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용한다는 것

흐름을 따라가는 법에 대하여

2026.04.05 | 조회 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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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몸은 이미 알고 있다." Generated by Gemini

책상 위에 목록이 있다.

녹음 파일 하나. 평가서. 기획안 초안. 또 다른 수련에 대한 메모들. 이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 내가 이것들을 기다리게 하고 있다.

앉기 전부터 몸이 먼저 안다. 어딘가 조여드는 느낌.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이미 뒤처진 사람처럼 앉아 있다.

 

나는 오랫동안 이것을 열심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나에게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다. 조여드는 느낌을 느끼면서도 계속할 수 있었다. 지치면서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몸의 피로를 사명감으로 번역할 수 있었다.

어느 오후, 두 모임 사이에 빈 시간이 한 시간 생겼다.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몸이 쉬는 대신, 목록을 열었다. GSD 평가서. 다음 수련 준비. 슈퍼비전 실라버스 초안. 일이라면 언제나 찾을 수 있었다. 비어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사람처럼.

그 긴장이 가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 가지를 잘 마친 날에도. 반응이 좋았던 날에도. 다음 것을 향해, 몸이 이미 달리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 이름 붙여진 것이 있었다.

 

두려움이라는 엔진

지난 겨울, 수련을 열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작은 자리였다. 같은 내용으로 다시 초대하려다가, 연락을 못 하고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그 질문이 몸 어딘가에서 조용히 작동하고 있었다.

이것이 열심의 다른 이름이었다. 정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충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아무도 오지 않으면 내가 무너진다는. 그 두려움이 엔진이 되어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엔진은 나를 많은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도착하면, 또 다른 곳이 필요했다. 끝이 없었다.

 

다른 자리에서

메리 올리버(Mary Oliver)는 이렇게 썼다. "잘해야 할 필요가 없다. 회개하며 무릎으로 걷지 않아도 된다. 다만 몸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게 두면 된다." 잘해야 한다 — 이 한 단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그 자리에 묶어 두었는지. 충분해야 한다는. 증명해야 한다는. 기대했던 것보다 작은 자리가 펼쳐졌을 때, 잘 못한 것 같은 그 느낌.

나는 그 말을 오랫동안 그냥 내버려두는 것으로 읽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 통제하려는 손을 거두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은 그것을 동의(consent)라고 불렀다.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에 함께 참여하는 것. 끊임없이 통제하려는 손을 거두는 것 — 그 방향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한 문장이 살아있으면 충분하다

요즘 나는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한 가지만 먼저 묻는다.

지금 나는 어디서 이것을 하고 있는가.

두려움에서인가, 아닌가.

그 질문 하나가 몸을 다르게 만든다. 조금 더 부드럽다. 호흡이 조금 더 아래에 있다. 어깨가 내려간다.

녹음 파일을 열기 전에, 이제 한 가지만 더 묻는다. 이 대화에서 살아있는 한 문장이 있는가. 전체를 완벽하게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문장을 찾는 것. 수련을 기획할 때도 마찬가지다. 완성된 구조를 먼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간이 누구를 어떤 자리로 초대하는가 — 그 한 문장만 먼저 쓴다.

 

흘러나옴과 밀어붙임

두려움에서 세 시간을 일하고 나면, 일이 끝나도 몸이 더 조여 있다. 뭔가를 했는데, 이상하게 더 비어 있다. 두려움이 아닌 자리에서 세 시간을 일하면, 지쳐도 몸 어딘가가 부드럽게 풀려 있다. 여전히 열려 있다.

몸이 먼저 안다. 두려움에서 하고 있는지, 아닌지.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여전히 목록 앞에서 조여드는 날이 있다. 허용하는 것처럼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다시 밀어붙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날도 있다. 기대했던 것보다 작은 자리가 펼쳐졌을 때의 그 느낌이,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죽음과 부활 사이, 아직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은 그 토요일처럼 — 허용은 그 고요한 자리를 닮아 있다.


지금 나의 목록 앞에서, 나는 어디서 시작하고 있는가?

기대했던 것보다 작은 자리가 펼쳐진 날, 내 안에서 무엇이 흔들렸는가? 그리고 그 흔들림은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가?

한 문장이 살아있으면 충분하다고 느껴진 순간이 있다면 — 그때 내 안에서 무엇이 달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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