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의 표정, 밤의 기억

#12 언젠가 우린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가게 될거야

구독자님께 전하는 여행의 의미

2023.01.24 | 조회 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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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full letter

세상 어딘가에 있을 당신에게, 빛나는 기억을 그림과 글에 담아 전합니다.

안녕하세요, 가울입니다. 

편지가 많이 늦어지고 말았네요. 약속된 날짜를 훌쩍 지나 어느덧 설이에요.
약속한 12개의 편지 중,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는 글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유독 한 글자 적기도 망설여졌어요. 그래도 늦게나마 용기를 내어 마지막 편지를 보내봅니다.

구독자님은 어떤 새해를 맞이하고 계시는지요? 
365개의 하루를 하나로 묶어 한 해로 매듭짓고 새로이 시작하는 이 시기엔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곤 해요. 어떤 일을 했는지, 그 일을 해내던 나는 무엇을 느꼈고, 모든 과정 중에 충실했는지, 그 경험을 통해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리고 잊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던 때는 언제인지... 그리고 그 모든 매일이 모여 어떤 일 년을 완성했는지를요. 

그렇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그 어느 때보다 여행의 의미를 깊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시간이었어요. 그 모든 길고 짧았던 여행들. 그리고 그 시간보다 늘 길었던 일상의 순간들. 삶 속의 수많은 순간 중에 왜 여행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왔는지, 그 기록을 통해 어떤 메세지를 전하고 싶은지 지난 11개의 편지를 보내는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시간이었습니다. 11개의 편지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수의 그림을 그리며 여행의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해본 마지막 편지를 보내드릴게요. 

내 고향 서울엔, (종이에 수채/2017)
내 고향 서울엔, (종이에 수채/2017)

내가 그리던 세상의 크기

학교에서 학원, 그리고 다시 학원에서 집으로를 반복하던 어린 시절, 문득 버스에 앉아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얼마나 클까?’ 어둑해진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해보니, 내가 또렷이 알고 있는 세계의 크기가 무척 작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우리 집의 풍경, 매일 걸어가는 등굣길, 학교와 교실, 친구의 집, 교회의 예배당, 그리고 학원의 네모반듯한 직선의 공간. 또렷하게 기억하는 장소는 고작 이뿐이었습니다. 그나마의 장소들도 제대로 이어져 있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리고 다시 집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던 길은 제대로 기억하기 어려웠습니다. 버스를 타고 정거장에서 정거장으로 옮겨가지만, 그 사이의 공간은 공백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줄노트를 펼쳐 내가 알고있는 세상을 지도로 그려보았어요.

직접 걸으며 구석구석 풍경을 볼 수 있었던 곳은 매년 같은 자리에 봉숭아꽃이 피어나는 언덕이며 뽑기 기계가 나란히 서 있는 문방구, 달고나를 파는 할머니가 있던 골목길, 500원짜리 동전으로 작은 사탕이나 포켓몬 빵을 사 먹던 구멍가게,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놀이터 그리고 나만 알고 있는 담벼락의 신기한 무늬까지 모두 적어낼 수 있었지만, 버스를 타고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았던 곳들은 정확한 무늬를 그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기억을 더듬으며 좌회전, 우회전하던 버스의 경로를 그려보아도, 의미 없는 엉터리 외곽선만 있을 뿐이었어요. 

그렇게 완성한 지도와 책장에 있던 세계지도를 펼쳐 나란히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정말 너무나 작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연필을 아주 날카롭게 갈아도, 세계지도에 표시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어요. 

그 작고 작은 나의 세계를 바라보며 언젠가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게 된다면, 이 작은 지도를 더 크게 넓히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앞으로 머무를 곳을 더 자세히, 더 선명히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공간에 흐르는 시간을 손아귀에서 놓쳐 흘려보내는 것이 아닌, 마주 보며 향기를 맡고 공기를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아름다운 곳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나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언젠가 우린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가게 될 거야. 

대학생이 된 뒤로 기회가 닿을 때마다 국내외로 여행을 다녔어요. 처음으로 혼자 떠났던 일본 여행, 친구와 함께 떠난 내일로 기차여행, 언니, 동생과 함께했던 유럽 여행, 그리고 서른 살이 오기 전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싶어 떠났던 세계여행까지. 첫 여행 때부터 여행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노트를 만들어 어디나 들고 다니며 열심히 기록했고, 작은 영수증 따위를 모아두곤 했습니다. 유난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심이었지만, 그 모든 기록이 어떤 가치인지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였어요. 이후에 그 모든 기록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영감을 수집하던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론 더 열심히 기록하게 되었어요. 

