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에서 자유낙하로

통제에서 내어맡김으로 가는 영적 여정

2025.11.08 | 조회 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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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ening Heart

관상적 기도, 경청, 그리고 삶 (contemplative prayer, listening, and life)을 위한 글

권투선수였던 나는 주먹을 쥐고 달렸다. 깃발이 되어 멈추어 섰다. 이제 매처럼, 바람의 마찰로 떠오르는 법을 배운다—애쓰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하는, 받쳐짐의 영성.


시작: 세 가지 이미지

지난 주 저널링 워크숍에서 나는 내 영적 여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세 개의 이미지로. 권투선수. 깃발. 매.

이 세 이미지가 내 평생을 관통했다. 깨달았다. 이것은 단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우리 모두가 걷는 길이다. 노력에서 놓임으로, 그리고 협력으로. 통제에서 쉼으로, 그리고 내어맡김(surrender)으로. 틀에서 자유낙하로.

데니스 레버토프의 시 한 편이 이 여정을 완벽하게 담는다. "맹세(The Avowal)":

 

수영하는 이가 감히 하늘을 보며 누우면

물이 그를 떠받치듯이,

 

매가 공중에 쉬면

공기가 그를 받치듯이,

 

나도 자유낙하를 배우고 싶다,

창조주 영의 깊은 품에 떠가기를.

 

그 어떤 노력도

우리를 둘러싼 그 은총을 얻을 수 없음을 알면서.

 

이 시를 다시 만났을 때, 알았다. 내가 평생 찾던 것이 이것이라는 걸. 자유낙하. 추락이 아니다. 떠받쳐짐이다. 통제를 놓는 게 아니다. 더 큰 것과 협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여정의 이야기다.


권투선수—쥔 주먹

영암교회 청년부 목회를 할 때, 나는 권투선수였다. 매일 아침 링에 올랐다. 주먹을 쥐었다. 펀치를 날렸다. 사역이 성장했다. 에너지가 넘쳤다. 모두가 말했다. "당신에게 은사가 있다."

그때 내 이미지는 명확했다. 쥔 주먹. 땀. 아드레날린. 전심전력. 전력질주. 나는 하나님이 그걸 원하신다고 믿었다. 노력. 희생. 결과.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더 많이 성취했다. 효과가 있었다. 겉으로는.

하지만 조용한 순간에, 알았다. 내 안에 무언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변했다. 프로그램은 성장했다. 나도 분명 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깊은 곳,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그대로였다. 들여다보지 않은 화. 인정받지 못한 불안. 치유되지 않은 상처. 밖을 바꾸고 있었다. 하지만 안의 뿌리는 그대로였다.

그 시절 내가 믿은 하나님은 성취의 하나님이었다. 숫자로 성공을 측정하는 하나님. 열심히 싸우는 자에게 보상하는 하나님. 승자를 선호하는 하나님. 그래서 주먹을 쥐고 또 쥐었다. 이겨야 사랑받는다고 믿으며.

하지만 주먹을 쥔 손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은총은 펼쳐진 손에만 내려앉는다.


깃발—바람에 맡기기

그다음 다른 계절이 왔다. 센터링 침묵기도. 영성지도. 이냐시오 『영신수련』. 샤르댕. 관상 전통의 기도들. 진정으로 가만히 앉는 법을 배웠다.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쥔 주먹을 펼치는 법을 배웠다.

이미지가 바뀌었다. 권투선수에서 깃발로. 깃발은 바람에 맡긴다. 싸우지 않는다. 애쓰지 않는다. 그저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펄럭인다. 하기를 멈추고 있기를 시작하는 법을 배웠다.

