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아파트 신화’로 유명한 대치동, 그곳의 한 아파트에서 지난 3월 70대 경비원 박모씨가 투신해 사망했습니다. 이 경비원이 남긴 유서에는 ‘죽음으로 끌고가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아파트 관리소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쓰여있었어요. 이 아파트에서 10년 간 일하며 경비대장을 맡기도 했던 박씨가 죽음으로 내몰리자, 동료 경비원들 모두가 모여 규탄 시위를 열었습니다. 몇몇 경비원은 갑질과 부당 지시를 호소하며 사직서를 내기도 했고요. 박씨의 동료들은 관리소장 A씨가 “70살 넘는 영감들한테 군대식으로 인격적인 모독을 줬다”고 말했어요.
관리소장 A는 박씨와 동료들에게 복명복창(군대에서 상급 지휘관의 명령을 반복해 소리치는 것)을 시키고, 목소리가 작다며 구박했다고 전해졌습니다. 관리소장은 경비원들과 소속회사가 달라 인사권이 없는데도 박씨를 부당하게 강등시켰대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2차 하청업체 통해 간접고용,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사각지대
요즘 아파트들은 대부분 관리업체에게 아파트 관리를 위탁합니다. 관리업체는 또 용역업체에게 재하도급으로 경비업무를 맡기고요. 경비원들은 용역업체와 근로계약을 맺지만, 일터에서는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관리업체, 용역업체 세 곳의 눈치를 모두 봐야 하는 위치에 있어요. 세 곳이나 되는 갑(甲)들이 경비원의 일자리를 좌지우지할 수 있거든요.
다르게 말하면, 고용주가 아니라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며 일을 시키고 경비원들을 압박할 수 있는 구조인 거예요. 사망한 박씨를 괴롭혔다고 알려진 관리소장도 그냥 ‘다른 회사 직원’이었어요. 노동 전문가들은 같은 회사 직원에게 갑질을 당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감정노동자 보호’ 규정도 있으나마나
또한 다단계 하청 구조 속에서 간접고용된 경비원은 ‘고객의 폭언’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합니다. 경비원의 고객은 아파트 입주민인데요, 여러분 모두 경비원이 아파트 입주민으로부터 갑질을 당했다는 뉴스를 여러 번 접하셨을 거예요. 경비원 앞에서 자녀에게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된다”고 말하고, 현금을 상납하지 않으면 악성민원을 넣겠다고 협박하고, 개처럼 짖어보라 요구하며 얼굴에 침을 뱉고, 심지어는 무차별 폭행을 가하는 사례도 보도됐잖아요. 약자를 골라 괴롭히는 악성 고객으로부터 회사가 노동자를 보호해줄 순 없을까요?
산업안전보건법은 고객응대근로자가 고객으로부터 갑질을 당했을 때 사용자가 업무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거나 전환하는 등의 보호조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요, 경비원들의 사용자인 용역업체는 원청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해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데 관심이 없어요.
경비원이 피해를 당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경비원을 내보내는 거죠. 해고하는 노력까지 들이지 않아도 된답니다. 초단기로 맺은 근로계약이 만료된 후 더이상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되거든요.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피해자가 직장을 잃는 부당한 일,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3개월 단위로 계약하며 갑질에도 ‘찍소리’ 못하게
3개월 단위로 쪼개진 계약기간은 경비원들을 더 취약하게 만드는 하나의 수단이에요. 사망한 경비원 박씨가 일했던 아파트의 경비원들도 3개월 단위로 근로계약을 맺고 있었죠. 지역별로 편차가 크긴 하지만, 보통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22%가3개월 이하로 근로계약을 체결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초단기 근로계약을 반복해도 불법이 아니거든요. 회사가 계약연장을 빌미로 근로자를 부당하게 부리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기간제법은 비정규직 근로자를 2년 이상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요, 55세 이상의 계약직 근로자는 보호 대상이 아니에요.
경비원들이 부당한 지시에 대응하려고 하면 ‘재계약 기간이 며칠 안남았다’는 압박으로 경비원들을 순응하게 만듭니다. 경비원들은 ‘불평이라도 하면 바로 잘린다’고 말해요. 입주민이나 원청업체로부터 갑질을 당해도 호소조차 하기 어려운 거예요. 고령이라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우니 속으로 삭히기만 하게 되죠.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누구나 부당한 일에 노출될 수 있지만,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위치라는 점이 상처를 회복하기 어렵게 만들어요.
관리사무소·입주민 갑질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돼야 한다
고객갑질과 원청갑질에 다중으로 노출된 경비 노동자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요? 일단 경비원들이 당하는 갑질이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경비원의 고용유지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탁관리업체와 입주민이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했을 때 피해자가 보호조치를 받을 수 있어요. 직장내 괴롭힘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근로자에게 불이익을 주면 처벌받기 때문에 지금보다는 피해를 적극적으로 호소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응력이 생깁니다.
실효성 없는 ‘경비원 갑질 방지법’을 강화하라
2020년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이던 최희석씨가 입주민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다못해 자살한 이후 ‘경비원 갑질 방지법’이 제정되었는데요, 현장에선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해요. 공동주택관리법에 아파트 입주자가 경비노동자에게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있지만, 폭언이나 폭행을 했을 때 처벌조항이 없어 부실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이 법 자체가 300세대 미만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적용되지 않는 문제도 있고요. 사각지대를 없애고 처벌규정을 신설해 경비노동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기 계약 근로 관행 사라지도록… 인센티브 필요
위에서 3개월 단위의 초단기 근로계약이 고령의 노동자들을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같은 관행을 없애기 위한 유인책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고령자를 고용하거나 고령자의 고용을 유지한 아파트에 지방자치단체가 지원금을 주는 방법이 있어요. 영세업체를 지원하는 정부의 일자리 안정자금에 ‘근로계약 기간 1년 이상’과 같은 조건을 두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있는 경비노동자들의 고용상태가 안정되면 지금보다 취약성이 낮아지게 될 거예요.
40년 동안 이어져온 경비원의 기본권 침해
언론보도를 찾아보니 아파트라는 주거형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경비원들은 고통받고 있었어요. “그들은 수천명 입주자를 상전으로 모셔야 한다…인간적인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경향신문 1982년 3월 22일자 보도)” 지난 40년 간 아파트 관리 업계는 경비원들의 취약한 위치를 이용해 굴러가고 있었던 겁니다.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저서에서 우리나라 경비원들을 ‘저임금의 하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어요.
“경비복만 입으면 사람 아닌 취급을 받는다”는 경비노동자들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그저 같은 사람으로 대접해달라는 거예요. 입주민들은 경비원에게 지불한 금액 만큼의 노동력을 산 것이지 인격을 산 게 아니잖아요. ‘내 돈 주고 고용한 경비원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바탕을 둔 갑질, 이제는 사라지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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