2018년 스페인에서 적은 여행 노트 일부 '안달루시아의 음악' 작업을 위한 스케치를 그렸다.
2018년 스페인에서 적은 여행 노트 일부 '안달루시아의 음악' 작업을 위한 스케치를 그렸다.
이후에 노트와 스케치를 보며 작업한 '안달루시아의 음악' (종이에 수채, 2019)
이후에 노트와 스케치를 보며 작업한 '안달루시아의 음악' (종이에 수채, 2019)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땐, 사실 어린 시절의 소원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자주, 또 길게 여행을 다니는 모습에 '왜 여행을 그토록 좋아하나요?'라는 질문을 듣곤 당연하게 느껴졌던 여행의 의미를 고민하게 되었어요. 여행을 그림으로 기록하기 시작하고, 또 라잇풀레터를 보내게 되며 그 고민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어린 시절 그린 작은 나의 지도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새삼 참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비슷한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과 함께 ‘이제 나의 세상은 얼마나 넓어졌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겨 노트를 펼쳐 지금까지 여행한 곳을 하나씩 적어보았습니다. 노트의 한 면에 여러 나라와 도시의 이름, 그리고 잠시나마 머물렀던 아름다웠던 곳들의 이름이 한줄 한줄 쌓였습니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을 이름들을 보는 동안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펼쳐졌어요. 그림으로 기록해두었던 곳들은 정말 어제 다녀온 듯 유독 생생했습니다. 

그렇게 여행의 순간을 기록할 수 있었던 건 메모와 일기, 사진 덕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마주칠 때마다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마치 산호가 바닷물을 들이마시며 그 모든 작은 것들을 몸속 깊숙한 곳에 집어넣듯, 가만히 그곳에 머무르며 마음 깊숙한 곳에 기억하려 애썼기 때문인 듯했습니다. 눈을 감으면 그 곳에 돌아간듯, 이토록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 걸 보면 말이에요. 

그라시아 지구의 축제, 바르셀로나 (종이에 수채, 2016)
그라시아 지구의 축제, 바르셀로나 (종이에 수채, 2016)


그렇게 여행하며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마주칠 때면, 비로소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곤 해요. 순간을 깊이 음미할 때면 세상의 곳곳에서 다양한 삶을 그려내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피워낸 공간들과 마침내 한 울타리에서 호흡하는 듯 연결된 감각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늘 뜻밖의 순간에 찾아오곤 했어요. 그 경험이 너무나 황홀해서, 여행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 여행이란 바깥의 세상을 통해 마음의 세계를 넓혀나가며  감각을 깨워내는 경험이며,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영감을 수집하는 긴 과정입니다. 

앞으로도 아름다운 세상을 계속해서 둘러보며 빛나는 순간들을 더욱 모으고 싶어요. 여행을 그림으로 기록할 때면, 그 마음은 계속 커져갑니다. 그저 이 세상이 선물해준 순간들을 그림 속에 담는 것만으로 삶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고, 그 기록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줄 수 있으니까요. 여행을 하고 순간을 모아와 전하는 건 제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가치있는 일입니다. 

작은 세상의 크기에 아쉬워하던 어린 시절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곳들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의 시간 속에서도 뜻밖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간직할 수 있겠지요. 언젠가 우린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가게 될거예요. 오늘은 비록 당장 떠날 수 없더라도, 지금의 아쉬움만큼 즐거운 언젠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이생을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열심히 세상을 넓혀 그 찬란함을 구독자님께 전할게요. 

12번째 편지를 보내며, 
망원동의 라잇풀스튜디오에서 
가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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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지난 편지의 내용을 다듬고, 출간을 준비하기 위해 당분간 라잇풀레터를 쉬어갑니다. 출간을 준비하는 동안, 새로이 전할 소식이 생기면 안부 인사와 함께 편지를 보낼게요. 

그동안 구독자님에게 12개의 편지를 보내드릴 수 있어 무척 따뜻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구독자님의 삶의 켠에, 저의 그림과 이야기들이 반짝이는 작은 위로가 있기를 바랄게요. 언젠가 다시 새로운 편지 보내드릴 있기를 바라며, 가울 드림. 

 

Lucky black rabbit (종이에 수채, 2023)
Lucky black rabbit (종이에 수채, 2023)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구독자님, 이번 레터를 보시는 동안 어떠셨나요?

만약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다면 답장을 보내주세요.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여행의 특별한 순간, 레터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 등 어떤 내용이라도 괜찮아요.
보내주신 마음 모두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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