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 하나가 건넨 말
지난 주, 리트릿 센터를 떠나려는 날 아침, 마크 목사님이 바구니를 내밀었다. "돌 하나를 고르세요. 아니, 돌이 당신을 선택하게 하세요."
나는 눈을 감고 손을 뻗었다. 차가운 표면, 매끄러운 감촉.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눈을 떴을 때, 그 위에 새겨진 단어를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RELAX.
'나는 이미 충분히 릴렉스하고 있는데.' 방금 5일간의 침묵 수련을 마쳤으니 말이다. 돌을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잊었다.
하지만 그 돌은 잊지 않았다. 아니, 그 돌을 내게 건넨 분이 잊지 않으셨다.
명치 아래 숨어 있던 것
며칠 후 수요일, 나는 Prayerful Way 수련을 안내하고 있었다. 참여자들에게 느낌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안내하면서, 나 자신에게도 물었다.
"지금 내 안에서 가장 살아있는 느낌은 무엇인가?"
그때 알아차렸다. 명치 아래, 얇게 붙어 있는 무언가를. 불안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미세하고, 평화롭다고 하기엔 너무 팽팽한. 전반적으로는 감사했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쫓기는 느낌, 준비가 덜 된 듯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그 느낌에 이름을 붙이려 했다. 그러자 자잘한 염려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피어 수퍼비전 인도를 잘할 수 있을까.' '렉시오 모임, 사람들이 만족할까.' 'Substack은 또 이번 주도 아직 쓰지 못했네.' '다음 주 새로운 코스, 새로운 사람들이 실망하면 어쩌지.'
하나하나는 작았다. 하지만 모이니 무거웠다. 그리고 그 모든 염려 아래 하나의 문장이 숨어 있었다.
'잘해야 한다.'
나는 이 말을 너무 오래 들어왔다. 어릴 때부터. 신학교에서도. 목회 현장에서도. 지금 영성지도와 관상기도를 안내하는 이 자리에서도.
잘해야 한다. 실망시키면 안 된다. 준비를 완벽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말은 내가 하는 말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말인가. 아니,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의 음성인지도 모른다.
주머니 속 돌멩이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자리로 돌아가는 음성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하나님께 조용히 물었다. 설교하듯 기도하지 않았다. 그냥 물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처음엔 침묵뿐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내 호흡 소리를 들었다. 조금 얕고, 조금 빨랐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새벽 안개가 걷히듯, 한 문장이 떠올랐다.
'내가 너를 있는 그대로 본다.'
마음이 울렸다. 깊이 감동이 되었다. 있는 그대로. 불안한 채로, 준비가 덜 된 채로, 걱정하는 채로. 하나님이 이 모든 것 속에서 나를 보신다고.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이 왔다.
'괜찮다. 자연스럽다.'
세 번째는 명령이 아니라 초대였다.
'Relax해라.'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진 말들이 더 깊은 곳을 건드렸다.
'내 안에서, 내가 모든 것들을 감당하고 있다. 나의 손길대로 모든 것들이 움직이고 있다. 너의 자리는, 내가 하도록 자리를 깔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다.'
눈물이 맺혔다.
내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 내 역할은 준비하고, 공간을 만들고, 하나님이 하시도록 비워 드리는 것이라는 것.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진다. 데려오고, 변화시키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그제야 알았다.
사실 나는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내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머리의 앎이었다. 피상적인 앎.
이제 몸이 알기 시작했다. 느낌을 통해서. 명치 아래 그 불안을 통해서. 진정한 앎(knowing)으로의 초대였다.
나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내가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내가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내가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내 몫이 아니었다.
'지금의 감정들은 나의 영역으로 네가 들어올 때 갖게 되는 느낌들이다. 걱정, 근심, 무거움은 너의 위치를 잠시 망각하고 내 자리를 대신하려 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Relax.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었다. 포기도 아니었다.
자리.
그것은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내 자리로.
어둠 속을 걷는 법
며칠 후, 나는 책을 펼쳤다. 때가 되었다는 듯. 신시아 부르조의 토마스 키팅에 관한 책, 그가 영의 어두운 밤을 통과할 때를 다룬 부분이었다. 한 문장이 내 눈을 붙잡았다.
"당신이 무엇을 붙잡고 있든, 그것이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배웠다. 변화의 여정은 어둠 속으로 손을 떼고 들어가는 것이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제공될 것이고, 제공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고 신뢰하며. 당신은 그 안으로 relax하고 let go한다."
두 단어가 다시 나타났다.
Relax. Let go.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의 초대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히 일상의 스트레스를 내려놓으라는 말이 아니었다.
이것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되, 손을 비우고 가라는 초대였다.
센터링 침묵기도(Centering Prayer)를 할 때 우리는 배운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부드럽게 내려놓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법을. 한 번이 아니라 천 번, 만 번. 토마스 키팅은 이것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천 번의 기회"라고 불렀다.
매번 내려놓을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배운다.
붙잡는 것이 방해가 되고, 내려놓는 것이 자유가 된다는 것을. 통제가 무거움이고, 신뢰가 가벼움이라는 것을.
그런데 이 배움은 기도 쿠션 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삶 전체가 이 배움의 장이다. 모든 불안, 모든 걱정, 모든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 내려놓기의 초대이다.
소명: 숫자가 아니다
이 깨달음이 내 소명에 대한 오래된 질문과 만났다.
그렉 레보이(Gregg Levoy)는 《소명(Callings)》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명을 거부하는 데 드는 에너지가 소명을 따르는 데 드는 에너지보다 크다."
나는 이 말이 사실임을 안다. 수년간 나는 영적 공동체를 만들고, 코스를 안내하는 일을 저항해왔다. 두려움이 속삭였다. "아무도 안 오면 어쩌지? 내가 준비가 안 되었으면?" 이 부르심을 저항하는 데 드는 에너지—얼마나 지치는 일이었는지.
