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한국 여정에서 나는 사람들이 오래된 자동반응과 자신 사이에 작은 틈을 발견하는 순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불어오시는 하나님의 바람 앞에서, 안내자인 나 역시 다시 듣고 돌아오는 법을 배웠습니다.
인천공항 입국장을 나서자 익숙한 습기와 낯선 긴장이 함께 밀려왔다. 처음 한국 교회에서 센터링 침묵기도(Centering Prayer)를 소개할 때에는 이 낯선 언어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두려웠다. 이제 나는 조금 다른 이유로 긴장한다. 이 기도가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자신이 의지해 온 익숙한 삶의 방식과 작별하기 시작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수련의 얼개는 단순하다. 먼저 센터링 침묵기도를 소개하는 자리가 있다. 지금 여기에 함께하시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존재 전체를 활짝 열고,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조금 더 걸어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한 심화 과정이 열린다. 이름하여 "참자기로 돌아오는 길." 이 여정은 센터링 침묵기도에서 시작하여, 에니어그램을 통해 자신을 지켜온 오래된 생존 방식들을 바라보고, 그 너머의 참자기로 돌아가도록 돕는다.
이미 충분하다는 말
첫 소개 자리에서 자주 듣는 반응이 있다. "이미 저희 안에 있는 거잖아요. 이것 없이도 충분해요."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나 나는 그 말 안에서 낯선 것에 대한 경계와 함께, 익숙한 신앙의 자리를 쉽게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도 느낀다. 그것은 그들만의 마음이 아니다. 나 역시 하나님께서 나를 익숙한 자리 밖으로 부르실 때, "이미 충분하다"는 말 뒤에 숨고 싶을 때가 있다.
같은 자리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만날 때도 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한 젊은 분이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유튜브로 어느 불교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위안을 얻어 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수련을 통해서, 자기가 나고 자란 기독교 신앙 안에도 이만큼 깊고 아름다운 영성의 언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소망이 보여요."
그의 말은 내게 질문으로 남았다. 우리는 왜 우리 안에 있던 깊은 우물을 다음 세대에게 보여주지 못했을까?
숨을 쉴 작은 틈
소감문들을 읽으며 나는 한 단어를 계속 만난다. "틈."
여러 번 다른 침묵 수련에 참여했던 한 자매가 있다. 그는 처음 몇 번의 수련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평안을 맛보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기도 시간이 의무처럼 느껴져 힘겹게 자리에 앉아야 했다고 고백했다. 때로는 그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둘째 날 아침, 그는 내려놓음과 흘려보냄,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옴을 새롭게 경험했다. "센터링 침묵기도는 정말 하나님께 돌아오는 집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적었다. 그리고 이 여정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이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틈을 주고 숨을 쉬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니어그램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래전에 형성된 반응 패턴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면서, 그는 그 반응에 끌려가기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연습을 시작했다. 매번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그래도 알아차리는 순간들이 조금씩 늘어난다.
또 다른 형제는, 자신이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기도의 풍성함을 누리는 깊이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다. 그저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 정도로 이해했던 기도가, 하나님의 일하심과 현존하심에 대한 동의와 의도로 다시 정의되면서 훨씬 구체적이고 풍성해졌다고 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거짓자기와 씨름해 왔다. 스스로 그것을 없애려고, 극복하려고 치열하게 싸워온 시간들. 그런데 이번에 그는 전혀 다른 것을 배웠다.
거짓자기는 악한 내가 아니었다. 한때 나를 살리기 위해 애썼던, 상처 입은 나였다.
거짓자기를 미워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은 상처와 두려움을 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삶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때 우리는 그 방어 너머에 이미 주어진 참자기로 조금씩 돌아간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전에 자꾸 거짓자기를 없애려고 할수록 나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은 딜레마를 느꼈다." 그는 그 며칠 동안, 그것을 몸으로 배웠다.
