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과 행동 사이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2025.10.04 | 조회 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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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ening Heart

관상적 기도, 경청, 그리고 삶 (contemplative prayer, listening, and life)을 위한 글

"함께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장애물을 걷어낸다—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하는 모든 노동이 관상이 된다." 이미지: ChatGPT로 제작

장애물을 걷어내는 사랑

5일간의 흑인, 원주민, 유색인종을 위한 센터링 침묵기도 수련이 끝나자, 내 안엔 서먼의 한 문장만 또렷이 남았다. "사회적 행동이란 하나님 경험으로부터 사람을 분리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근원 안에 계신다." 그 순간 관상과 행동은 따로가 아니었다. 내가 안내해 온 영성 수련과 경청의 자리가, 이미 세상을 바꾸는 작은 길임을 보았다.

오랫동안 나는 사회적 행동이라고 하면 거리의 활동가들을 떠올렸다. 모든 문제에 정통하고, 모든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들. 그런 모습에 미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볼 때마다 부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런데 서먼의 말은 내가 가진 좁은 틀을 보게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장애물을 제거한다고 하면, 훨씬 더 깊고 넓은 차원이 열린다. 재정적 후원, 교육, 사회 의식에 뿌리 내린 영적 안내까지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것이 된다.

관상적 경청: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관상(觀想)이란 한자의 뜻은 깊이 바라보고(觀) 묵상하는(想) 것이다. 마음으로 깊이 바라본다는 뜻이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사색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응시하는 영적 응시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는 그 상태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그 하나님의 조건 없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보고 이웃과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 '보는 행위' 자체가 바로 증거하기(witnessing)이다.

깊은 관상적 경청 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판단과 정죄 없이 온전히 들려지는 경험을 한다. 이 사회에서 힘이 없고 상처 입기 쉬운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잘 들어주는 것, 함께 현존해 주는 것—이것이 바로 증거하는 것이다. 위로를 서둘러 만들지 않는다. 대신 함께 머문다. 조건 없는 함께-있음이 사람을 스스로 일으킨다.

이런 증거는 당사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증거하는 사람들 안에도 새로운 부르심을 일으킨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새로운 소망을 품게 하고, 새로운 비전을 보게 하고, 새로운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다.

거룩한 공간, 들려지는 목소리들

이 안전하고 거룩한 공간에서는 누구나 와서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다. 환영받는다. 힘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차별이 없다.

특별히 힘이 없는 사람들, 이 세상의 권력 역학 속에서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 그들의 진짜 정체성이 누구인지를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 장애물을 걷어내는 것과 깊이 연결된다.

지금 북미 사회에서, 한국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사회와 문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경쟁, 생산성, 성공이 최고 가치가 되고,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밀려나는 이들이 생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도 오늘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작은 길이 있다—경청, 언어 장벽 낮추기, 10분 관상, 회복적 대화 한 번. 그들이 마음을 열고 자신의 고통과 아픔, 불의를 나눌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갖고, 그것을 증거해 줄 수 있는 공간—이곳이 바로 사회적 행동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진정으로 경청하고 증거하게 될 때,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아파한다. 그런 연대(solidarity)가 우리의 영혼을 살린다. 이런 경청은 함께 감지하고(sensing), 함께 현존하면서(present), 새로운 차원의 행위 능력(agency)을 함께 발견해 나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한다. 거기에서 새로운 지혜가 나오기도 하고, 어떻게 이 현실을 직면해서 살아가거나 견디거나,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이 나온다.

왜 따로 모여야 하는가

많은 분이 "다 함께 모이면 더 좋지 않나? 왜 꼭 따로 모여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 질문엔 공동선을 향한 선함이 담겨 있다. 다만 안전과 발언권의 경험이 서로 다를 때, 치유의 첫걸음은 때로 동질 모임에서 시작된다. 치유가 무르익으면, 더 넓은 자리로 서로를 초대한다.

나는 남성으로서 여성과 함께할 때 별 불편함이나 불이익이 없기 때문에, 여성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따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때 새롭게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더욱 깊이 공감하고, 그 연대에서 나오는 놀라운 회복력이 있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소외된 영역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자신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사회 전체의 서사(narrative)가 주지 못하는 특별한 관점을 듣게 된다. 거기에서 깨어남이 온다. 치유가 무르익으면, 더 넓은 자리로 서로를 초대한다.

식민지의 눈을 벗어나

나는 복음주의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 속에 이런 식민지적 관점이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했다. 물론 모든 선교사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선교사들이 가졌던 시각—다른 문화와 종교를 열등하게 보는 시각—이 내 안에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몰랐다. 조상을 섬기는 제사, 토속 신앙, 다른 종교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나 자신의 문화와 존재에 대한 단절을 한 셈이었다. 나의 사회적 과거를 오래 어둠 속에 묻어두었다.

미국에 와서 좀 더 열린 관점들을 배우고, 특히 다른 유색인종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의 조상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을 깊이 존중하고 기억하고 함께해 나갔다. 나는 너무나 쉽게 나의 뿌리를 놓아버렸던 것이다.

나 스스로도 열등하게 여겼던 내 나라의 문화와 과거가 새롭게 올라왔다. 서열의 잣대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그 안에 깃든 하나님의 흔적을 본다. 그런 문화와 사회, 종교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사랑과 인류애와 평화를 이루는 놀라운 지혜들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관상기도를 다시 생각하다

관상적 삶이라고 할 때, 나는 하루에 20분 이상씩, 그것도 하루에 두 번씩, 가능하면 세 번씩도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을 안내해왔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길게 피정을 다녀오는 삶에 대해서도 그렇다. 지금도 그렇게 안내한다. 그런데 이것이 사회에서 특권(privilege)을 가진 사람의 입장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루하루 살아야 하고, 끊임없이 청구서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관상적이 아니라는 뜻인가?