하지만 진정한 소명은 단순히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깊다.
맷 토마스(Matt Thomas)의 이야기가 깊이 와 닿았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배신으로 절망하여 어린 아들과 함께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아들의 외침을 듣고 돌아섰고, 아들을 고아원에 맡겼다. 그 상처를 안고 자란 맷은 지금 여성들이 폭력 앞에서 "안 돼!"라고 소리치며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법을 가르치는 모델 머깅(Model Mugging)이라는 자기방어 수업을 만들었다. 5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그의 수업을 거쳐갔다.
한 어머니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 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 수업은 맷이 거의 취소할 뻔한 것이었다. 등록한 사람이 겨우 세 명이었으니까.
세 명.
나라면 취소했을 수도 있다. "너무 적어. 의미가 없어." 하지만 맷은 계속했다. 그리고 그 세 명 중 한 명은 자살을 고려하고 있던 여성이었다.
나는 알아차렸다.
나는 숫자를 내려놓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느낌을 통해서—명치 아래 그 미세한 불안을 통해서—내가 온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Substack을 쓰지 못해 불안한 것은, 모임에 사람이 적어 걱정하는 것은, '제대로 하고 있나'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은, 여전히 숫자에 대한 집착이 내 안에 남아 있다는 신호였다.
숫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숫자를 세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본다. 세 명이든, 네 명이든, 한 명이든.
그리고 이것이 relax의 또 다른 의미였다. 결과를 놓아 드리는 것. 숫자를 놓아 드리는 것. 인정을 놓아 드리는 것. 오직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 믿기에, 나는 계속한다"는 내적 확신만 남기는 것. 그것이 내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소명의 더 깊은 진리일 것이다. 단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쥐고 있는 것을 계속 알아차리고, 부드럽게 내려놓고, 내 자리로 돌아가는 것—다시 또다시, 매일매일.
힘을 빼는 용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되—충만히 인간이 되심으로써, 충만히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이것이 신비다. 내가 충만히 비울 때, 하나님이 충만히 임재하신다. 안에서 생명이 피어날 때(榮), 빛이 밖으로 비춘다(光). 그것이 영광이다. 그것이 충만함이다—내가 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우신 것.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relax는 나약함이 아니라 신뢰의 용기라는 것을.
그것은 속과 겉에 완전히 힘을 빼는 내어맡김(surrender)이다. 어깨의 긴장을, 복부의 조임을, 마음의 통제욕을 다 내려놓는 것.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힘을 뺄 때 우리는 진정한 힘을 얻는다.
통제하려는 힘이 아니라,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그 길을 선택해서 갈 수 있는 내·외적인 힘.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계속 가는 힘. 숫자가 늘지 않아도 충실한 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힘.
이것이 "근원적인 존재가 되는 것"의 의미다.
행함(doing)에서 존재(being)으로.
거기에서만 나오고 섬기는, 진정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 그 삶은 화려하지 않다. 조용하다. 하지만 깊다.
하나님은 내게 이렇게 초대하신다.
"이번 기회에 정말로 relax하고, 너의 기대는 다 내려놓고, 나의 기대가 무엇이든 그대로 내어맡기는 훈련을 하면 어떨까? 글도 내가 너를 통해서 쓰는 거니까, 걱정하지 않고, 내가 너를 통해서 말하도록만 하면 되니까, 계속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듣는 마음을 개발해 나가면 되겠네."
나의 길
그렇다면 나에게 이 사명의 소리는 무엇인가.
깊이 읽고 쓰는 것. 관상을 하고, 몸 수련을 하는 것. 수련을 안내하고, 영성지도를 하고, 관상기도를 나누는 것. 그 모든 것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진정한 참자아를 발견하고, 거기에 따라서 살아가도록 안내하는 것.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이 일들의 성공은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세 명이든, 네 명이든, 한 명이든.
중요한 것은 "이것이 나의 길이기 때문에" 계속 가는 것이다.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에 오히려 위로가 된다. 꾸준히 그냥 가는 길이다.
매일 글을 읽고 쓰는 것. 매일 관상하는 것. 매일 듣는 것. 매일 비워 드리는 것.
그 방에—혼자 앉아 기다리고 일하는 그 공간에—계속 있을 수 있는 힘. 다시 돌아와 앉아 있는 능력. 떠나지 않고, 놓지 않고 지내는 힘.
그것이 나의 소명이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relax다.
오늘 하나
주머니 속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다시 한번 속삭인다.
Relax.
이제 이 단어의 의미를 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신뢰다. 포기가 아니라 내어맡김이다. 체념이 아니라 letting go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한 가지는 무엇인가.
침묵 10분. 떠오르는 생각마다 "사랑 안에 놓아 드립니다."
작업 10분. 가장 작은 '예' 한 가지. 이메일 한 통, 문장 한 줄, 전화 한 통.
몸 10분. 어깨와 복부의 힘을 풀고 깊은 호흡. "내가 아닌 주께서."
마침: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드리며
오늘 나는 내 자리에 머물겠습니다.
사랑으로 준비하고, 귀 기울이며, 비워 드리겠습니다.
결과를 주님께 맡깁니다.
RELAX.
모든 것이 쉬워서가 아니다. 사랑이 이미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남은 일은 단 하나—내가 속한 곳에 머무는 것.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 안에.
당신을 위한 두 질문
1.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내 몸(가슴, 배, 어깨) 어디가 먼저 조여오는가?
-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나의 모습은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2. 오늘 무엇을 비워 드릴 것인가?
-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드리기 위해 오늘 놓아 드릴 작은 한 가지는 무엇인가?
- 숫자가 아닌 한 영혼에게, 오늘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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