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차라리 조수석에서 잠이나 자라지

조수석에서 긴장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잠을 자는 게 꿀팁입니다

2022.02.02 | 조회 6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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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 잔

매일 자정, 제주 한 달 살이를 같이 하게 됩니다.

조수석 뷰는 그래도 예쁘다
조수석 뷰는 그래도 예쁘다

운전은 할 수 있지만 조수석은 무서워요

차라리 운전을 못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조수석에 앉을 때마다 그 생각을 한다. 우역곡절로 딴 운전면허는 장롱 속에 처박힌지 오래이다. 지갑과 함께 분실한 이후로 다시 발급받지도 않았다. 오롯이 자격증을 위한 시험이라니, K-수험생 같은 마인드가 여전히 남아있나보다.

이제까지 뒷좌석에만 앉던 내가 성인이 되어서야 겨우 조수석에 몇 번 앉을 기회가 생겼다. 가족들끼리 차를 탈 때는 아빠와 엄마가 각각 운전대와 조수석에 앉았으니까. 나와 언니는 뒷좌석에서 휴대폰을 하거나, 때로는 기대어 잠을 자기도 했다. 가끔씩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감탄을 했다. 뒷좌석에서 지나가는 차들은 느렸다. 옆차선에서 일정하게 속도를 내는 차들은 멈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뒷좌석의 풍경은 멈춰있었다. 반면에 조수석은 차의 속도를 온전히 보아야 하는 자리였다.

제주도에서는 차를 운전해야 제주를 200% 즐길 수 있다고들 말한다. 실제로 뚜벅이 생활을 하며 불편한 점을 많이 겪었다. 제주의 배차 간격은 30분이면 감사한 편이고, 몇몇 버스는 매번 카카오맵을 볼 때마다 "배차정보없음"이 떠서 발을 동동 굴려야만 했다. 그래서 초록색 버스로 환승을 해야 한다고 카카오맵에 뜨면 이를 믿지 말아야 한다. 최대한 다양한 경로를 탐색하여 그나마 자주 오는 버스들을 미리 확인해야했다. 파란색 버스가 그나마 양호하다. 버스를 무사히 환승했다고 끝난 게 아니다. 빌딩처럼 모여있지 않고, 특히나 감성 카페의 경우 외진 곳에 있기 때문에 버스에 내려서도 20분은 걸어가야 한다. 덕분에 다리가 퉁퉁 부은 채로 돌아오게 된다.

조수석에서 바라본 풍경
조수석에서 바라본 풍경

조수석 매너 = 잠자기?

요 며칠새 렌트카를 빌려 돌아다녔다. 조수석에서는 확 트인 시야로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점으로는 도로의 상황도 한 눈에 보인다는 것. 차라리 운전을 배우지 않았다면 모를까, 얼핏 배운 게 있으니 모든 차들이 끼어들 것만 같아서 홀로 덜덜 떤다. 알아서들 잘 갈텐데. 오히려 내가 유난인거지. 앞차가 깜박이를 켜도 심장이 쿵, 그냥 옆차가 지나가기만 해도 깜박이를 켤 거 같아서 쿵, 앞차는 급브레이크를 밟을 거 같아서 쿵. 심지어는 반대편에서 오는 차들조차도 중앙선 따라 잘 가고 있는데 역주행 할 거 같은 마음에 또 쿵쿵 거린다. 뚫려있는 도로를 지나가다가 조금이라도 차들이 보이면 눈을 꼭 감고 만다.

초보운전자의 시선_jpg
초보운전자의 시선_jpg

조수석 매너는 몇 번이고 조수석을 타도 도저히 모르겠다. 지루하지 않도록 말을 거는 게 좋은지, 아니면 집중할 수 있게 얌전히 내 할 일을 하는 게 좋은지. 네비를 잘 보면서 말을 해주어야 할까, 도로 상황을 같이 면밀하게 살피고 옆에 차가 온다는 걸 말해주어야 할까. 나의 운전자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을 자라고 했다. 심장이 쪼그라들어 손잡이라도 잡으면, 내가 긴장한 게 다 티가 난다고 한다. 조수석에서 긴장하면 운전자도 긴장한다. 최대한 여유로운 척을 해야 한다. 그래, 차라리 잠이나 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창밖 풍경을 구경하는 게 더 매너있는 행동일지도
차라리 창밖 풍경을 구경하는 게 더 매너있는 행동일지도

운전은 아직도 무서워요

운전이 무서운 이유는 사고가 나서보다는 사고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로수면 그나마 다행이지, 자동차, 혹은 보행자, 심지어 야생동물까지. 도로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가 상처를 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 떨면서 가게 된다. 제주도 도로를 지나가면서 서울에서는 손에 꼽아서 보았던 로드킬을 하루에 한 번 꼴로 보았다. 참새, 비둘기, 고양이까지. 야생동물이 지나가면 차를 멈추지 말고 그대로 치고 가라는 말을 들었다. 오히려 급하게 멈추려다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랬다.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운전으로 인해 일어난다.

