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면 앞에 앉아 있다. 파일 이름은 "가을 수련 자료". 커서가 그 위에서 삼십 분째 움직이지 않는다.
막혀 있다는 것
나는 막혀 있었다. 파일을 열지 못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지만, 그 안에 갇힌 마음은 사소하지 않았다. 잘하고 싶은 마음, 흠 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 아무도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 마음들 앞에서 나는 매번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쇼츠 몇 개, 다른 화면 하나. 시간은 지나가고, 자유는 오지 않았다.
이 답답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다 — 잘 해야 한다는 마음에 매이지 않고 싶었다. 평안하고 싶었다 — 이 일을 끝내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걸어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 만든 좁은 방 안에서 문고리만 붙잡고 있었다.
시차 안에서
한국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았다. 몸은 아직 그곳 시간에 있다. 낮에는 몽롱하고, 밤에는 눈이 말똥말똥하다. 집중이 잘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문제는 이 사실이 참인 동시에, 아주 편리하다는 것이다. "시차 때문이야"라고 말하면, 오늘 하지 않은 모든 일에 대해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실제로 시차는 진짜다. 몸은 정말로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정확히 어디까지가 몸이 진짜 못 하는 것이고, 어디서부터 내가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인지, 나는 잘 구별하지 못하겠다.
파일을 열지 못한 오늘도 그렇다. 정말 피곤해서 못 연 것일까, 아니면 피곤하다는 사실을 방패로 쓴 것일까.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답을 내리지 않기로 한다. 다만 묻는다. 몸을 쉬게 해야 할 때는 언제이고, 몸의 피곤함 뒤에 숨어 필요한 작은 한 걸음을 미루고 있는 때는 언제인가. 그 질문을 놓지 않고 데리고 사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정직함인지도 모른다.
제단 위의 나
바울은 우리 자신을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라고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 말씀을, 잘 정돈된 경건한 나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 이 모습 — 파일을 못 여는 나, 시차로 몽롱한 나, 그 몽롱함 뒤에 슬쩍 숨는 나 — 이것이 드려야 할 진짜 제물이 아닐까.
그것을 드린다는 것은 피곤함을 무시하거나 나를 몰아붙인다는 뜻이 아니었다. 쉬어야 할 몸과 숨어 있는 마음을 함께, 진실하게 내어놓는 것이었다.
"하나님, 지금 제 안에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숨기지 않고 가져옵니다. 지금 사랑에 더 가까운 쪽은 무엇입니까?" 거창한 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응답은 첫 페이지만 여는 것이었다.
알아차림 다음의 한 걸음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구나"라고 계속 바라보기만 하면서 정작 파일은 열지 않는다면, 알아차림은 또 하나의 도피처가 될 뿐이었다. 깊은 성찰처럼 보이지만, 실은 미루는 일을 좀 더 세련되게 하는 방법이었다.
알아차림에는 다음이 있어야 했다. 몸의 피곤함을 보았다면, 정죄 없이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무엇이 사랑에 가까운지 분별하고, 아주 작게라도 움직여야 했다. 관상과 행동은 두 개의 다른 삶이 아니라, 한 호흡의 들숨과 날숨 같은 것이었다.
참자기와 거짓자기, 한 발짝 차이
참자기는 애써서 만들어내는 무언가가 아니다. 익숙한 방어가 조용히 물러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원래 있었던 것처럼 드러난다.
파일을 열던 순간이 그랬다. "잘 써야 한다"는 압박 없이 그냥 첫 줄을 썼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썼다.
며칠 전 탁구 경기를 하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내가 한 포인트를 따낸 뒤, 상대는 내가 서브할 때 공을 충분히 높이 올리지 않았다며 그 포인트를 자신의 점수로 가져갔다. 조금 이상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얼마 뒤 내가 다시 포인트를 따냈을 때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상대는 같은 이유로 그 점수를 가져갔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가 정한 대로 따랐다.
돌아오는 길에 그 장면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이것은 몇 점을 둘러싼 작은 일이었지만, 돌아보니 나는 일상에서도 자주 이런 식으로 반응했다. 마음으로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관계가 불편해지거나 문제를 만드는 사람처럼 보일까 두려워, 아무 말 없이 상대가 정한 대로 따르곤 했다.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양보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두려움이 나 대신 선택한 것이었다.
파일 앞에서처럼, 두려운 채로도 사랑과 진실에 가까운 쪽을 선택할 때 참자기는 조금 더 자유롭게 드러났다. 반대로 탁구장에서처럼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에 진실을 피할 때, 익숙한 방어가 다시 나를 대신했다. 그 차이는 아주 작아서, 지나고 나서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때가 많다.
작은 종소리
매일 이십에서 삼십 분 침묵 가운데 앉는다. 그러나 그 시간이 나머지 하루와 나뉘어 있다면, 나는 두 개의 삶을 사는 셈이다. 이메일을 보내기 전 숨을 고르고, 억울함을 삼킬지 말할지 잠깐 멈추는 순간들도 작은 종소리가 된다. 앉아서 배운 돌아옴이 일과 관계 속으로 이어질 때, 하루 전체가 조금씩 기도가 된다.
한동안 나는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 다짐 자체가 또 다른 감옥이었다.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은 감시가 아니라 자유였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었다.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흐트러졌을 때 두려움 없이 돌아오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참자기는 완벽한 감시 끝에 발견되는 보물이 아니다. 더 이상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될 때, 이미 거기 있는 나다.
이것이 세상과 무슨 상관인가
파일 하나 여는 것, 숨 한 번 고르는 것이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 순진한 것은 아닌가. 그 질문을 그대로 두기로 한다.
내적 평안을 구하면서 곁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도피일 것이다. 그러나 내 안의 인정욕구를 알아차리는 훈련은, 누군가 앞에서 권력을 쥐고 싶어지는 순간을 보게 한다. 오늘 두려움 때문에 침묵한 일을 돌아보는 연습은, 언젠가 불의 앞에서 말할 힘을 기른다.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관계를 만들어가고,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들이 모여 공동체의 문화가 된다.
다시, 파일 앞에서
내가 알아차리기 전에도, 하나님은 이미 내 안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나의 일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는 것이다.
지금 다시 파일 아이콘 위에 커서를 올려놓는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는다. 클릭한다. 첫 줄을 쓴다.
작지만, 이것이 찾던 자유다.
지금 나는 어떤 두려움 뒤에 숨어 있는가? 그 자리에서 오늘 열 수 있는 가장 작은 문은 무엇인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