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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 될 때, 멍청한 건 당신이 아니다.

내가 몰라서 그런가, 그 의심을 이젠 전문가에게 돌려줄 때

2026.07.29 | 조회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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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lue

전문가는 왜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가

특정 이슈에 대해 전문가의 의견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특히 그 전문가의 이야기가 온전히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에게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제 경험을 돌아보면 대개 셋 중 하나였습니다.

'내가 잘 몰라서 이해를 못 하나 보다.'

'전문가가 저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전문가가 그렇다는데 왜 다들 토를 다는 거야.'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조금 더 구체적인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송전탑이나 고압선 같은 기피시설을 설치할 때, 전문가들은 인체에 무해하다고 설명합니다. 해가 있더라도 미미한 수준이라고요. 그런데 해당 지역 주민들은 결사반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그들을 향해 지역 이기주의라고 손가락질합니다.

여기서 짚고 싶은 것은 반대하는 주민들의 태도가 아니라, '전문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왜 그들의 말에는 물음표를 달지 않을까요? 전문가의 권위는 대체 무엇으로 정당화되는 걸까요?

이 글은 흔한 질문을 뒤집습니다. 우리는 보통 "왜 사람들이 전문가를 안 믿지?"라고 묻습니다. 저는 반대로 묻겠습니다.

전문가는 무엇을 근거로 믿음을 요구하는가.


이해 못 하는 내가 멍청한 걸까

우리는 흔히 대중이 전문가만큼의 지식이 없어서 특정 사안에 반대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계에서는 이 가정을 '결핍모델(deficit model)'이라 부릅니다. 대중의 인지적 결핍이 불신의 원인이라는 관점이죠. 그런데 이 모델은 이미 30여 년 전에 반박됐습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 영국 컴브리아의 목양 농민들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낙진이 퍼진 뒤 전문가들은 방목 제한이 몇 주면 풀릴 거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오염은 그보다 훨씬 오래, 여러 해에 걸쳐 지속됐습니다. 전문가의 예측이 빗나간 겁니다. 농민들은 그 원인이 체르노빌만이 아니라 인근 셀라필드 재처리시설일 수 있다고 봤습니다. 자기 땅의 지형과 토양, 양 떼의 움직임을 몸으로 아는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의심이었죠. 이 사례는 과학기술학에서 결핍모델을 무너뜨린 대표적 연구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문가도 틀린다'가 아닙니다. 그건 너무 쉬운 결론이고, 자칫 "그러니 아무 말이나 믿어도 된다"는 상대주의로 미끄러집니다. 진짜 요점은 이것입니다. 전문가의 지식은 언제나 특정 조건을 가정한 모델입니다. 그 조건이 현장에서 실제로 성립하는지는, 모델이 아니라 현장에 사는 사람이 압니다. 컴브리아에서 그 조건은 성립하지 않았고, 그래서 전문가가 틀렸습니다. 대중이 결핍돼서 반대한 게 아니라, 전문가가 자기 지식의 조건을 성찰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니 "이해 못 하는 내가 멍청한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늘 당신의 결핍은 아닙니다. 때로 그것은 설명하는 쪽이 자기 지식의 한계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신호입니다.


'옳다'와 '결정한다'는 다른 말이다

한 가지는 인정하고 갑시다. 현대인은 전문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약, 우리가 건너는 다리, 우리가 마시는 물의 안전을 스스로 검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신뢰의 근거마저 스스로 검증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믿을 수밖에 없는데, 믿을 근거는 확인할 수 없는 곤경이죠.

바로 이 곤경 때문에 두 개의 문장이 슬그머니 하나로 붙어버립니다.

첫 번째 문장은 "전문가가 옳다"입니다. 이건 진리에 관한 주장입니다.

두 번째 문장은 "전문가가 결정해야 한다"입니다. 이건 권위에 관한 주장입니다.

둘은 전혀 다른 말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같은 말로 취급됩니다. 전문가가 옳으니 전문가가 결정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요. 하지만 옳다는 것과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 사이에는 반드시 메워져야 할 간극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시민의 순종이 아닙니다.


신뢰는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증명하는 것이다

신뢰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신뢰는 한쪽이 다른 쪽에 일방적으로 기대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리라는 기대, 즉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뢰의 부담도 한쪽에만 있을 수 없습니다. 믿어달라고 요구하는 쪽에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문가가 요구해야 할 것은 '나를 믿으라'가 아닙니다. '내가 믿을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믿어달라"는 말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니까요.

