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글을 다듬는 에디터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내적 갈등이 있습니다. 바로 '이 글을 어디까지 고쳐야 할까?'입니다.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의 원고는 마치 밤송이와 같습니다. 매력적인 알맹이(생각)를 품고 있지만, 동시에 뾰족한 가시와 먼지도 조심스레 걷어내야 하죠. 반가운 마음으로 원고를 열고 나면, 곧바로 치열한 편집의 줄타기가 시작됩니다.
빨간펜과 윤문 사이, 에디터의 줄타기
편집의 첫 번째 기준은 정확성입니다. 글 전체의 흐름을 보며 문단의 순서, 문맥, 의견과 근거가 앞뒤가 맞는지 살핍니다. 턱하고 막히는 부분 없이 말이 되는 글로 뼈대를 잡는 과정입니다.
그다음은 매력을 더할 차례입니다. 저자 고유의 문체는 존중하되,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어색하고 장황한 문장을 담백하게 윤문합니다.
결국 편집이란, '반드시 더 나은 글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 의식과 '고치다가 원작자의 알맹이까지 다치게 하진 말자'는 염려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입니다. 수도 없이 좋은 문장을 찾고 스스로를 의심하며 이 감각을 키워나갑니다.
변호사, CEO, 작가, 교수, 셰프 그리고 길거리 행인까지. 에디터로 일하며 숱한 사람들의 글을 다듬다 보니, 그들이 각자의 삶에서 쥐고 있는 소중한 가치들이 보였습니다. 가시 돋친 밤송이를 까면서도 그 안의 알맹이를 다치지 않게 꺼내는 저만의 노하우를 배운 것이죠.
최악의 갈등을 피하는 4가지 방어막
따라서 타인과 부딪히며 글을 고쳐온 에디터의 감은 대개 정확합니다. 에디터가 고심 끝에 수정한 문장이 독자에게 훨씬 친근하고 사려 깊을 가능성이 높죠. 오만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명 중 1명꼴로 "네가 뭔데 내 글을 고쳐?"라며 날을 세우는 이들을 만납니다. 대개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최근 유명세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첫 미팅에서 '이 사람과의 협업은 험난하겠다'는 쎄한 느낌이 발동한다면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방어막이 필요합니다.
첫째, 알아서 잘 써주세요(x) 명확한 기획서 전달하기(o)
기고를 요청할 때 구두로 대충 때우는 것은 쌩뚱맞은 원고를 부르는 지름길입니다. 프리랜서로 밀리의서재나 커리어리 같은 콘텐츠 회사와 협업할 때, '역시 콘텐츠 회사다'라고 느꼈던 부분은 완벽에 가까운 콘텐츠 제작 가이드 문서였습니다. 콘텐츠 기획안 뿐만 아니라 톤앤 매너와 주의할 부분까지도 예시와 함께 친절히 안내되어 있었죠.
또한 기획안을 전달한 후에 상대방이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질문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이해가 안가거나 궁금한 점이 있는지 먼저 물어봐야 합니다. 초반에 시간을 들여서라도 핏을 맞추는 것이 협업의 1원칙입니다.
둘째, 편집 가이드라인 사전 고지하기
기획안을 전달할 때 편집 기준도 함께 안내하세요. 대부분의 경우, 담당 에디터가 알아서 잘 편집해주시겠지라는 믿음이 커서 공유할 필요가 없지만 까탈스러운 파트너사를 만날 경우엔 사전 고지를 해주는 게 좋습니다.
'원문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려 하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단 순서가 변경되거나 추가 자료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라고 미리 전달해주세요.
최악의 경우, 글을 다시 써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작업까지 가지 않기 위해 사전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찰떡 같은 샘플 원고 전달
가이드 문서보다 더 직관적인 것은 샘플 원고입니다. 비슷한 톤앤매너의 기획 시리즈물이나 레퍼런스를 공유하면 필자가 글의 방향을 잡기 훨씬 수월해집니다.
넷째, 단단한 파트너십 구축

효율성만 따지면 온라인 미팅이 최고지만 중요한 프로젝트일수록 1차 대면 미팅을 권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밥 한 끼, 농담 한마디를 나누며 쌓은 작은 호감은 훗날 생길 갈등을 부드럽게 넘기는 윤활유가 됩니다.
저는 전화나 문자로 사근사근 자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감 직전에 원고 내놓으라고 하는 연락 말고 그 전에 미리 한 두번의 연락을 주고받는 겁니다. 친밀감을 위해서요. 원고가 발행된 직후나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감사 인사를 빌미로 연락드립니다. 친밀해진 사이는 소모적인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압도적으로 줄여줍니다.
그간 밥을 먹고 가라거나 작은 선물을 쥐어주시는 인터뷰이를 많이 만났습니다. 반대로 제가 소소한 선물을 준비해서 드린 적도 많지요. 아마 이들은 파트너십이 서로 함께 일을 하는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모든 기회는 사람을 통해 오고 간다는 것을요.
누군가와 협업할 때 '내 삶에 귀한 손님이 왔구나'라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분명 더 좋은 기회와 인연이 따라올 거라고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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