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직진하면 구독자님은 다섯 명의 인부를 치어 죽이게 되고, 스위치를 눌러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한 명의 인부를 희생시키게 됩니다. 구독자님은 직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스위치를 누르시겠습니까?
철학적 디스토피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심하세요. 다행히도, 실제 상황이 아닙니다(휴!). 그렇습니다. 위 시나리오는 이른바 "트롤리 문제(trolley problem)"라고 불리는 유명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입니다.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시나리오이지요.
철학자들은 도대체 왜 저런 끔찍한 상상을 하는 걸까요? 철학자들이 사고실험을 하는 이유는 과학자들이 실험을 하는 이유와도 비슷합니다. 과학자들이 가설이 타당한지 아닌지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 실험을 수행하듯, 철학자들은 철학적 논변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해 사고실험을 수행합니다. 또한, 과학자들이 정확한 실험을 위해 변인통제를 실시하듯, 철학자들도 철학적 논변의 타당성을 정확하게 시험하기 위해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하곤 합니다. 덕분에,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속이는 악마에게 홀리기도 하고, 통 속에 담긴 뇌가 되기도 하며,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한낱 사기꾼일 뿐이고 스팸과 김치를 즐기는 미국인 아저씨가 『한여름 밤의 꿈』의 참된 저자인 충격적인 대체역사물 속에 살게 되기도 합니다.
철학자들이 고안한 수많은 기상천외한 사고실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아마도 서두에서 소개한 트롤리 문제일 겁니다. 물론 센델의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덕분이지요. 컬트적인 인기를 끈 『정의란 무엇인가』는 (아마도) 전국민이 읽은 유일한 철학책일 텐데, 자비 없는 두께 탓에 전국민이 앞부분만 읽은 유일한 철학책이기도 합니다. 트롤리 문제는 다행히도 책의 초반부에 소개되어서 널리 알려질 수 있었지요. 그래서인지, 트롤리 문제가 상정하는 시나리오 자체의 유명세만큼이나 그 사고실험이 야기하는 철학적 난제가 무엇인지, 그 실천적 함의가 무엇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합니다. 재미있지만 쓸모는 별로 없는 하나의 말장난 정도로 취급되기도 하고요.
그러나, 트롤리 문제는 사실 매우 진지한 윤리학(ethics) 혹은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적 질문을 던지는 중요한 사고실험입니다. 트롤리 문제는 무엇이 도덕적인지, 나아가 무엇이 도덕적으로 허용가능(morally permissible)한지에 관한 우리의 직관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트롤리 문제는 또한 여러 가지 다양한 버전으로 재생산되기도 했는데, 이렇게 형성된 '트롤리 유니버스'는 MCU 뺨치게 광활하고 흥미진진하며, 또한 딥다크합니다. 트롤리가 이리저리 질주하고, 유혈이 낭자하며, 미친 과학자가 장기를 적출하고 머리 위로는 폭격기가 날아다닙니다. 그야말로 철학적 디스토피아나 다름 없습니다.
자, 이제 다시 광산의 트롤리로 돌아가 봅시다. 구독자님은 직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스위치를 누르시겠습니까?
"다섯 명이 죽는 것보다는 한 명이 죽는 게 당연히 낫지."
