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립의 값비싼 청구서

전 세계에 불어닥친 자립의 압박, 청구서 감당가능?

2026.07.24 | 조회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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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lue

모두가 홀로 서려 한다

우리는 조용히 모순 하나를 품고 있다. 강대국이 기술과 자본으로 약소국을 옭아매는 구조를 비판한다. 소버린 AI를 응원하고, 기술 신식민주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 동시에 세계가 조각조각 쪼개지는 파편화를 걱정한다. 자립은 옳은데 파편화는 위험하다. 이 둘은 같은 현상의 다른 이름 아닌가.

나는 지금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걸까.

2026년 여름, 세계의 헤드라인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유럽은 스스로 무장한다. 2014년에 국방비를 GDP의 2% 이상 쓰던 NATO 회원국은 셋뿐이었다. 2026년에는 전 회원국이 그 선을 넘었고, 목표선은 이미 5%로 올라가 있다. 중국은 엔비디아에서 벗어나려 한다. AI 기업 딥시크가 자체 추론용 칩 개발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온 날, 서울 증시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나란히 6~7% 밀리며 코스피가 5% 가까이 빠졌다. 실적 실망이 겹친 날이긴 했지만, 시장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분명했다. 우크라이나는 로봇과 드론으로 자국 방위를 자동화한다. 그리고 이 모든 '홀로 서기'를 자본이 뒤쫓는다. 올 1분기 방산 스타트업 벤처 투자는 198억 달러로 사상 최대를 찍었다. 그런데 투자 건수는 오히려 줄었고, 그 돈의 88%가 후기 단계 몇 곳으로 갔다. 돈이 넓게 퍼진 것이 아니라 한곳으로 몰린 것이다.

이 문단의 고유명사들은 곧 낡을 것이다. 딥시크 자리에 다른 기업이 들어설 것이다. 그러나 무늬는 남는다. 모두가 남에게 기대지 않으려 한다는 무늬, 그리고 그 결심이 뜻밖의 청구서를 남긴다는 무늬다. 이 글이 붙잡으려는 것은 이번 여름의 사건이 아니라 그 무늬다.

각각의 뉴스는 합리적으로 보인다. 남의 손에 목숨줄을 맡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그런데 같은 신문의 경제면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 자립을 좇는 돈이 이미 거품 경고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방산 붐은 이미 거품이거나 곧 거품이 된다는 진단이 나왔고, 거품이 맞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방산 스타트업 안두릴의 CEO였다. 이 붐의 최대 수혜자 본인이다.

이 글은 그 모순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푸는 열쇠가 의외의 곳에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한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이렇다. 문제는 자립의 양이 아니라 형태다.

상호의존은 평화를 보장한 적이 없다

자립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는 믿음이 하나 있다. 나라들이 서로 얽혀 장사를 하면 전쟁은 손해라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그리고 역사가 이미 한 번 시험했다.

1910년, 노먼 에인절은 『거대한 환상』에서 바로 그 주장을 폈다. 유럽 경제가 이토록 촘촘히 연결된 이상 전쟁은 승자에게도 남는 것이 없는 어리석은 짓이 되었다는 것이다. 책은 널리 읽혔고 그의 논리는 반박하기 어려워 보였다. 4년 뒤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상호의존은 유럽을 평화로 묶어두지 못했다. 얽혀 있다는 사실 자체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대편, 자립이 답일까. 역사의 다음 장이 그 답도 지운다. 1930년대, 대공황이 세계를 덮치자 각국은 자기 블록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영국은 제국특혜관세로, 독일은 광역경제권으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으로 쪼개졌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석유와 고무와 철을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는 자립의 강박이 곧 영토 팽창의 명분이 되었다. 일본이 동남아로 밀고 내려간 것도 미국의 석유 금수에 맞선 '자립' 논리였다. 방어에서 시작한 자립이 침략으로 끝나는 경로가 거기 있었다.

