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는 왜 그럴까?
사우디 아라비아의 파격적인 e스포츠 투자가 화제가 된 지난 2023년 초, 필자는 이런 영상을 제작한 바 있다. 이 때 분석한 내용은 사우디가 네옴시티 등의 프로젝트로 석유 시대 이후를 대비하고 있고, 종교의 한계를 넘어 젊은 세대를 '친사우디'로 만들기 위해 게임과 e스포츠를 공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사우디는 Esports World Cup이라는 대회를 발표했고, 올해(2024년) 7월부터 8월까지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서 정말 대회가 열린다. 총 상금 규모는 6천만 달러(한화 약 830억)에 달하고, 선정된 종목만 해도 총 21개에 달한다.
<리그오브레전드>, <도타 2>, <스타크래프트 2>, <카운터 스트라이크 2>, <오버워치 2>, <스트리트 파이터 6>, <철권 8>, <로켓리그>, <배틀그라운드>, <레인보우 식스 시즈>, 동남아 최고의 인기 종목 <모바일 레전드 : BangBang> 등 지구상에서 e스포츠 대회가 계속 열리고 있는 종목은 거의 다 모은 것 같다. 발로란트는 아직까지는 없다.
사실, 지난해 4월 영상을 만들면서 사우디 국부 펀드가 새비게임즈그룹을 만든 뒤, 유럽의 e스포츠 대회 운영, 제작사인 ESL을 인수했고, 블리자드, EA, 닌텐도, 넥슨, NC소프츠 등 다양한 게임사의 지분을 확보했으며, Gamers8이라는 대회를 준비 중이라고 전한 바 있다.
실제로 Gamers8은 나름대로 잘 진행되었다. 출전한 팀들은 단기간에 상당히 좋은 상금을 얻었고, ESL을 활용한 대회 운영과 방송 제작은 아마추어의 것은 아니었다.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2> 같이 제작사가 e스포츠에 대한 의지를 잃은 종목의 경우, 사우디의 오일머니는 해당 게임의 선수들과 팬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런 Gamers8이 더 큰 자본과 더 많은 종목, 더 많은 스타 플레이어, 스타 프로게임단과 함께 EWC로 거듭났다. <리그오브레전드>의 경우는 EWC를 위해 지역 대회의 일정을 조정하기도 했는데, 마치 월드컵 시즌에 전 세계 축구 리그들이 일정을 조정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EWC가 얼마나 성공적인 대회로 기록될지는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지난 Gamers8도 대단한 규모의 대회였지만, 의외로 엄청난 Buzz를 일으키진 못했다. 국가, 언어별 생중계 지원도 부족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리그오브레전드 종목이 없었기 때문에 더 큰 화제가 되진 못했다.
이번엔 다르다? e스포츠 월드컵
2022년과 2023년의 Gamers8을 치르고 3년차를 맞이하고 있는 사우디의 e스포츠 투자. 이번엔 분위기가 살짝 다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리그오브레전드>가 정식 종목이 된 뒤 T1, Gen.G의 출전이 확정되었고, 올해 출시한 <철권 8> 역시 8명의 인기 한국 선수가 출전하면서 관심이 높아졌다. <스타크래프트 2>에서도 조성주, 박령우, 김도욱, 고병재 등의 출전이 확정되었다.
지난 5월에는 사우디 e스포츠 연맹 회장과 새비게임즈그룹 대표이사가 서울을 찾아 "한국 게임 업계와 파트너십을 확대하겠다"며 "EWC를 매년 개최해 글로벌 e스포츠 생태계의 일원으로 자리 잡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명실상부 최고의 글로벌 e스포츠 대회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한국 선수들과 팬덤의 적극적인 호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너무 국뽕 넘치는 해석이었다면 죄송하다...
아무튼 이제 판은 깔렸고, 전세계 각지에서 선수들이 출전하는 만큼 다양한 국가별, 언어별 생중계만 잘 지원이 된다면 EWC가 정말 축구의 월드컵처럼 전세계 e스포츠 팬들을 아우를 수 있는 대회가 될지도 모른다.
일단, 올해 EWC가 작년 Gamers8보다 더 잘 될 가능성은 높다. 수억, 수십억의 상금을 가져갈 프로게이머, 프로게임단이 누구일지 관심이 모아질거고, T1이나 Gen.G, G2, BLG 등 인기 팀들의 경기는 꽤 흥행할 것이다.
EWC의 미래? 문제는 지속가능성
지속가능성은 e스포츠에서 중요한 아젠다이다. e스포츠 중 가장 규모와 팬덤이 크고, 지역대회-국제대회 시스템이 가장 잘 연계 되어 있는 <리그오브레전드>조차 게임단들은 적자 운영을 호소하고 있고, 게임사 역시 이렇다 할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라이엇게임즈는 이미 지난 2023년에 발행한 공식 Article을 통해서 e스포츠는 기성 스포츠와 달리 '중계권 수익'을 내는 것이 불가능하고, '버추얼 패스'라는 개념을 통해 인게임과 e스포츠를 연결한 형태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실 대단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도타 2>는 물론 라이엇게임즈의 다른 IP인 <발로란트>에서도 이미 활용하고 있는 시스템이다. 다만 이 당시 발표에서는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을 특정 대회 기간 때 이벤트처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구매자들에게 새로운 시청 경험, 한정 콘텐츠 등을 제공하면서 상시 운영되는 패스로 구상 중이라는 점이 새롭긴 했다. 물론, 아직 시작되진 않았다.