혹시, 방금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이것이 트롤리 문제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답변입니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다섯 명을 희생시키는 것보다야 한 명을 희생시키는 쪽이 당연히 나을 것이고, 그러므로 스위치를 눌러 트롤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일 겁니다. 한 명에게는 무척 안타까운 일이겠지만요. [맨 위에서 제시한 사례를 이하 "(1) 단순한 트롤리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이 직관적인 답변은 도덕적인 행위란 무엇인지에 관한 하나의 중요한 가정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어떠한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가 산출하는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는 가정입니다. 이 가정을 우리는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라고 부릅시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결과주의에 따르면, 특정한 행위는 내재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닙니다. 행위는 그것이 산출하는 결과에 따라 옳거나 그르게 됩니다. 어떤 행위가 좋은 결과를 산출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이고, 나쁜 결과를 산출한다면 도덕적으로 그릇된 행위입니다. 예컨대 살인은 피해자로부터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효용을 앗아가는 반면 가해자에게는 변태적인 욕구의 일시적 충족만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음(-)의 결과를 산출합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그릇된 행위입니다. (1)의 단순한 트롤리 문제에서는 직진을 하든 스위치를 누르든 음(-)의 결과가 산출되기는 하지만, 다섯 명보다는 한 명만 목숨을 잃는 것이 덜 나쁜 결과를 산출하므로 스위치를 누르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입니다. 도덕적 의무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도덕적으로 허용가능(morally permissible)한 일이지요.
결과주의는 단순한 형태의 트롤리 문제에서는 문제없이 작동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철학은 우리가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는 꼴을 도저히 눈 뜨고 보지 못하는 고약한 습성이 있습니다. 자, 이제 구독자님이 일하고 있는 그 광산의 지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갑시다. 그곳에는 사실 미치광이 과학자의 비밀 실험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과학자는 미치광이이긴 하지만 심성은 좋은 사람입니다. 또한 독실한(?) 결과주의자여서, 한 명을 희생하여 다섯 명을 살릴 기회가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할 겁니다.
미치광이 과학자는 A의 심장을 적출해도 될까요? "미치광이 과학자"라는 설정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면, 선량한 의사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환자를 살리겠다는 집념이 너무 강한 나머지 최후의 수단을 만지작거리는 중인 의사 말입니다. 어느 쪽이든, 직관적인 답변은 "그래서는 안 된다"일 겁니다. 심지어는 이런 질문 자체에 불쾌함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까지도 있습니다.
트롤리 문제를 약간 변형하여 (2)와 유사한 시나리오를 만들어볼 수도 있습니다. 이 변형된 시나리오에서는 구독자님의 역할이 바뀝니다. 구독자님은 이제 트롤리 운전사가 아닙니다. 그냥 광산에 근무하는 행정직원입니다. 트롤리 트랙 위를 지나가는 육교에 올라가 선선한 바람을 쐬며 한가로이 믹스커피를 즐기고 있지요. 다행일까요? 아닙니다!
구독자님은 뚱뚱한 남자를 밀어서 다섯 명의 인부를 구해도 될까요? (2)와 마찬가지로, 이때도 우리의 직관적인 반응은 "안 된다"일 것입니다.
문제는, 단순한 형태의 트롤리 문제인 (1)과 방금 소개한 (2), (3)이 언뜻 보기에는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다섯 명을 희생하거나 한 명을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을 상정합니다. 단순한 결과주의가 옳다면, (1)에서 다섯 명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2)와 (3)에서 다섯 명을 구하기 위해 A의 심장을 적출하거나 뚱뚱한 남자를 밀어버리는 것 또한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위치를 누르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하지만 심장을 적출하거나 뚱뚱한 남자를 밀어버리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하지 않다"는 강한 직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죽이기 vs 죽게 놔두기
(1)과 (2), (3)의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하는 걸까요? 이 사례들은 언뜻 보기에 동일한 것 같지만, 분석해보면 분명 다른 점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도덕 판단에 이렇게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겠지요. 혹은, "어떤 행위가 좋은 결과를 산출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이고, 나쁜 결과를 산출한다면 도덕적으로 그릇된 행위"라는 결과주의 원칙을 수정하거나 다른 조건을 더 추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의 유력한 논변은 이렇습니다. (1)에서 구독자님의 선택지는 한 명을 죽이거나 다섯 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반면, (2)와 (3)에서 행위자의 선택지는 한 명을 죽이거나 다섯 명을 죽게 놓아 두는 것입니다. 주어진 선택지가 한 명 또는 다섯 명을 죽이는 것이라면, 덜 나쁜 결과를 산출하는 전자를 선택함이 당연히 옳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죽이는 것과 소극적으로 죽게 놔두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고, 죽이는 것은 단순히 죽게 놔두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따라서, 주어진 선택지가 한 명을 죽이는 것과 다섯 명을 죽게 놔두는 것이라면, 후자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죽이는 것(to kill)과 그저 죽게 놔두는 것(to let die)의 차이에 주목하는 이 논변을 우리는 "하기/허용하기 구분 논변 (doing/allowing distinction argument)", 간단히 구분 논변이라고 부릅시다. 이 논변은 해악을 적극적으로 끼치는 것과 해악을 그저 허용하는 것을 구분하여야 한다는 직관에 호소합니다.