한쪽에는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 상호의존이 있고, 다른 쪽에는 전쟁으로 이어진 자립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얽힐 것이냐 홀로 설 것이냐가 아니다. 같은 상호의존이 어떤 때는 평화의 닻이 되고 어떤 때는 전쟁의 방아쇠가 된다면, 그 차이를 만드는 다른 변수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수준이 아니라 기대의 형태다

국제정치경제학자 데일 코플랜드가 2015년 『경제적 상호의존과 전쟁』에서 내놓은 답이 이 지점을 정확히 겨눈다. 그는 자유주의자와 현실주의자가 오랫동안 벌인 논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상호의존이 평화를 부른다는 자유주의자도, 갈등을 부른다는 현실주의자도 각각 옳았다. 다만 둘 다 변수 하나를 빠뜨렸다. 그 변수는 상호의존의 수준이 아니라, 미래의 무역 환경에 대한 각국의 기대다.

논리는 이렇다. 앞으로도 교역이 계속 이어지리라 낙관하는 나라는 전쟁을 피한다. 평화를 지켜야 그 이익을 계속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상호의존은 평화의 닻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곧 그 문이 닫히리라 비관하는 나라는 정반대로 움직인다. 잘릴 것이 뻔한 자원과 시장이라면, 목이 졸리기 전에 힘으로라도 확보하는 편이 합리적이 된다. 바로 그 순간 상호의존은 전쟁의 원인으로 뒤집힌다. 1930년대 일본이 석유 금수 앞에서 남방으로 향한 것이 이 논리의 교과서적 사례다.

여기까지 오면 오늘의 풍경이 다르게 보인다. 세계에 비관적 기대를 가장 대량으로 공급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수출통제와 제재의 확산이다. 미국이 반도체 설계와 첨단 장비의 문을 하나씩 닫을 때마다, 그 문에 의존하던 나라들은 곧 완전히 끊길 것이라는 신호를 받는다. 딥시크가 자체 칩으로 향한 것은 돌발이 아니라 그 신호에 대한 지극히 합리적인 반응이다. 상업평화의 조건이 능동적으로 전쟁의 조건으로 뒤집히는 과정이, 지금 기술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다.

자립이 비싼 두 가지 이유

그래서 자립 경쟁은 무엇을 청구하는가. 청구서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항목으로 나뉜다.

첫째는 효율의 손실이다. 세계화가 지난 30년간 값싸게 공급하던 것들을 이제 각국이 제 손으로 다시 만든다. 나라마다 자기 반도체 공장을 짓고, 공급망을 둘로 겹쳐 깔고, 만약을 대비해 재고를 쌓는다. 중복 투자와 이중화가 쌓이면 물가의 바닥이 구조적으로 높아진다. 세계화가 안겨준 평화배당을 거꾸로 반납하는 셈이다. 이 비용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모두의 지갑에서 조용히 빠져나간다.

둘째는 더 위험하다. 안보 딜레마라 불리는 함정이다. 한 나라가 순수하게 방어를 위해 무장하고 자원을 확보해도, 국경 너머의 이웃에게는 그것이 위협으로 읽힌다. 위협을 느낀 이웃도 무장한다. 그러면 처음 나라는 자기 판단이 옳았다고 확신하며 더 무장한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는데 나선형으로 군비가 치솟는다. 오늘의 NATO 재무장과 방산 벤처 붐은 이 나선의 초기 신호일 수 있다.

바로 이 두 번째 항목이 앞서 던진 독자의 모순을 풀 열쇠를 쥐고 있다. 왜 방어적 자립과 공격적 블록화가 그토록 구분하기 어려운가. 정치학자 헨리 파렐과 에이브러햄 뉴먼이 무기화된 상호의존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구조가 그 배경에 있다. 세계를 잇는 연결망 자체가 이미 무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달러 결제망과 반도체 설계와 클라우드 같은 길목을 쥐고 있고, 그 길목은 언제든 상대의 목을 조르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 이 구조 안에서 약소국이 자립을 추구하는 것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다. 목줄을 쥔 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종속에서 빠져나오려는 시도다.