불안에게 고맙다고 말하다
또 다른 형제는 회사 걱정이 계속 마음을 맴돌아 좀처럼 흘려보내지지 않는다고 했다. 셋째 날 저녁,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을 밀어내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받아들이는 환대기도 시간에 그는 마침내 자기 안에 있던 불안을 발견했다. 그것이 자신을 오랫동안 밀어붙여 온 엔진이었다는 것도. 그는 문득 그 불안을 환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동안 많이 애썼다. 그리고, 고맙다. 네 덕분에 내가 이제까지 나의 삶을 잘 살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조금 천천히 가자." 그가 자기 자신에게, 자기 안의 불안에게 건넨 이 말은,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가장 정직한 화해의 언어 중 하나였다.
불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불안이 더 이상 그를 뒤에서 몰아붙이는 주인이 아니라, 따뜻하게 돌아볼 수 있는 오래된 동반자가 되기 시작했다.
수련이 끝나고 정말로 무언가가 달라졌는지는, 사실 며칠의 시간 안에서는 알 수 없다. 진짜 시험은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 온다. 한 형제는 수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예상했던 그 오래된 패턴이 똑같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자신의 옳음이 도전받는다고 느낄 때마다 그것을 증명하려 드는 자동반응. 그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멈추고, 돌아갔다. "사실관계를 밝히지 않아도 돼. 내가 옳다고 인정받지 않아도 돼. 그것으로 충분해." 그는 그날 저녁, 이렇게도 적었다. "감사한 것은 센터링 침묵기도 기간 동안 경험하고 다짐했던 것들이 제대로 작동해서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는 것이다."
변화란 오래된 반응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이 올라오는 순간, 그 반응과 나 사이에 작은 틈이 생기는 일이었다.
상실 곁에 머무는 침묵
모든 이야기가 이렇게 정돈된 방식으로 오지는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울면서 온다.
한 자매는 어머니를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은 채로 수련에 왔다. 둘째 날 아침, 침묵 속에서 그는 문을 열고 나가 짐을 싸고 싶을 만큼 힘든 저항을 느꼈다. 감정도 생각도 몸도 엉망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부터 그의 기도의 자리는 "비에 젖은 나무토막에서 햇볕에 바짝 마른 나무"가 된 것 같았다고 썼다.
마지막 날 아침, 침묵 속에 식사를 하는데 밖에서 바람이 불고 나무들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그는 한참을 그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바람이 불어야 소리가 나는구나. 나의 말도 숨에 의해 나오는구나. 내 안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그분의 소리를 내게 되는구나. 나의 거짓자기들이 꽉 차서 바람이 불 여백이 없었구나."
수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어린 딸을 안아주며 말했다. "축복해." 아이는 고맙다고 대답했다.
개인의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한 사람 안에 생긴 틈은, 그 사람이 돌아갈 공동체 안에서도 보호받을 수 있을까?
이 모든 아름다운 이야기들 곁에는, 조용한 저항도 함께 있다. 내가 만난 몇몇 자리에서는, 목회자와 장로,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이 저항이 더 깊게 느껴지기도 했다. 신학적으로 안전하지 않다는 우려, 가톨릭과 동양의 영성 전통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경계, 개신교 복음주의의 언어로 다시 옮겨 담아야 한다는 부담. 반면 평신도들은 종종 이 낯선 언어를 더 빠르게, 더 깊이 받아들이는 것을 본다. 신학적 정당성을 따지기 전에, 삶의 자리에서 올라오는 목마름이 먼저 그들을 이 기도 앞으로 데려오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경계가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그 경계 안에 맡겨진 사람들을 지키고 싶은 책임감이 있다는 것도 배워갔다. 동시에 안전을 지키려는 마음이 성령께서 여시는 낯선 문까지 닫아버릴 수 있다는 사실도 보았다.