고요 속에서, 처음으로 나를 보았다. 에고의 소음 밑에서. 분주함의 연막 뒤에서. 성취의 가면 너머에서. 참자아가 있었다. 넓었다. 고요했다. 뿌리내려 있었다. 만났다. 다른 하나님을. 현존의 하나님. 숫자를 세지 않는 하나님. 결과를 요구하지 않는 하나님. 그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이것이 자유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자유였다. 하지만 불완전했다. 깃발은 아름답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에 맡긴다. 하지만 바람과 협력하지는 않는다.

권투선수가 순수한 노력이었다면, 깃발은 순수한 놓음이었다. 그러나 그다음이 있었다 — 움직임 속의 쉼, 바람과의 협력, 은총과의 춤.

"매는 공기와 싸우지 않고 협력하며, 바람의 마찰 자체를 이용해 날아오른다." (Image generated by ChatGPT)

매—행동 속에서 쉬기

지난주 저널을 쓰며 새로운 이미지가 떠올랐다. 매.

매는 둥지에 하루 종일 앉아 있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정체다. 매는 참새처럼 미친 듯이 날갯짓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노력이다. 소진이다. 매는 다르게 한다. 매는 바람의 마찰 자체를 이용해서 날아오른다. 날면서 쉰다. 고요하면서 움직인다. 애쓰지 않으면서 노력한다.

이것을 중국 고전은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불렀다. 함이 없이 이루는 것. 애씀이 없이 변화하는 것.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을 다 하는 자연스러운 상태.

매는 공기와 싸우지 않는다. 공기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공기와 협력한다. 바람이 분다. 저항이 있다. 마찰이 있다. 매는 그 마찰을 이용한다. 저항 자체를 들어 올리는 힘으로 바꾼다. 그래서 매는 공중에서 쉰다. 행동 속에서 쉰다. 일하면서 쉬는 법을 배운다.

이것이 "맹세(The Avowal)"라는 시의 핵심이다. "매가 공중에 쉬면 공기가 그를 받치듯이..."

내 저널에 이렇게 썼다. "매는 공기의 마찰을 이용해서 떠 있고 날아오른다. 이제 둥지에만 앉아 있는 게 아니다—물론 그것도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일 수 있다. 동굴에서, 산 속에서 평생을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것. 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길이 보였다. 영암교회에서처럼 미친 듯이 날갯짓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조건들—바람, 저항, 도전—을 이용해서 날아오르는 것이다."

권투선수처럼 싸우지 않는다. 깃발처럼 수동적이지도 않다. 매는 협력한다. 삶과. 바람과. 은총과.

이것이 내가 지금 듣는마음 공동체와 함께 배우는 것이다. 동굴에서만 명상하지 않는다. 산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창조하고 있다.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다. 하지만 쉼에서 한다. 받쳐진 채로 한다. 자유낙하의 행위로 한다.


자유낙하의 세 움직임

자유낙하는 체념이 아니라 협력이다. 수동적이지 않다. 영적 회피가 아니다. 세 가지 능동적 움직임이 있다.

첫째, 용기. "감히 하늘을 보며 눕기"—이것은 틀을 떠나는 용기다. 취약해지는 용기. "나는 모른다"고 말하는 용기.

이번 주 이메일 두 통이 왔다. 하나는 기관에서. 내가 가르치던 수업, 다른 사람이 맡는다고. 하나는 영성지도 받던 사람에게서. 다른 영성지도자를 거의 다 찾았다고 이제 그만한다고.

순간, 물음들이 올라왔다. 타이틀 없이 나는 누구인가? 역할 없이 나는 누구인가? 선택받지 못하면 나는 누구인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내 마음 안에 있었다. 그 물음들은 여전히 내 마음을 찔렀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타이틀 없이도 충분할 수 있을까? 여전히 받쳐진다고 믿을 수 있을까? 대답은, 천천히, 예스였다.

둘째, 쉼. "매는 공기 위에서 쉰다"—이것은 행동 속에서 쉬는 것이다. 행동 후가 아니다. 행동 대신이 아니다. 행동 속에서.