유튜브에서 '생태통로'에 관한 영상을 보았다. 60일간 고속도로에 세워진 생태통로에 CCTV를 설치해두고, 정말 동물들이 지나가는지를 본 것이다. 너구리, 고라니, 고양이, 사슴, 멧돼지 등 여러 동물이 지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영상에서는 이 생태통로를 '반창고'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찢어진 상처 위에 반창고를 붙인 격이라고.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물론 운전할 때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이다. 특히 어린이보호구역. 불법주정차들이 많은 곳에 가면 인도가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누가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하게 된다. 차도 옆으로 킥보드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 역시 초보 운전자에게는 최종보스나 다름없다. 조금 옆으로 비켜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다가 중앙선을 넘을까봐, 혹여나 사이드미러가 사람을 칠까봐 안절부절하게 된다.

스무살 때, 미팅에 나갔다가 음주운전 한 걸 재미있는 썰마냥 얘기했던 남자애가 있었다. 술을 거나하게 마셨는데 눈 떠보니 집 앞이었다고. 알고보니 차를 타고 운전했는데, 그 기억이 없다고. 세상에는 여즉 이상한 사람이 많다.

 


 

제주도의 도로는 서울보다 차가 없고, 도로도 뚫려있어서 빠르게 달릴 수 있다. 특히 해안가도로는 드라이브하기에 좋은 곳이다. 시원하게 달리고 싶다면 제주도 도로만한 게 없다. 하지만 초보운전자들의 렌트카, 깜박이를 넣지 않는 택시, 귀가 아플 정도로 엔진 소리를 내며 무섭게 추월하는 차들 덕분에 무법지대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제주도는 금세 어두워지고, 도로에 가로등도 몇 없기 때문에 야간운전의 난이도가 매우 높다. (심지어 야간일 때 더 달리는 차들이 많다) 차가 있어도 일찍 집에 들어가는 걸 추천한다.

참고로 난 남은 일정동안 98퍼센트 뚜벅이 일정으로 다니게 될 예정이다.

버스 시간표를 잘 외워두고 다녀야지.

 

어제는 주 1회 휴무였습니다. 이제 이번주는 다시 매일을 달려야겠습니다. 하루 매일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아직 흐릿한 소재들을 간신히 붙잡고 써내려가는 일들. 메일이 아니었다면 아마 저는 어떤 글도 완성하지 못하고 끝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주 내내 매일 만나겠습니다. 내일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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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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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라니

    0
    over 2 years 전

    뚜벅이는 웁니다, 눈물이 줄줄 나는 글이네요... 저도 작가님과 같이 장롱면허 소유자인데, 최근에 막 운전연습을 시작한 남자친구의 차를 탄 적이 있어요! 어찌나 떨리고, 심장이 죄여오는지 안전밸트가 생명줄이라는 것을 깨닫고 온 몸에 잔뜩 힘을 준 채 20분 가량을 보냈던 기억이 나네요😂(비교적 최근이었답니다) 저도 조수석 매너에 대한 얄팍한 지식이 있었어요! 부스러기가 많은 과자를 들고 맛있게 다 흘려가며 먹어야한다는 것과 네비 소리도 들리지 않게 고성을 지르는 것? 하지만 초보 운전자의 조수석은 그런 농담같은 행동조차 할 수 없는 왕좌의 자리더군요.. 저는 가만히 앞만 바라본 채 생각을 멈추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뚜벅이었답니다.. 제주도 운전에 대한 팁들을 알 수 있는 유익한 글이었어요! 로드킬이 다분하고, 밤에 하는 운전은 굉장히 위험하다니... 잘 알아둬야하는 꿀팁인 것 같습니다! 매번 올라오는 글이 반갑기도 하지만, 작가님의 성실함과 분량에 놀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한 달 동안 많은 휴식과 환기가 필요할텐데 너무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매번 누군가가 정성껏 쓴 글을 읽는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제주 한 잔"을 통해 느낄 수 있어서 독자는 행복합니다🤍 오늘 밤도 기다리겠습니당

    ㄴ 답글 (1)
  • 리미

    0
    over 2 year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 UOOW

    0
    over 2 years 전

    99999% 공감가는 글이네요!!!! 댓글을 안 남기고는 못 배길 거 같아 로그인했어요. 저도 장롱면허 소유자인데, 조수석만 앉으면 어찌 그리 무서운지🥲 작가님 말마따나 차라리 잠이나 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ㅎ 3년 전에 제주도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렌트카 없이 다시는 제주도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나요...ㅋㅋㅋㅋ 그때나 지금이나 제주의 버스가 뜸한 건 여전한가 봐요..! 제주 여행 하다가 버스가 너무 안 와서 택시를 잡아 탄 적이 있어요. 기사님이 마당발이셨는지 목적지로 길에 주민 만나서 짐 들어다주고.. 어느 할머니와 동승까지 했던..ㅋㅋㅋ 황당하기 짝이없지만, 한국인의 정을 제대로 느껴봤네요. 뚜벅이 작가님의 남은 여행을 응원합니다...! 진심으로 아자아자!!!! 열심히 걷고 또 기다리길...💪💪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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