 여행지나 섬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라는 명사는 그리움이나 후회, 미련, 혹은 다시, 라는 뜻으로 새롭게 자리잡게 되었네요.
서울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미용실을 가는 거였습니다. 제주도를 가기 전에도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했으니 한 삼사개월은 머리를 자르지 못한 거였습니다. 부스스해진 머리를 도저히 못봐주겠어서 바로 미용실을 예약했습니다. 새로운 마음을 하고자 빌드펌이란 걸 해보았는데요, 잘 어울릴진 모르겠네요. 새롭게 봄옷도 마련했습니다. 저는 곧 개강이란 걸 합니다. 대면수업을 하는데 죽은 듯이 학교에 다니려고요. 이젠 시작을 준비해야 할 단계입니다.
제주도에 가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를 말하자면, 미룰 수 있기 때문이라 답하겠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고민을 미룰 변명거리가 됩니다. 지금은 제주도니까, 나는 제주도에 있으니까, 이런 고민들은 나중에 해도 돼. 물론 쌓이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꽤 편해지더라고요. 잠시나마 놓는 순간마저 없을 때가 있을 테니까요. 집에 있다고 하더라도 바로 옆에는 어질러진 옷가지와 책무더기, 휴대폰에서 울리는 마감일자, 누군가와의 거절할 수 없는 약속과 빠르게 줄어가는 통장잔고와 같은 것들이 눈에 거슬리잖아요. 제주도는 거기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입니다. 핑계를 대야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명분이라는 이름의 티켓을 들고서 잠깐 여행을 가는 걸 추천해요. 카카오톡 프로필상태창에는 '제주도입니다. 카톡 X'라고 잠깐 켜두고 실제로는 방 안에서 홀로의 시간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비행기모드를 틀어두고서요.
저녁 10시, 늦어도 11시에는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습관은 생겼습니다. 휴무를 할까 말까, 마음 속 양심과 투쟁을 하던 시간도 이젠 없네요. 가상으로 마감이 있다고 생각하며 매일 글을 써내려가고자 해요. 제주 한달살기를 하며 가장 잘한 일은 당연코 이 메일링을 시작한 거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약속을 했기에 지킬 수 있었어요. 항상 봐주었기에 글을 쓸 힘이 났습니다.
이제는 내일 봅시다, 라고 말할 수 없네요.
물론 저는 또 다른 글로 찾아올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에세이는 아니겠지만요. 메일링으로 하는 사업에 관심이 생겼거든요. 기회가 된다면 그에 대한 내용도 여러분에게 전달드리고 싶습니다. 제주한잔의 글을 재편집해서 브런치에 올릴 예정입니다. 제 글을 쭉 보고 싶은 분들은 브런치로 와주길 바라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매일 글을 주고, 그걸 읽어주는 이 관계가 인연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메일을 쓰면서 여러 사람에게 응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느낀 건, 누군가 무얼 시도하려고 하면 꼭 응원해주어야겠다. 굳이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하지 않아도, 그걸 관심있게 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될 테니까. 제가 당신께 받은 것처럼요. 그러니 어떤 일을 한다면 저한테도 홍보해주길 바라요. 당신을 응원하고 싶으니까요.
더는 내일 보지 못하는 사이더라도,
마음속으로 응원했던 사이는 되니까요, 우리.
이번주내로 Q&A 글이 올라올 예정입니다. 정보성 위주로 진행될 거 같아서 마무리 인사는 여기서 마칠게요.
그동안, 제주 한 잔을 사랑해주신 구독자님.
당신만의 제주를 기대하며.
제주한잔 올림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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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물
와 바다도 그렇고 풍경도 그렇고 넘 가슴이 뻥 뚫리는군. 이제 학교에 다닐 시간이군요. 죽은 듯이 다니지는 말구 가끔 술 한잔 합시다 ㅎㅎ (너를 맞이하기 위한 집 단장 진행 중..) 메일링 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ㅎㅎ 덕분에 좋아하는 사람의 제주 한 달을 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나저나 미용실에 오랫만에 갔다니, 새로운 머리인가? 암튼 보고 싶군.
제주 한 잔
큭큭... 빨리 이 머리가 풀리기 전에 선보여야 하는데.. 집단장은 잘 되고 있는지도 매우 궁금하네요.. 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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