오랫동안 나는 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가 달리 가르쳐준다. 매는 완전히 일하고 있다. 날고, 사냥하고, 날아오르고. 하지만 공기 위에서 쉰다. 애쓰지 않는다. 소진되지 않는다. 자신을 받치는 것과 협력한다.

지금 배우는 것이 이것이다. 일하고 있다. 쓰고, 가르치고, 조직하고. 하지만 분투하지 않는다. 무엇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은총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공기 위에서 쉬고 있다.

셋째, 내어맡김. "창조주 영의 깊은 품에 떠가기"—이것은 완전히 내어맡기는 것이다.

샤르댕은 이것을 신적 환경(Divine Milieu)이라고 불렀다. 모든 것이 이미 하나님 안에 받쳐져 있다는 현실. 성공도. 실패도. 얻음도. 잃음도. 틀도. 자유낙하도. 모두 "우리를 둘러싼 그 은총"에 포옹되어 있다.

타이틀을 잃었을 때, 선택이 있었다. 패닉하며 새 틀을 만들거나, 타이틀이 있든 없든 받쳐진다는 현실 속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흘러가기를 선택하고 있다. 여전히 배우고 있다. 하지만 매일 연습한다.


일상 속의 자유낙하

지난주 내 저널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이 있었다. 자유낙하는 산속 수양관에서 하는 게 아니다. 설거지, 이메일, 회의 속에서 연습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깊은 영적 수련에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수양관. 몇 시간의 침묵.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하지만 샤르댕이 달리 가르쳤다. 그는 말했다. 신적 환경. 모든 것이 거룩하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받쳐진다. 세속 대 거룩이 없다. 평범 대 신성이 없다. 모두 하나다.

내 저널에 이렇게 썼다. "산속 비싼 수양관에 가야만 수련하는 게 아니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깊은 관상의 세계에서 살 수 있다. 이것은 일상 속 수도생활이다."

이것이 내가 지금 배우는 것이다. 아침에 차를 만들 때, 수영할 수 있다—서두르고, 걱정하고, 미리 계획하고. 또는 떠갈 수 있다—컵의 따뜻함을 느끼고, 향을 알아차리고, 순간에 쉬기.

이메일에 답할 때, 수영할 수 있다—모두를 기쁘게 하려 애쓰고, 내 가치를 증명하려 하고. 또는 떠갈 수 있다—현존에서 타이핑하고, 내 말이 충분하다고 믿기.

미루고 있을 때, 수영할 수 있다—자책하고, 수치심으로 나선하고. 또는 떠갈 수 있다—미룸을 알아차리고, 자비로 품고, 무엇을 보호하려는지 묻기.

가족과 함께할 때, 수영할 수 있다—주의산만하고, 반쯤 있고, 일 걱정하고. 또는 떠갈 수 있다—온전히 여기, 온전히 듣고, 온전히 사랑하기.

이것이 비이원론 영성이다. 평범 속의 거룩함. 일상 속의 신성함. 설거지 속의 자유낙하.

자유낙하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수영하고 있을 때를 알아차리고 떠가기를 선택하는 연습이다.

아침, 조용히 앉는다. 숨 쉰다. 묻는다. "오늘 나는 어떤 틀로 기어들어가려 하는가? 무엇을 통제하려 하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는가?" 그리고 의식적으로 내려놓는다. "타이틀이 필요 없다. 인정받을 필요 없다. 성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받쳐지고 있다."

낮, 여러 번 확인한다. "지금 나는 수영하고 있는가, 떠가고 있는가? 움켜쥐고 있는가, 펼치고 있는가? 분투하고 있는가, 쉬고 있는가?" 긴장을 알아차리면—몸의, 마음의, 감정의—멈춘다. 숨 쉰다. 말한다. "감히 하늘을 보며 눕자. 물이 나를 떠받친다."

