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잘 지내셨나요?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은 연말이라는 상황적 특수성에 기대어, 평소와 조금 다른 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다음주부터는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
10번의 뉴스레터 동안 개인이 잘 성장하는 법에 대해서 주로 다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람이 혼자서 성장하는 것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열어주는 가능성만큼이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정체성이라는 개념만큼 서술하기 모호한 개념이 있을까요? MBTI가 가지고 있는 한계처럼, 자신이 인지하고 내뱉는 정체성과 다른 이들이 받아들이는 당신의 정체성은 전혀 결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게 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지하는 순간 그 본질이 훼손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발생하는 의미의 훼손을 피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타인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개인이 쌓아왔던 다양한 경험과 생각들을 토대로 다른 사람의 행동을 비교해 보는 과정이 딸려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을 마주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부딪히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인생을 더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다양한 경험을 하라는 이유도 다른 이와 부딪히며 각자의 세상을 들여다봄으로써 사회성을 기르고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위의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엄청난 문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애초에 착각한 사실을 바탕으로 사회성을 기르는 것이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사건의 지평선과 같이 개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 하나도 관측할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설명처럼 우리는 모두 사회적인 관계를 꿈꿔오며 살아갑니다. 사회적 관계를 꿈꾸는 이유는 개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원하기 때문일 터인데, 애초에 이해부터 불가능하다니요. 맥이 탁 풀려버리고 맙니다.
모든 사회적 관계, 특히 가족이나 연인 그리고 친구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 대개 "상대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해서 발생합니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들을 저지르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모습은 생각보다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할 수 없다니. 그렇다면 염세주의적 삶의 태도를 받아들여 어떠한 것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함께 걸어나가는 사람들은 대체 어떠한 연유로 같이 살아나갈 수 있을까요?
해답은 바로 위 질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입니다. 나의 상처와 아픔에도, 그들을 너무 애정하기에 한 발짝 더 다가가고, 한 번 더 대화하는 노력. 그들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정 하기에 같이 걸어가 주는 노력. 이러한 노력이 쌓여 - 서로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손 잡고 같은 방향으로 걸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애정하는 영화 중 하나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러한 생각을 녹여냈습니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함께 하고 싶다". 개개인 존재 사이를 가로막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것만 같았던 존재의 지평선을 넘을 수 있는 것은 논리적인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는 점. 이러한 역설이 오히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위로가 되는듯 합니다.
벌써 올해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네요. 날씨가 추워 어디 나가기도 겁이 나곤 합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차가운 겨울 뒤에는 따듯한 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차갑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같이 걸어갈 사람들과 행복한 순간들로 가득한 순간들이 찾아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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