관상을 '하나님의 조건 없는 눈과 마음으로 함께 바라보는 상태'라고, '그런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내면의 변화이다. 즉 하나님께 온전히 나 자신을 내어드리고자 하는 내어맡김(surrender)의 상태가 되면, 로렌스 수사처럼 설거지와 요리를 하면서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거할 수 있다.

일상 속 관상의 작은 루틴들이 있다. 60초 호흡하고, 짧은 시나 말씀 한 구절을 읽고, 30초 침묵하는 것. 걸레 한 번 헹굴 때 "자비를", 쓰레받이 비울 때 "감사합니다", 재료 한 번 썰 때 "사랑으로"라고 속삭이는 것. 출근 후 작업 시작 전, 관리자와 노동자가 함께 60초 침묵하는 것. 버스나 지하철에서 한 정거장 동안 스마트폰 대신 창밖을 보며 하나님께 머무는 것.

수련 중 한 사람이 나누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관리인(janitor)으로서 방을 청소할 때, 청소기를 특정 방식과 방향으로 현존하며 돌리는 것이 관상이 되었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나의 아버지가 집 짓는 일을 하시면서 하나씩 벽돌을 쌓아가셨던 그 일 또한 충분히 관상적인 상태에서 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이것을 다 쌓느냐? 무슨 재미로 하느냐"고 물었을 때, "결과보다는 하나씩 쌓아 올라가는 재미로 한다"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일상의 일들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순간 하는 모든 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 자체가 관상의 상태에서 하는 거룩한 순간이 될 수 있다. 얼마든지 하나님과 함께 관상의 차원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안식을 재발견하다

안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상태로만 보게 된다면, 그 많은 시간을 일은 하지 않지만 다른 많은 쓸데없는 것들을 하면서 보내는 경우도 있다. 진정한 안식이 안 될 수도 있다.

반대로 그런 시간이 부족해도, 얼마든지 하나님 안에서 머무는 창조적인 쉼의 상태로 지낼 수 있다.

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각자의 상태와 내면의 경험 수준, 그리고 외적인 삶의 다양한 시즌에 따라 얼마든지 각자에 맞게 안식을 찾아서 누릴 수 있는 다양성이 생기게 된다.

안식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함께 필요하다:

외적 안식의 조건: 시간을 가질 수 없던 이들이 쉴 수 있게 하는 구조—유급 휴식, 돌봄 분담, 접근성. 함께 공정하게 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내적 안식의 능력: 진정으로 관상의 상태에서 안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 머무는 훈련—짧은 침묵, 몸의 완전 이완, '충만한 빈 시간'에 머무는 법. 몸과 마음이 함께 쉴 수 있는 상태를 누리는 것이다.

외적 조건이 길을 내고, 내적 능력이 그 길을 걷게 한다. 이 둘이 함께할 때, 일과 생산성에 초점을 맞춘 이 자본주의 문화에서 온전하게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이 된다.

뿌리를 품고, 흐름에 참여하다

나 자신의 문화와 과거의 경험들을 굳이 이분법적으로 분리해서 다 내어버릴 이유가 없다. 하나님 안에서 다 수용하고, 살아 있게, 창조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나의 마음 상태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느냐, 나의 마음의 동기가 순수한 사랑(pure love)에 얼마나 가까운가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배웠던 다양한 관점들에서 나오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내려놓고,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사랑의 흐름(flow)에 참여해 나가는 삶이 진정한 자유의 삶인 것이다.

그 흐름에는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나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불공평한 이 세상의 시스템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힘이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함께하시는 정의를 통해서 사랑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 또한 중요한 사회적 행동이다.

자연처럼 모든 것들을 수용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상태,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관상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다.

함께 가는 길

이번 수련에서, 나는 하나님 안에서 근원적인 참자아(True Self)를 사랑받는 존재(belovedness)로서 깊이 자각하고 늘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근원임을 다시 확인했다. 나의 개인적인 자아로서 에고(ego)를 잘 알아차리면서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좀 더 폭넓게 사회 속에서 인종 및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사회적 자아(social self)에 대해서도 의식해 나가면서 함께 통합적으로 건강한 전체(whole)가 되도록 하는 것이 영적 우회(spiritual bypassing)를 하지 않으면서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나의 조상들, 부모님들, 나의 과거 역사에 대해서 좀 더 마음을 다해서 품고 존경하고 함께하면서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주는 사회적 자아에 대한 의식을 갖도록 다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사회가 발전해도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리에 대해서 좀 더 민감하게 잘 증거하여 해방하도록 공간을 만드는 삶에 대해서 다시금 부르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함께해 나가는 공동체에서는 서로가 선생님이 되고, 학생이 되어서, 서로에게 배우고 성장을 함께해 나가는 그런 놀라운 복된 자리가 될 수 있다.

이런 수련을 통해 나 자신의 근원적인 정체성, 하나님 안에서 그 어떤 것도 건드릴 수 없는 근원적 존재에 머물러서, 이 사회의 조건화된 존재로 살아갈 때, 그런 사회적인 조건들을 더욱 하나님 안에서 존엄성을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삶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복된 삶을 이루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런 하나님 나라를, 이미 여기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참여해 나갈 수 있다. 그렇게 함께 가는 귀한 동료들을 확인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감사한다.


성찰을 위한 질문

1. 내가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나와 우리 공동체에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을까? 그들의 이야기가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어떤 새로운 행동과 사랑으로 꽃피울 수 있을까?

2. 일상의 반복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함께 춤출 수 있다면, 나의 삶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이 피어날 수 있을까? 어떤 순간이, 어떤 리듬이 그 춤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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