여기서 이런 걱정이 들 수 있습니다. 설득의 책임을 전문가에게 지우면, 결국 말 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 아니냐고요. 맞는 걱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매끄러운 화술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몇 가지입니다.

  1. 자기가 걸린 이해관계를 밝히는가.
  2. 모르는 부분을 모른다고 말하는가.
  3. 반대 의견을 감추지 않는가.

말솜씨는 얼마든지 꾸밀 수 있지만, 이 세 가지는 꾸미기 어렵습니다.


설득을 면제받는 두 가지 방법

이제 글의 첫머리에서 우리가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붙였던 말로 돌아가 봅시다. 지역 이기주의, 흔히 님비(NIMBY)라 불리는 그 낙인 말입니다.

여러 연구가 지적하는 것은, 송전선 반대를 '지역 이기주의'로 부르는 것이 설명이 아니라 낙인이라는 점입니다. 실제 저항의 상당 부분은 사적 이익 계산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온 공간과 그 공간에 얽힌 정체성을 지키려는 행동입니다. 국내 밀양 송전탑 갈등을 분석한 연구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겉으로는 전자파 위해성을 둘러싼 '사실 다툼'처럼 보였지만, 실제 쟁점은 위험을 누가 떠안고 누가 비켜가는가, 즉 위험의 지도를 누가 그리느냐의 문제였다고요. 왜 하필 이 마을 위로 송전선이 지나가고, 도시에서는 땅에 묻는 선을 왜 여기서는 하늘에 매다는가. 그건 전자파 수치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러니 '님비'라는 말의 기능을 정확히 봐야 합니다. 그것은 저항을 이해하려는 개념이 아니라, 저항을 이해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상대를 이기주의자나 무지한 사람으로 규정해버리면, 설득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낙인은 설득 면제의 도구입니다. 전문가와 제도가 시민의 반대를 무지나 이기심으로 프레이밍하는 순간, 자신이 져야 할 설명의 의무는 조용히 지워집니다.

그런데 이 방법에는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눈앞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야 쓸 수 있다는 것이죠. 반대자가 나타나기 전부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순간에도 작동하는 두 번째 면제 장치가 따로 있습니다. 자격입니다.

낙인이 상대의 자격을 지우는 방법이라면, 자격은 내 자격을 내세우는 방법입니다. 방향은 반대인데 도착지는 같습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한국에서 그 자격의 이름은 대체로 '시험'입니다. 사회학자 김동춘은 한국형 능력주의를 '시험능력주의'라고 명명합니다. 조선의 과거제부터 유교적 권위주의, 개발독재기의 도구주의, 신자유주의 경쟁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이 체제의 밑바닥 전제는 하나입니다. 시험이 개인의 능력을 판정하는 가장 공정한 제도이고, 그 관문을 통과한 자가 사회를 이끌 인재라는 것입니다.

이 논의가 본래 겨냥하는 것은 보상과 지위의 분배입니다. 누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정당한가의 문제죠. 그런데 이 글이 다루는 것은 다른 질문입니다. 누구의 말이 옳다고 여겨지는가. 두 질문을 잇는 다리는 시험이라는 형식 자체에 있습니다. 시험은 지식의 소유량을 한 번 측정해 서열을 매기고, 그 서열을 영구 자격으로 바꿔주는 장치입니다. 그래서 관문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지위만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라는 신분이 함께 주어집니다. 지위의 자격과 앎의 자격이 같은 창구에서 동시에 발급되는 겁니다.

작은 장면 하나를 떠올려 봅시다. 한국에서 전문가를 소개하는 순서 말입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고 무슨 시험을 통과했는지가 이력의 첫 줄에 옵니다. 무엇을 연구해 무엇을 알아냈는지는 그다음이거나, 아예 없습니다. 소개의 순서가 권위의 근거를 보여줍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아는지가 아니라, 어떤 관문을 지나왔는지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한번 발급된 자격은 갱신을 요구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전문가는 자주 설득하지 않습니다. 판정합니다. 그리고 그 판정이 거부당하면, 판정의 설득력을 되묻는 대신 시민의 무지를 되묻습니다. 여기서 두 장치가 만납니다. 자격이 설명의 의무를 면제해주고, 낙인이 그 면제의 뒷정리를 맡습니다.