구분 논변을 각각의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해 봅시다. (1)에서 열차 운전자인 구독자님은 직진을 하기로 선택하더라도 다섯 명을 (구독자님이 운전한 열차로 치어) 죽이게 되고, 스위치를 누르기로 선택하더라도 한 명을 죽이게 됩니다. 두 선택지의 차이는 다섯 명과 한 명의 양적 차이에 불과하므로, 더 좋은 결과를 산출해야 한다는 결과주의 원칙에 따라 한 명을 죽이는 것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2)와 (3)의 경우는 다릅니다. 미치광이 과학자가 A의 심장을 적출하지 않고 가만히 있거나 구독자님이 뚱뚱한 남자를 밀치지 않고 가만히 있더라도 그로써 다섯 명을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다섯 명이 죽게 되겠지만, 행위자가 이들을 죽인 것은 아니죠. 질병 또는 열차로 인해 죽게 놔둔 것일 뿐입니다. 반면 A의 심장을 적출하거나 뚱뚱한 남자를 밀치는 행위는 한 명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2), (3)에서 두 선택지는 질적으로 다르며, 한 명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하지 않습니다.
구분 논변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1)과 (2), (3)의 차이라고 느끼는 지점을 정확하게 간파합니다. (1)과 달리 (2), (3)에서는 다섯 명의 죽음이 행위자의 적극적인 개입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이 바로 그 차이입니다. 그러나 구분 논변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구분 논변은 죽이는 것이 죽게 놔두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더 나쁘다고 전제하고 있지만, 그러한 전제가 항상 옳은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사고실험을 살펴봅시다.
모짜르트의 집에 왜 농약과 막걸리가 있냐는 의문은 잠시 넣어두셔도 좋습니다. 사고실험이니까요. 어쨌든, (4)에서 살리에리는 모짜르트를 죽이지만, (5)에서 살리에리는 모짜르트를 죽게 놔둡니다. 구분 논변에 따르면 죽이는 것이 죽게 놔두는 것보다 그 자체로 더 나쁘기 때문에, (4)의 행위가 (5)의 행위보다 도덕적으로 더 나쁘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요? 우리의 건전한 직관에 의하면 (4)의 행위나 (5)의 행위는 서로 우열을 가릴 것 없이 똑같이 나쁩니다. 그렇다면 죽이는 것이 죽게 놔두는 것보다 항상 더 나쁘다는 구분 논변의 전제는 참이 아닌 듯합니다.
트롤리 문제를 약간 수정하면 구분 논변의 이러한 문제가 더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이 수정본에서 구독자님은 트롤리 운전사도 아니고, 육교 위에 올라가 있지도 않습니다. 구독자님은 그저 갓길에 서 있던 행인이고, 옆에는 뚱뚱한 인부도 없습니다. 휴, 다행이다!