그러니 기술 신식민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이 지지하는 것은 파편화가 아니다. 탈종속이다. 독자가 느낀 모순은 여기서 풀린다. 문제는 방어적 자립과 공격적 블록화가 겉으로는 똑같아 보인다는 데 있고, 바로 그 식별 불가능성이 안보 딜레마를 낳는다. 두 개의 자립은 이름이 같지만 형태가 다르다.

나쁜 파편화와 좋은 파편화

여기서 정직하게 반대편 목소리를 들여야 한다. 파편화가 곧 불안정이라는 등식은 자동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다.

세계가 단 하나의 길목에 다 같이 매달려 있던 것이야말로 위험했다는 것이다. 유럽 전체가 러시아 가스 하나에 난방을 걸었고, 세계 첨단 반도체가 대만 한 곳에 몰렸고, 희토류 정제가 중국에 집중됐다. 그 단일 의존이 실제로 무기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다면 공급처를 여럿으로 늘리고 재고를 이중화하는 것은 취약성을 줄이는 회복탄력성의 전략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어느 정도의 파편화는 병이 아니라 백신이다.

그래서 진짜 질문은 자립이냐 세계화냐가 아니다. 파편화의 형태다.

여기서 정치학의 오래된 구분 하나를 빌려오려 한다. 빌려오기 전에 밝혀둘 것이 있다. 이 구분은 원래 한 사회 안쪽의 갈등을 설명하려고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을 국가와 국가 사이로 옮기는 일은 학계의 정설이 아니라 이 글의 제안이다. 빌려온 자리에 표시를 해두고 가겠다. 판단은 읽는 분의 몫으로 남는다.

사회를 가르는 균열선들이 서로 어긋나게 겹치면 그 사회는 안정된다. 종교로는 갈라져도 계급으로는 섞이고 지역으로는 또 다르게 나뉘면, 어느 한 선이 사회 전체를 두 편으로 쪼개지 못한다. 이것을 교차 균열이라 부른다. 반대로 모든 균열선이 한 방향으로 정렬되면, 즉 종교도 계급도 지역도 전부 같은 선을 따라 갈라지면, 사회는 두 개의 적대 진영으로 굳는다. 이것이 강화 균열이고, 양극화와 폭력이 자라는 토양이다.

이 구분을 국가 층위에 올리면 오늘의 지형이 선명해진다. 한 나라의 상호의존이 여러 상대에 골고루 걸쳐 있으면, 그 관계망은 교차한다. 미국과도 얽히고 중국과도 얽히고 제3세계와도 얽힌 나라는 세계를 우리 편과 저편으로 단순하게 쪼갤 수 없다. 이해관계가 여러 진영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변화이고 프렌드쇼어링이 지향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모든 의존이 미국 블록 대 중국 블록이라는 단 두 편으로 정렬되면, 교차선은 무너지고 강화 균열이 된다. 그리고 그 구조가 바로 1914년과 1930년대의 구조다. 1차대전 직전의 유럽에도 상호의존은 있었다. 다만 그 상호의존이 이미 두 개의 동맹체제로 정렬되어 있었다. 얽혀 있었는데도 전쟁이 난 이유가 그것이다.

자립이라는 단일 정체성

여기까지가 지정학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구조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 느낌이 옳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2006년 『정체성과 폭력』에서 폭력의 제조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폭력은 사람을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할 때 만들어진다. 어떤 사람에게 "너는 무슬림일 뿐" 혹은 "너는 한국인일 뿐"이라고, 그의 존재를 한 겹으로 축소해버리면 외집단을 향한 적대가 폭발할 공간이 열린다. 반대로 한 사람이 여러 겹의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면, 즉 축구팬이자 부모이자 개발자이자 이웃이면, 그중 어느 하나도 적대의 축으로 굳어지지 못한다. 센은 이 위험한 축소를 단일 정체성의 환상이라 불렀다. 사회심리학이 사회정체성 복잡성이라는 이름으로 실증한 결론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겹치는 정체성이 많을수록 외집단에 대한 관용이 는다.