저녁, 하루를 돌아본다. "오늘 어디서 자유낙하했는가? 어디서 신뢰했는가? 어디서 받쳐짐을 느꼈는가?" 그 순간들에 감사한다. 그것들이 나를 키운다. 하루를 놓아준다. 성공에 집착하지 않는다. 실패에 집착하지 않는다.


가장 깊은 틀—하나님 이미지

가장 깊은 틀은 직업도, 정체성도, 성공도 아니다. 가장 깊은 틀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만드는 것이다.

이번 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가 나를 멈춰 세웠다. "당신을 그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신을 왕의 옷으로 그려서는 안 된다,

아침을 가져온 떠도는 안개여.

또다시 낡은 물감통에서

우리는 홀과 왕관을 위한 같은 금을 가져온다

시대를 통해 당신을 변장시킨 그것을.

경건하게 우리는 당신의 이미지들을 만든다

그것들이 천 개의 벽처럼 당신 주위에 설 때까지.

그리고 우리 마음이 단순히 열리려 할 때,

우리의 애쓰는 손이 당신을 숨긴다.

 

이 시가 내 가슴에 와닿았다. 그 순간, 내가 평생 하나님을 위해 틀을 만들어왔다는 사실이 보였다.

어린 시절, 조건부 사랑의 하나님. 충분히 착하고, 충분히 믿음직하고, 충분히 순종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 목회 시절, 성취의 하나님. 숫자로 성공을 측정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에 보상하고, 승자를 선호하는 하나님. 초기 관상 시절, 영적 완벽의 하나님. 완벽하게 고요하고, 완벽하게 분리되고, 완벽하게 깨달았기를 원하는 하나님.

하지만 릴케가 말한다. "경건하게 우리는 당신의 이미지들을 만든다..." 경건하게. 선한 의도로. 진실한 헌신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생각하며 이 틀들을 만든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숨기고 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단순히 열리려 할 때, 우리의 애쓰는 손이 당신을 숨긴다." 이 구절이 내 마음을 열었다. 그 순간, 내 안의 애씀이 조용히 무너졌다. 내 마음은 열리고 싶어 한다. 단순히 하나님 안에 쉬고 싶어 한다. 단순히 받쳐지고 싶어 한다. 단순히 신뢰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내 애쓰는 손—나의 분투, 나의 노력, 정의하고 통제해야 하는 나의 필요—가 계속 벽을 쌓는다. "하나님은 이러시다." "하나님은 저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것을 요구하신다." 그 벽들—그 천 개의 이미지들—이 감옥이 된다. 나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릴케는 다른 이미지를 제시한다. "아침을 가져온 떠도는 안개여." 왕좌의 왕이 아니다. 망치를 든 심판자도 아니다. 기대를 가진 아버지도 아니다. 떠도는 안개. 잡을 수 없다. 정의할 수 없다. 자유롭다.

이것이 내가 자유낙하에서 신뢰하기를 배우고 있는 하나님이다. 틀 속 하나님이 아니라 현존 하나님.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받치는 하나님. 내가 정의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안개처럼 나를 둘러싼 하나님. 내가 애써 얻어야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여기, 이미 사랑하고, 이미 떠받치는 하나님.


마침: 받쳐짐의 초대

나는 여전히 틀을 만든다. 오늘 아침에도 그런 나를 알아차렸다. "기관의 타이틀" 틀을 잃었으니, 이제 "듣는마음 공동체 창립자" 틀을 만들고 있다. 이미 그것이 나를 정의하고, 보호하고, 정체성을 줄 거라고 상상하고 있다.

오래된 습관은 쉽게 죽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다른 것이 있다. 틀 만들기를 볼 수 있다. 충동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밑의 두려움을 관찰할 수 있다. 그 봄 속에서 선택이 있다. 틀 안으로 기어들어가 문을 잠글 것인가? 아니면 밖으로 나와 자유낙하를 감행할 것인가?