구독자님은 레버를 당기시겠습니까?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이때는 "레버를 당겨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도덕적인 직관에 부합하니까요. 그런데 이 직관은 구분 논변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구독자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다섯 명을 죽게 놔두게 되겠지만, 레버를 당기면 한 명을 죽이게 됩니다. 게다가 이때의 죽이는 행위는 어떻게 보면 (1)의 경우보다도 훨씬 적극적입니다. 다시 말해, (6)은 (1)이 아니라 (2), (3)과 구조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런데도 이 경우 우리는 (2), (3)과 달리 한 명을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분 논변은 (1)과 (2), (3)의 차이를 잘 설명하는 듯 싶다가도 (6)이 등장하자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구분 논변 또한 트롤리 문제가 제기하는 도덕적 허용가능성의 퍼즐을 해결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트롤리 유니버스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이중결과의 원리(Doctrine of Double Effect)
어떤 경우에는 다섯 명 대신 한 명을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허용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즉, 도덕적 허용가능성의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씨름해온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도덕적인 행위가 무엇인지를 그 행위가 산출하는 결과를 가지고 판단하고자 하는 단순한 형태의 결과주의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2), (3)에서 보았듯이,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죽이는 것이 허용가능하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행위의 방식에 주목하여 이 문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구분 논변도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구분 논변은 죽이는 것이 죽도록 놔두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죽는 것과 죽도록 놔두는 것 사이에 별다른 도덕적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경우도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것이 허용가능하다고 보여지는 사례까지 존재합니다. (6)이 바로 그런 사례였죠.
도덕 판단의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결과도, 방식도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요? 아직 고려하지 않은 선택지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행위자의 의도(intention)입니다. 같은 행위이더라도 행위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행위에 나아갔는지에 따라 도덕적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는 매우 흔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살인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살인, 즉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요. 그렇다면 트롤리 유니버스에서 빠져나오는 열쇠 또한 의도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의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호소하는 논변이 바로 이중결과의 원리(Doctrine of Double Effect)라 불리는 도덕 원칙입니다. 이중결과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중결과의 원리의 요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가 바로 전술 폭격(tactical bombing)과 무차별 폭격(terror bombing)입니다. 전술 폭격은 상대 국가의 군사 기지나 군수 공장 등 군사 시설을 폭격하여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시키는 폭격 방식입니다. 이때 군사 시설이 도심에 위치해 있다면 전술 폭격은 상당한 민간인 피해를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반면 무차별 폭격은 군사 시설과 민간 지역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 폭격을 실시하여 최대한의 사상자를 발생시킴으로써 상대 국가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고 전쟁 종식을 앞당기려 하는 폭격 방식입니다.
전술 폭격과 무차별 폭격은 둘 다 전쟁의 종식이라는 좋은 결과를 의도한다는 점에서 같지만, 전자는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한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이중결과의 원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전술 폭격에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는 좋은 결과에 수반하여 발생할 것으로 예견되는 나쁜 결과일 뿐이지만, 무차별 폭격에서는 민간인 피해가 바로 그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의도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전술 폭격은 군사 시설을 타격함으로써(수단)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시키고 전쟁을 끝내려는(좋은 결과) 행위로서 민간인 피해는 그 실행 과정에서 단지 예견될 뿐이지만, 무차별 폭격은 민간인 시설에 피해를 입힘으로써(수단) 전쟁 의지를 꺾고 전쟁을 끝내려는(좋은 결과) 행위로서 민간인 피해는 수단으로 의도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무차별 폭격은 전술 폭격과 다르며, 따라서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트롤리 