관상은 개인의 기도법에 머물 수 없다. 함께 듣는 법이 바뀌면, 함께 결정하는 법도 달라져야 한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공동체 전체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말 사이에 여백을 두고 그 사이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뜻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기도의 틈은 결국 관계의 틈이 되고, 관계의 틈은 새로운 교회의 문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교회 지도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빨리, 더 많이, 끊임없이 움직여야 가치를 증명한다고 가르쳐 온 이 사회의 습관이, 교회의 리듬 속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나 역시 걷고 있는 길
사람들에게 자신의 반응을 알아차리고 환대하라고 안내하는 동안, 나 역시 내 안의 조급함을 마주해야 했다. 전하려는 내용을 분명히 하고 싶은 열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사용하거나, 내 생각을 입증하려는 듯 말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편에 서려다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쉽게 판단한 적도 있었다. 뒤늦게 그것을 깨닫자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 부끄러움도 밀어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환대해 보았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옳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질문에 답하기보다 먼저 그 질문 뒤의 마음을 들으려 했다.
깊고 날카로운 질문들 앞에서도 내 안의 긴장은 자주 고개를 들었다. "이것이 정말 우리 개신교 신학과 맞습니까?", "가톨릭 영성과 동양 종교의 수행을 서로 비슷한 것으로 섞어 놓은 것은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들으면, 설명하고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올라왔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환대하면서, 대답하기 전에 그 질문 안에 담긴 두려움과 갈망을 더 오래 들으려 했다. 질문은 나의 가르침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문일 수 있었다.
그렇게 함께 머무는 동안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씩 풀리고, 마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들을 보았다. 그 얼굴들 속에서 이미 일하고 계셨던 하나님을 알아보며 나는 안도했고 감사했다. 동시에 그 변화가 나의 설명이나 설득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도 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실 틈을 함께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변화는 나의 방식이 옳았다는 증거가 아니라, 나의 미숙함보다 더 깊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였다. 안내자 역시 이미 도착한 사람이 아니라, 참여자들과 함께 참자기로 돌아가는 길 위에 있는 사람이다.
쉼을 잃어버린 교회
한국 교회를 다니며 내가 가장 자주 마주하는 것은, 사명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다. 헌신이 부족한 사람들도 아니다. 쉼이 없어서 지쳐버린 사람들이다. 이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계속 무언가가 돌아가야 하고, 멈추면 뒤처지는 것 같은 구조와 문화 자체가 쉼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쉼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멈춤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흘러나오는 쉼, 삶과 사역 속에 배어 있는 쉼이다. 그런 쉼이 없이는,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결국 지치고 만다. 그런 쉼이 있을 때에만, 사람은 소진되지 않고 생명력 있게 섬길 수 있다.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가고, 빨리 답하려던 사람이 오래 침묵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처음 도착할 때의 얼굴과 떠날 때의 얼굴은 다르다. 무엇을 더 배워서가 아니다. 무언가를 덜어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신 일
돌아보면, 나는 이 길에서 하나님이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시는 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물꼬를 트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 물길을 따라 흐르도록, 자기 자신을 내어드릴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나의 역할은 그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증언하고, 그분이 일하실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사명인지도 모른다.
이 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조금씩 늘고 있고, 실제 삶으로 그 변화를 증명해 보이는 평신도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새로운 소망을 얻는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내가 먼저 그렇게 살아가며 흘려보내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지치지 않고 감사함으로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길임을 나는 거듭 다시 배운다.
"가만히 있으라."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다. 내가 붙들고 통제하려던 것을 잠시 놓고, 이미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라는 초대다. 틈은 작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작은 틈으로 불어오신다.
돌아보는 질문
- 요즘 내 안에서 반복되는 자동반응은 무엇이며, "그동안 많이 애썼다"고 환대한다면 그 반응과 나 사이에 어떤 틈이 생길까요?
- 지금 하나님께서 이미 내 삶에 불어넣고 계시지만, 내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바람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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