대부분의 날, 자유낙하를 선택한다. 어떤 날은 여전히 틀을 선택한다. 하지만 내 삶의 방향은 명확하다. 틀에서 자유낙하로. 통제에서 신뢰로. 분투에서 쉼으로. 이미지에서 현존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있다. 자유낙하를 연습할수록 더 깨닫는다.

물은 항상 있었다. 공기는 항상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은총은 항상 있었다.

지난주 나의 발자취들을 되돌아보며, 이 여정의 다음 단계를 보았다. 오랫동안 안으로 움직여왔다. 사회운동에서 개인 관상으로. 사역의 분주함에서 영혼의 침묵으로. 세상에서 산으로. 그 움직임은 필요했다. 중심을 찾아야 했다. 역할 밑의 나를 발견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움직임이 역전되는 것을 본다. 뒤로가 아니라 나선형으로 앞으로. 개인에서 공동체로. 내적 작업에서 통합된 삶으로. 옛 틀들로 돌아가지 않는다. 성과중심 사역이나 성취기반 정체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밖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번에는 쉼의 자리에서. 이번에는 펀치를 날리는 권투선수가 아니라 바람을 타는 매로.

내 저널에 이렇게 썼다. "나는 우리가 함께 연습하는 공동체를 꿈꾼다—개인의 변화와 공동체의 삶과 세상과의 관여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짜인 곳. 우리가 서로를 받쳐주며 자유낙하를 배우는 곳. 우리가 서로에게 상기시키는 곳: 당신은 받쳐진다."

그 공동체가 듣는마음 공동체다. 지금은 작다. 막 시작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실험이다. 나의 연습장이다. 자유낙하를 위한 나의 살아있는 실험실이다.

내가 만들기를 배우는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들이 현존을 연습할 수 있는 공간. 기관이 아니라 우리가 틀을 떠나는 것을 서로 지지하는 운동. 위계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배우는 원.

가장 깊은 연습은 이것이다. 일—쉼—성공—실패—얻음—잃음, 모든 것이 이미 우리를 둘러싼 그 은총 안에 받쳐졌다는 듯이 사는 것. 이것이 비이원론 영성이다. 이것이 통합된 삶이다. 이것이 존재의 방식으로서의 자유낙하다.

이제 당신을 향한다. 당신은 어떤 틀들 속에 살고 있는가? "좋은 부모"의 틀? "성공한 전문가"의 틀? "영적인 사람"의 틀? "모든 걸 함께 가져야 한다"의 틀?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의 틀? "좋아 보여야 한다"의 틀?

어쩌면 가장 깊은 틀. "하나님은 _____이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_____해야 한다."

당신의 틀이 무엇이든, 알기를 바란다. 그것들을 벗어나고 싶은 갈망은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대다. 당신이 느끼는 불편함. 불안. "이것보다 더 있어야 해"라는 감각. 그것은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따라가야 할 부름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자유낙하로 초대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약속이 있다.

하늘을 향해 눕기만 하면 된다. 움켜쥔 것을 놓기만 하면 된다. 그저 내어맡기면 된다.

 

수영하는 이가 감히 하늘을 보며 누우면 물이 그를 떠받치듯이,

매가 공중에 쉬면 공기가 그를 받치듯이,

나도 자유낙하를 배우고 싶다,

창조주 영의 깊은 품에 떠가기를.

그 어떤 노력도 우리를 둘러싼 그 은총을 얻을 수 없음을 알면서.

 

당신도 이미 알고 있다. 그 느낌을.

수영하다 지쳐 물에 빠질 것 같을 때, 문득 몸의 힘을 빼고 하늘을 보며 누웠던 그 순간. 물이 당신을 떠받쳤다. 애쓰지 않아도. 증명하지 않아도. 그저 내어맡기면 된다.

그것이 은총이다. 그것이 자유낙하다.

감히 하늘을 보며 눕자.

물이 당신을 떠받친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도 받쳐지고 있다.

우리, 함께 자유낙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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