아무튼, 진짜 하고 싶은 말은 e스포츠라는 산업, 비즈니스는 기본적으로 '돈을 벌기 어렵다'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중계는 무료로 제공되고 있고, 방송 제작, 상금, 선수 케어 등 운영 비용이 크다. 그에 비해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은 스폰서십이 거의 유일하다. 시청자나 관객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유료 시청이나 티켓 판매 수입은 거의 없거나, 소소한 정도다.
이런 특성은 EWC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지금이야 사우디 국부펀드가 돈을 들이고 있지만, 매년 천억이 넘는 돈을 영원히 지속적으로 지출할 수 있을까? 쓰는 만큼 벌지 못한다면 사우디가 그리는 e스포츠와 EWC의 지속가능성에 확실하게 'Yes'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전세계에서 선수들을 끌어 모으고 있고, 게임사들도 큰 거부감 없이 종목사로 참가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지속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있다.
WCG의 사례
사실 EWC 같은 대회가 대단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중반 WCG, ESWC 같은 대회가 있었고, 새비게임즈에게 인수되어 Gamers8에 이어 EWC의 주축 운영사가 된 ESL도 IEM 등 다양한 국제 대회를 열어왔다.
그 중에서도 WCG는 한 때 'e스포츠의 올림픽'으로 불렸다. 프로게임단이 아니라 국가대표들이 출전했고, 삼성전자라는 든든한 스폰서(사실상 삼성전자 소유)도 있었다. 2000년부터 2013년까지 매년 세계 주요 도시를 돌며 성공적으로 대회를 개최했었다. 현재 WCG는 스마일게이트가 상표권을 인수해 다시 주최하고 있지만, 과거의 규모와 명성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2013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 (구)WCG는 실적 악화를 겪었던 삼성전자의 경영전략이 바뀌면서 폐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다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WCG는 기본적으로 삼성전자의 홍보/마케팅의 목적이 강했다. 쉽게 말해 돈을 벌기보다는 쓰기 위한 대회였다는 뜻이다. 이 당시 e스포츠는 말그대로 공짜라는 인식이 지금보다 더 강했고, 대회를 통한 수익은 참여하는 스폰서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번다'는 목적이 불명확했으므로 '벌기 위한 방법'에 대한 고민도 적었다.
또한 WCG가 진행되면서 e스포츠를 대하는 게임사들의 입장도 바뀌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는 e스포츠가 워낙 새로운 것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블리자드를 시작으로 '특정 e스포츠는 종목 게임사의 것'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리그오브레전드 출시 이후 라이엇게임즈는 서서히 롤드컵을 정점으로 한 지역대회 / 국제대회 구조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는 즉, WCG가 정식 종목을 유치하고,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해 출전 선수를 뽑는 방식을 유지하기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게임사가 WCG에 참여하는 것이 큰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면, WCG 입장에서는 마땅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임사에게 그에 상응하는 비용적인 보상을 하고, 종목을 유치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돈을 못 버는 대회가 그런 지출을 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도 어렵다.
이런 WCG의 사례는 EWC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사우디 국부펀드라는 든든한 백은 WCG의 백이었던 삼성전자보다 더 크고 안정적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돈을 쓰는 대회', '게임사들이 참여해야 하는 대회'라는 점에서 구조는 거의 비슷하다. 즉, EWC는 과거 WCG와 같은 숙제를 갖는다는 뜻이다.
EWC의 해법은 무엇일까?
EWC 역시 매년 개최가 되면 될수록 지속가능성에 대한 도전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우디 국부펀드의 무한하고 영원한 지원이 약속되어 있다면 안 그래도 되겠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나는 언젠가 EWC도 '수익화', '자립'의 숙제를 풀 때가 올 것으로 생각한다.
수익화를 위해서는 스폰서십, 관련 상품 판매 등 기존 스포츠 국제 대회들이 하고 있는 방법을 그대로 따른다쳐도, 중계권료 수입을 기대하기 어렵다. 어떻게든 중계권료 수입을 발생시킨다 해도, 기본적으로 해당 종목에 대한 IP 소유자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승인이 필요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수익을 나눠야 할 것이다.
그래도 EWC가 WCG와 다른 점은, 사우디 국부펀드와 새비게임즈그룹이 게임사들의 지분을 획득하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게임회사를 인수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IP 확보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이야 라이엇게임즈, 밸브, 블리자드 등 주요 e스포츠 종목사들의 몸집이 상당히 크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이 대세가 되는 게임산업의 특징을 보면 사우디와 연결된 게임사들이 좋은 e스포츠 종목을 개발할 수도 있다. 반대로 EWC의 영향력을 직접 개발한 게임을 글로벌 대세 종목으로 키우려는 시도 또한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돈 버는 e스포츠 대회'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분석했다면, EWC의 전략은 게임사 인수를 통한 직접적인 IP 확보 쪽에 가깝지 않나 싶다. 그 동안 수많은 오일부자들이 EPL 등 유럽 축구단을 인수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슈퍼팀으로 만들었던 것과 유사한 '슈퍼 울트라 리치들의 전략'이 아닐까 싶다.
정리하자면, EWC는 흥미롭다. 올해 열릴 첫 대회가 얼마나 흥행할지도 흥미롭고, 이들이 앞으로 어떤 로드맵을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시킬지도 지켜볼 만하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EWC를 앞세운 사우디 e스포츠가 막강한 재력과 추진력을 통해 이미 괴수 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주목하지 않으려고 해도 주목할 수 밖에 없는 거대한 발걸음이랄까. 앞으로 EWC의 행보는 계속 지켜볼 예정이다.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