문제로 돌아오면, 이중결과의 원리는 (1), (6)이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한 반면 (2), (3)은 그렇지 않다는 우리의 도덕적 직관을 완벽하게 설명합니다. (1), (6)에서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한 인부 한 명의 죽음은 예견된 나쁜 결과일 뿐, 다섯 명을 살리는 좋은 결과의 수단으로 의도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2), (3)에서 A와 인부의 죽음은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한 수단이자 의도된 나쁜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중결과의 원리에 따라, (1), (6)에서 한 명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하지만 (2), (3)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설명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1), (6)의 경우,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의 죽음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왼쪽 트랙에 한 명의 인부가 묶여 있지 않았더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구독자님은 스위치를 누르거나 레버를 당김으로써 아무런 희생자도 발생시키지 않고 다섯 명을 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이와 같이 (1), (6)에서 한 명의 죽음은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 아니라, 한 명이 운 나쁘게도 거기 묶여 있었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발생한 나쁜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2), (3)은 다릅니다. (2), (3)에서 행위자들은 그 한 명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미치광이 과학자는 A를 죽여야만 다섯 명의 환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샤일록처럼 죽이지 않고 심장만 꺼낼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죠). 구독자님은 뚱뚱한 남자를 죽여야만 다섯 명의 인부를 살릴 수 있습니다. 만약 A나 뚱뚱한 남자가 없다면 다섯 명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2), (3)에서 한 명의 죽음은 다섯 명의 생존이라는 그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하여 의도된 수단입니다. 전술 폭격단은 민간인 피해를 입히지 않더라도 의도한 좋은 결과(전쟁 종식)를 달성할 수 있는 반면 무차별 폭격단은 민간인 피해를 입혀야만 좋은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의 빛이 보입니다. 이중결과의 원리는 (1)부터 (6)까지 지금까지 제시된 모든 트롤리 문제들을 완벽하게 해결합니다. 열쇠는 행위의 결과도, 방식도 아닌, 행위자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는 트롤리 유니버스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중결과의 원리에 대한 반론
... 잠깐만요. 이중결과의 원리가 모든 트롤리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다구요? 아시잖아요. 아직 속단은 이르다는 것을요. 철학에서 해피엔딩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되니까요.
이중결과의 원리가 과연 타당한지 검증하기 위해, 트롤리 문제의 기출변형을 딱 하나만 더 살펴보도록 합시다.
구독자님은 레버를 당기시겠습니까? 이 사례에서는 "레버를 당겨야 한다"는 것이 직관적인 답변일 겁니다. 이 사례는 트랙의 모양만 다를 뿐 (6)과 사실상 동일한데, (6)의 경우에도 한 명을 희생하여 다섯 명을 살리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했으니까요.
문제는 (6)과 (7)이 아주 핵심적인 부분에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중결과의 원리에 따르면 (6)의 경우 한 명의 죽음이 수단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합니다. 그러나 (7)은 다릅니다. (7)에서는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뚱뚱한 남자의 죽음이 꼭 필요합니다. (7)에서 뚱뚱한 남자가 없는 경우를 상정해 봅시다. 트롤리는 q자 트랙의 반원형 트랙을 돈 뒤 다시 직진 트랙으로 진입해 반대 방향(아래쪽 방향)으로 계속 진행할 것입니다. 그러면 다섯 명의 인부는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요. 다시 말해 (7)은 (6)이 아니라 (2), (3)과 구조적으로 동일합니다. 뚱뚱한 남자는 다섯 명의 죽음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며, 그의 죽음은 단순히 예견된 결과가 아니라 의도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이중결과의 원리에 따르면 구독자님은 레버를 당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도덕적 직관에 정면으로 반하는 불합리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지요. 결국, 이중결과의 원리도 트롤리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이중결과의 원리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중결과의 원리는 행위자의 의도에 따라 도덕적 허용가능성을 달리 판단하는 원칙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행위자의 의도가 전혀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다음의 사례를 검토해 봅시다.
공군성 장관은 루드윅을 구독만 해놓고 제대로 읽지 않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X안과 Y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결과가 똑같다면, 단지 공군성 장관의 의도가 다르다는 이유로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도덕적으로 더 허용가능하다고 볼 이유는 전혀 없는 듯합니다. 이어서 다음의 사례도 검토해 봅시다.