개인에게 참인 이 명제를 국가에 그대로 겹쳐보자. 여러 나라와 무역하고 공급망이 국경을 넘나드는 나라는, 세계를 우리와 저들로 단순화하지 못한다. 이해가 여러 진영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본 교차 균열의 다른 얼굴이다. 반대로 자립과 디커플링은 국가 차원의 단일 정체성이다. 하나의 블록, 하나의 공급망, 하나의 문명 서사로 자신을 환원하는 행위이고, 그래서 외집단 적대가 올라간다. 상업평화론과 센의 정체성론이 여기서 만난다. 개인이 자아를 하나의 굳은 정체성에 통째로 걸 때 혐오가 자라듯, 국가가 자립이라는 단일 서사로 자신을 환원할 때 세계는 두 블록으로 굳고 전쟁의 위험이 오른다.

물론 국가는 개인이 아니다. 개인의 심리가 국가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말이 아니라, 단일화가 적대를 키우고 복수화가 관용을 키우는 같은 논리가 두 층위에서 각각 작동한다는 말이다. 닮은 것은 마음이 아니라 관계망의 형태다.

그래서 처방도 같은 모양이 된다. 해독제는 정체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겹으로 늘리는 것이고, 국가에게 그것은 자립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의존을 여러 갈래로 교차시키는 것이다.

청구서를 읽는 세 개의 렌즈

이제 처음의 헤드라인으로 돌아가자. 재무장, 디커플링, 기술주권, 자체 칩. 이 단어들이 쏟아질 때 무엇이 좋은 자립이고 무엇이 위험한 블록화인지 어떻게 가릴 것인가. 이 글이 남기려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판별할 세 개의 렌즈다.

첫째, 교차인가 정렬인가. 이 자립이 의존을 여러 상대로 흩어 균열을 어긋나게 만드는가, 아니면 세계를 두 편으로 줄 세워 균열을 한 방향으로 굳히는가. 다변화는 안정으로, 블록화는 1930년대로 향한다.

둘째, 방어인가 확장인가. 이 자립이 목줄에서 벗어나려는 탈종속인가, 아니면 남의 목에 걸 새 목줄을 쥐려는 팽창인가. 둘은 겉모습이 같지만 향하는 곳이 다르다.

셋째, 낙관인가 비관인가. 이 자립이 앞으로도 교역이 이어지리라는 전제 위에 놓인 보험인가, 아니면 곧 문이 닫히리라는 비관 위에 세운 선제인가. 비관적 기대가 퍼질수록 상호의존은 평화의 닻에서 전쟁의 방아쇠로 돌아선다.

우리는 관찰자가 아니다

이 렌즈를 우리에게 대보면 어떨까. 한국은 이 이야기를 창밖에서 보는 나라가 아니다. 중국 회사가 자체 칩을 만든다는 보도 한 줄에 코스피가 5% 가까이 빠지는 나라다.

우리의 위치는 이미 교차해 있다. 반도체는 미국의 설계와 장비에 걸려 있고, 그 반도체가 팔리는 시장의 상당 부분은 중국에 걸려 있다. 교과서적인 교차 균열이고, 앞의 논리대로라면 그것은 안정의 조건이다. 그런데 바로 그 위치 때문에 우리는 양쪽에서 줄을 서라는 압력을 동시에 받는다. 교차를 유지하는 일이 저절로 되지 않고 매번 비용을 치러야 하는 선택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세 개의 렌즈를 우리 자신에게 돌리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지금 우리가 쌓아 올리는 것들은 여러 갈래로 열어둔 보험인가, 아니면 한쪽으로 정렬해 들어가는 선제인가. 그리고 그 판단을 우리가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남이 대신 해주고 있는가.

세계가 저마다 홀로 서겠다고 나설 때, 그 결심 자체는 죄가 아니다. 청구서의 금액을 결정하는 것은 홀로 서겠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 서느냐다. 하나의 서사에 자신을 통째로 거는 나라들의 세계는 비싸고 위험하다. 여러 갈래로 자신을 열어둔 채 서는 나라들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자립의 반대말은 굴종이 아니다. 복수의 이름을 동시에 지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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