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메일 하나가 왔다
같은 지역의 관상기도 공동체가 수련회를 연다는 안내였다. 읽으면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내가 배운 전통 안에서 함께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연결되고 싶었다. 그런데 동시에 주저하는 마음도 올라왔다.
그 두 마음을 따라가다 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거부당할까봐가 아니었다. 드러날까봐였다. 내가 이제 수련을 안내하는 사람으로 그 자리에 선다면, 나를 가르쳤던 바로 그 사람들은 나를 평가할 것이었다. 그것이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따라가다 보니, 더 오래된 무언가를 만났다.
숫자가 거울이 되던 시절
수련을 몇 명이나 이끌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그 숫자들이 나를 정의하는 거울이 되어 있었다. 잘 되면 안도했고, 안 되면 무언가가 무너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수련이 잘 될수록 다음 준비가 더 무거워졌다. 책이 거의 완성될수록 마지막 단계가 더 느려졌다. 이루면 이룰수록, 몸은 그 앞에서 더 자주 멈추었다.
이것이 게으름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이것은 보호였다. 끝내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아도 된다. 드러나지 않으면 평가받지 않아도 된다. 완성하지 않음으로써 안전을 유지하는 것 — 그것이 수년간 내 안에서 조용히 작동하던 구조였다.
두려움이 가리키는 곳
나는 오랫동안 두려움이 사라지면 비로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확신이 생길 때까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사실이 보였다. 중요한 일일수록 더 두려웠다. 사소한 것들 앞에서는 두려움이 없었다. 두려움이 강하게 일어나는 자리가, 종종 내 영혼에게 실제로 중요한 곳이었다.
그 이메일 앞에서 느낀 것도 그랬다. 위험이 아니었다. 드러나는 것, 연결되는 것, 평가의 세계가 아닌 관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 그것이 두려웠다.
아직 받은 편지함에 있다
그 이메일은 아직 받은 편지함에 있다.
가고 싶은 마음과 주저하는 마음이 여전히 함께 있다. 이냐시오는 이런 상태를 알고 있었다. 두 방향으로 동시에 끌릴 때, 어느 쪽으로 기울 때 생명을 향하는지, 어느 쪽으로 기울 때 멀어지는지 — 그 움직임을 바라보라고 했다. 강요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나는 지금 그 바라봄 안에 있다.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고, 이 두 마음을 품은 채 기도 안에 머물고 있다. 가고 싶은 마음이 생명 쪽인지, 주저하는 마음이 보호 쪽인지 —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기다린다.
아직 모르겠다.
다만 이것은 안다. 도망치지 않고 이 질문 앞에 앉아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도 — 아직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앉아 있는 이 자리에서도 — 무언가가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힘이 올라올 때, 나는 이 질문을 다시 묻는다.
나는 지금 잘 보이러 가는가, 아니면 그냥 거기 있으러 가는가?
아직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질문 앞에 앉아 있다는 것, 그것으로 오늘은 충분하다.
나는 무엇을 끝내지 않음으로써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이 두려움은 나에게 무엇을 보라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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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하지 않아도 이미 부름받은 삶이 어떤 것인지, 함께 천천히 걸어가는 5주 과정에 초대합니다.
관상적 삶으로의 초대 — 참자기로 살아가는 길
4월 21일 — 5월 26일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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