여기서 갈라두어야 할 것들

여기까지 오면 이런 반응이 나올 법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전문가를 안 믿는 게 진짜 문제 아니냐"고요. 그 전제부터 의심해 봅시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 불신의 증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전문가에게 더 많이 의존하면서,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의심합니다. 의존과 불신이 함께 자라는 셈이죠. 한국의 조사 결과도 총량적 불신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의료기관과 교육기관에 대한 신뢰는 국회에 대한 신뢰보다 뚜렷하게 높게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등을 돌린 대상은 전문성 일반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신뢰의 분포입니다. 내 편 전문가의 말은 검증 없이 받아들이고, 상대편 전문가의 말은 검증 없이 기각하는 것. 양쪽 모두 신뢰가능성의 증명이라는 단계를 건너뜁니다. 자격이 설득을 면제해주듯, 진영도 설득을 면제해줍니다.

그러니 이 글은 결코 "전문가를 믿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백신을 거부하거나 과학적 합의를 부정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제 주장은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전문가를 믿을 근거를, 전문가가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거 없이 요구된 신뢰를 근거 없이 거부하는 것과, 증명된 신뢰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또 하나. 재난이나 팬데믹처럼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전문가가 언제 일일이 설명하고 시민의 판단을 기다리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급박한 순간에는 먼저 결정하고 나중에 설명해야 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긴급성은 설득을 영영 면제해주는 면허가 아닙니다. 그것은 설명의 의무를 잠시 뒤로 미루는 것일 뿐,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본 마스크 사례가 정확히 그 지점에서 실패했습니다. 급해서 결론부터 통보한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 뒤로도 속사정을 끝내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가 무너진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우리가 '전문가'라고 부르는 사람이 정확히 무엇의 전문가인지도 자주 불분명합니다. 방송에 나와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자기 전공의 경계를 훌쩍 넘어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내용이 아니라 사람을 판단하기

그렇다면 비전문가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마지막으로 발상을 하나 뒤집어야 합니다. 시민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을 믿을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을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방사능의 물리학이나 전자파의 역학을 우리가 직접 판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우리 몫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전문가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보통 교육 수준의 시민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음표를 옮겨야 합니다. 전문가의 말이 이해되지 않을 때, "내가 멍청한가"를 묻는 대신 이렇게 물으면 됩니다.

이 사람은 자기 이해관계를 공개하고 있는가. 이 사람은 자기 판단의 불확실성을 밝히고 있는가. 이 사람은 자기 전공의 경계 안에서 말하고 있는가. 이 사람의 동료 전문가들도 여기에 동의하는가.

전문가의 말이 이해되지 않을 때, 내용이 아니라 이 사람을 보라. ① 이해관계를 밝히는가 ② 모른다고 말하는가 ③ 자기 전공 안에서 말하는가 ④ 동료들도 동의하는가.

이 네 가지는 전문성의 내용을 몰라도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하는 권위라면, 그 권위는 아직 당신의 신뢰를 요구할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전문가의 권위는 시험을 통과한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번 새로 증명되어야 하는 무엇입니다. 우리가 물음표를 다는 일은 반지성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뢰가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설득은 시민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 결정에 참여하려는 자가 치러야 할 값입니다.


참고. 컴브리아 목양 농민 사례와 결핍모델 비판은 브라이언 윈의 연구(1992)에 기댔습니다. 송전선 반대를 '지역 이기주의'가 아닌 장소 애착으로 읽는 관점은 패트릭 디바인라이트의 연구에, 밀양 사례는 국내 위험 커뮤니케이션·환경정의 연구에 근거합니다. '누구를 믿을지'를 판단하는 시민의 2차 평가는 엘리자베스 앤더슨(2011), 신뢰가능성 증명의 논의는 오노라 오닐, 의존과 불신의 이중 운동은 길 에얄(2019), '시험능력주의'는 김동춘(『시험능력주의』, 창비, 2022)에서 가져왔습니다. 기관 신뢰도 비교는 한국행정연구원 「사회통합실태조사」의 기관별 신뢰 문항(4점 척도)에 따른 것으로, 의료기관·교육기관이 상위권, 국회가 최하위로 나타나는 경향이 여러 해에 걸쳐 반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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