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동전 던지기나 다름없는 기준으로 편을 갈랐을 뿐인데, 사람들은 곧바로 차별을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몫이 줄어드는데도요. 이 실험 이야기는 뒤에서 자세히 하겠습니다. 먼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차별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보통 두 가지를 떠올립니다. ‘만나면 알게 된다’, 그리고 ‘차이를 보지 않으면 된다’. 인종차별을 줄이려면 다양한 인종을 만나 교류하면 되고, 피부색을 신경 쓰지 않으면 차별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COVID-19 이후 세계적으로 반중정서가 심해졌습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고요. 그런데 국내에서 중국인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자주 만나면서 반중정서가 약해졌나요? 미국은 어떨까요.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인종·다문화 국가이고, 다양한 인종이 만나 교류할 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종차별은 여전히 문제입니다. ‘만난다’가 해결책이 아닌 사례는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이를 보지 않는 것’은 어떨까요? 인종, 성별, 세대, 국적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정체성은 애초에 안 보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보지 않는다’가 눈에 보이는 것만 뜻하진 않죠. 마음속에서 그 차이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우리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신념 아래, 보편적 인간성을 강조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차이를 강조하지 않으면 평등해진다’는 도식이죠. 앞의 두 해법은 모두 여기서 나왔습니다. 차이를 없애면 차별도 사라진다는 전제입니다. 그런데 정체성을 나누는 ‘선’을 흐리는 게 정말 답일까요? 오늘은 이 두 상식이 왜 둘 다 빗나가는지, 그리고 진짜 문제는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정체성은 지워지지 않는다
저명한 심리학자 Tajfel은 ‘최소집단 실험’으로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줬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기준으로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기만 해도, 곧바로 자기 집단을 편애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서로 얼굴을 본 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심지어 차별적으로 행동해도 개인이 얻는 이득이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죠.
더 놀라운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최대로 키우는 쪽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기 집단과 상대 집단의 ‘격차’를 최대로 벌리는 쪽을 택했습니다. 자기 몫이 조금 줄어들더라도, 상대와 벌어질 수만 있다면 그쪽을 골랐다는 거죠. 이 장면을 기억해두세요. 글의 마지막에서 다시 만날 겁니다.
아무 이유 없이 그어진 선으로도 편애가 생긴다면, 실제 역사와 이해관계가 얹힌 현실의 정체성은 말할 것도 없겠죠. 범주화는 그 자체로 편애를 부르기에 충분하고, 우리는 그걸 인지적으로 쉽게 끄지 못합니다. 정체성은 그렇게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나면 된다’가 빗나간다
1954년 Allport는 접촉이 편견을 줄인다고 봤습니다. 단, 조건이 있었습니다. 동등한 지위, 공동의 목표, 협력, 제도적 뒷받침이 갖춰졌을 때라는 단서였죠. 그런데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이 ‘조건’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남은 건 “많이 만나면 편견이 준다”는 반쪽짜리 공식이었고, ‘다양성=관용’이 상식처럼 굳었습니다.
여기에 반대편 설명이 있습니다. 외집단이 늘어날수록 자원 경쟁, 문화 침식, 지위 하락에 대한 위협을 크게 느껴 오히려 적대감이 커진다는 겁니다. 핵심은 ‘느끼는’ 위협이라는 점입니다. 객관적 위협이 아니라, ‘저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주관적 인식만으로도 갈등에 불이 붙습니다.
실제로 후속 연구들을 보면, 접촉은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를 동시에 냅니다. 만남 자체가 무력한 게 아니라, 좋은 접촉과 나쁜 접촉이 서로 상쇄되는 거죠. 게다가 나쁜 접촉이 좋은 접촉보다 편견에 미치는 힘이 더 세다는 결과도 있습니다. 특정 인종·국적·성별을 가진 사람과의 불쾌한 한 번의 만남이, 그 집단 전체에 대한 편견을 만들거나 굳혀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만난다’는 것만으로는 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 보면 된다’도 빗나간다
그렇다면 반대로, 차이를 아예 안 보려고 하면 어떨까요? 여기서 ‘색맹(colorblindness)’이라는 말을 쓰는데, 색을 못 본다는 뜻이 아니라 ‘차이를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를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한 연구가 백인과 흑인이 파트너로 함께 일할 때 벌어지는 일을 관찰했습니다. 백인 참가자들은 인종에 관한 언급을 의식적으로 피했습니다. 좋은 의도였죠. 그런데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눈을 덜 마주치고, 친밀감이 떨어지고, 과제 효율까지 낮아졌습니다. 심지어 상대 흑인 참가자는 그 백인을 오히려 ‘더 편견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보이는 걸 안 보이는 척 살아갈 때, 조심하려고 밟는 브레이크가 오히려 관계를 껄끄럽게 만드는 겁니다. 저도 나이 많은 어른들과 지낼 때 비슷한 걸 느낍니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삼가는 말과 행동이 너무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관계가 편하게 풀리질 않아요. 생각이나 경험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조심하려는 그 강박적인 태도가 교류를 가로막는 것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두 실패는 사실 한 뿌리에서 나왔다
여기까지 오면 이상합니다. 만나도 안 되고, 안 봐도 안 됩니다. 정반대 처방인데 둘 다 실패했어요. 왜일까요?
두 해법은 사실 같은 걸 노렸습니다. 정체성을 나누는 선을 지우려 한 거죠. 접촉은 “자주 만나면 선이 흐려질 것”이라 기대했고, 색맹은 “안 보면 선이 없는 셈”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봤듯 그 선은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Tajfel은 그 이유를 ‘범주화는 인지적으로 불가피하다’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료 Turner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사람은 단순히 세상을 편하게 나누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속한 집단을 ‘긍정적으로’ 느끼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긍정적인 느낌은 남과의 ‘비교’에서 나옵니다. 우리 편이 저쪽보다 낫다는 확인에서요.
여기서 아까 기억해두라던 장면이 돌아옵니다. 사람들이 자기 몫을 줄여가면서까지 상대와의 격차를 벌리려 했던 그 선택. 그건 이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더 위’라는 비교 우위를 확인하고 싶은 동기가 따로, 그것도 아주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선을 지우려는 시도는 헛돕니다. 진짜 문제는 정체성이 ‘있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정체성을 끊임없이 ‘누가 위인지 재는 자’로 쓴다는 데 있으니까요. 지워야 할 건 정체성이 아니라, 정체성을 우열의 잣대로 만드는 그 오래된 습관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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