(8)의 X안, Y안과 마찬가지로, (9)와 (10) 또한 행위자인 C, D의 숨은 의도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동일합니다. 만약 이중결과의 원리가 전제하는 것처럼 의도가 행위의 도덕적 허용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면, C의 행위와는 달리 D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하지 않다고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매우 이상합니다. D의 행위는 C의 행위만큼이나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D의 의도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D가 약물 주입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위자의 의도는 도덕적 비난(moral blame)을 가할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도덕적 허용가능성의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행위자의 의도를 도덕적 허용가능성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이중결과의 원리는 타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아직도 우리는 트롤리 유니버스에 갇혀 있습니다. 결과주의, 구분 논변, 이중결과의 원리까지,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는데도 탈출은 요원해 보입니다. 물론 최대의 피해자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살인을 강요당하는 불쌍한 트롤리 운전사입니다. 트롤리 문제가 처음 철학계에 등장한 것이 1967년이니 벌써 거의 60년째입니다. 이쯤되면 그가 이성을 잃고 트롤리 핸들을 꺾어 청와대로 돌진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입니다.
트롤리 하나로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일견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트롤리 문제는 사실 우리의 공적 생활과도 매우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현실 세계의 도덕적 쟁점들은 트롤리 문제처럼 언제나 상충하는 도덕적 가치들의 딜레마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낙태를 허용하여야 할까요? 낙태는 한쪽 트랙에 산모의 삶, 다른 쪽 트랙에는 태아의 생명이 묶인 트롤리 문제와도 같습니다. 임박한 테러 공격을 막기 위해 테러범의 가족에 대한 고문을 허용하여야 할까요? 한 쪽에는 트롤리 문제의 직진 트랙처럼 다수의 시민의 생명이 걸려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왼쪽 트랙처럼 무고한 한 명의 희생자가 묶여 있습니다. 자율주행차가 다섯 명과 한 명을 들이받아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무엇을 도덕 판단의 기준으로 삼도록 알고리즘을 설계해야 할까요?
그러므로, 트롤리 문제가 아무리 어렵고 답답하고 이상하더라도, 우리는 트롤리 문제가 던지는 철학적 물음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지적 자산, 즉 합리성과 이성, 비판적, 논증적 사고, 그리고 논리와 철학적 분석의 도구들을 활용하여 어려운 문제들을 정면으로 강행 돌파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그 지적 여정에, 루드윅은 든든한 길동무가 되겠습니다.
더 읽을거리
트롤리 문제는 철학자 필리파 풋이 「낙태와 이중결과의 원리 Abortion and the Doctrine of Double Effect」라는 1967년의 논문에서 처음 제시하였습니다. 이후 수많은 철학자들이 트롤리 문제와 씨름하면서 여러 가지 변형을 가하였는데, 논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은 주디스 자비스 톰슨입니다. 톰슨의 「트롤리 문제 The Trolley Problem」, 「죽이기, 죽게 놔두기, 그리고 트롤리 문제 Killing, Letting Die, and the Trolley Problem」등의 논문들이 트롤리 문제와 관련된 쟁점들과 톰슨 나름의 논변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편, 보다 최근에 출간된 문헌으로 팀 스캔런의 책 『도덕의 차원들 Moral Dimensions』을 추천합니다. 이 글에서 다뤄진 이중결과의 원리에 대한 비판은 상당 부분 톰슨과 스캔런의 문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번역 상태가 고르지 못한 편입니다. 스캔런은 글을 쉽고 명료하게 쓰는 편이므로 영어에 크게 거부감이 없다면 원서를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교양서로는 토머스 캐스카트의 『누구를 구할 것인가?』가 트롤리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법정 드라마의 형식으로 전개되는 재미있는 책입니다. 논문이나 학술서까지는 아니더라도 보다 학술적인 접근을 원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 마땅한 책이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윤리학 일반에 관한 입문서는 많은데 트롤리 문제와 같이 응용윤리에 가까운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개론서는 제가 아는 한에서는 없습니다. 좋은 책을 알고 계시면 제게도 추천 부탁드립니다. 본문에서 센델을 언급하긴 했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는 트롤리 문제에 관한 참고문헌으로는 별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스탠퍼드 철학 백과의 관련 항목들을 시작점으로 삼는 것이 좋습니다. 「The Doctrine of Double Effect」과 「Doing vs. Allowing Harm」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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