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산책하는 말들 / 자존감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
짧은 글을 쓰는 회차의 글쓰기 수업에서 거울이라는 주제가 나왔다. 돌아가며 단어를 이야기하면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쓰기 시작해 순간적으로 짧은 글을 완성하는 시간인데 커피, 여름, 책 같은 평이한 단어들이 주로 나왔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거울이라니,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다.
영감을 찾을 새도 없이 노트북을 두드렸다. 뭐라고 써야 할까. 나에게 거울은 거의 없어도 무방한 수준의 물건이었다. 화장도 하지 않고, 옷매무새 다듬을 것도 없이 바지에 티 하나 걸치는 게 외출 준비의 전부인 사람에게 거울은 쓸모를 잃은지 오래. 하루 중 가장 오래 거울 앞에 서 있는 건 이를 닦을 때뿐이었다.
내 거울은 그날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피부보다 안색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후로 나는 거울 속 나보다 나를 만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내 상태를 신뢰한다. 기운이 없어 보인다,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요즘 내 수면시간과 일의 강도와 먹거리를 점검한다. 반대로 오늘 좋아 보인다. 얼굴이 훨씬 밝아졌네라는 말을 들으면 나 요즘 잘 살고 있구나 안심한다.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나로 보이기 위해 각도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거나 앱을 써본 적도 없다. 사진 속의 나는 언제나 내 성에 차지 않았으므로 조금 갸름해 보이거나 조금 날씬해 보이는 나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중심을 이동시켰다. 좋은 기분, 밝은 미소, 선한 눈빛. 전체적인 나의 인상과 태도가 편안하고 다정하길 바란다.
멋스러운 옷은 없지만 경직되고 조심스러운 옷 보다 어디든 걸터앉거나 뛸 수 있는, 내가 나답게 움직일 수 있는 옷을 매일 깨끗하게 세탁해 입는다. 약속이 있는 날에는 약간의 색이 들어간 립밤을 바르고 향수 대신 좋아하는 우디 계열의 핸드크림을 바르는 게 나의 최대치 꾸밈이다.
거울의 무쓸모에 대해 쓴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이 거울을 보지 않는 것은 작가님 자존감이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울이라는 단어에 딸려온 글의 주제가 대부분 콤플렉스거나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왜 내 글에서 자존감을 연상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의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 거울 속 내 모습을 중요하지 생각하지 않는 건 어떻게 생겨먹었든 간에 나는 내가 좋았기 때문일 거다.
이효리는 ‘캠핑클럽’에서 나 자신이 기특한 순간이 많을수록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했다. 스쿠터를 운전할 때 멤버인 이진이 그늘 아래 설 수 있도록 자신은 앞쪽에 멈췄고 그 순간 자신에게 감동했다고 셀프 칭찬하며 했던 이야기다.
자존감이 정말 그렇게 올라가는 것이라면 아마도 나는 나 스스로 만족하는 인간인 것이 맞다. 보통의 인간이 그렇듯 나 역시 이기적이고 못된 구석이 있지만 되도록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는 쪽을 선택하려고 한다. 선하고 올바르려고 노력한다. 그건 반대로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러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라는 뜻이지만 중요한 건 그럴 때마다 내 자존감이 올라갔을 거라는 거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썼을 때의 일이다. 9명의 여성 작가들이 함께 쓰는 책이었는데 편집자가 일일이 계약서를 들고 9명을 찾아다니기 어려우니 한 편의 계약서를 작가들이 우편으로 받아 릴레이 도장을 찍는 식으로 진행됐다. 내 순서는 중간쯤이었는데 계약서가 들어있는 파일에 포스트잇이 여러 장 붙어있었다. 다른 작가들이 함께 잘해보자는 의미로 보낸 따스한 메시지였다. 계약서를 주고 받을 때마다 포스트잇이 계속 더해졌다. 실제로 얼굴을 보고 함께 작업하지는 못해도 우편으로나마 서로를 응원하고자 하는 재미있는 이벤트가 된 것이다.
그런데 잘 보니 첫 번째 작가님의 메시지가 없었다. 아마도 그 작가님은 뒤따라올 이벤트를 상상도 못하고 서명만 해서 계약서를 넘겼으리라. 이 귀여운 이벤트는 두 번째 작가님부터 시작되었고 다른 작가님들의 순서마다 포스트잇이 더해져 나에게 왔을 것이다. 이 깜짝 이벤트가 끝나면 단 한 명의 작가님을 제외하고 8장의 메시지가 모이겠구나. 나는 슬쩍 물러나 포스트잇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다음 작가님께 보냈다.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나을 것 같아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일 수 있지만 그 쪽이 마음이 편했다.
며칠 전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프리마켓&북토크 에서는 아무도 앉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방수가 되는 돗자리를 챙겼다. 에어컨 바람이 불지 않는 밖에, 물기가 흥건한 바닥에 앉는 사람을 자처했다. 햇빛을 대비해 양산도 챙겼다. 시끌벅적한 실내에 비해 무더운 밖은 인기가 덜했지만 마당은 또 나름 늦여름의 낭만이 있었다. 가끔씩 실내로 들어가 구경하다 찬 바람을 쐬면 여기가 천국인가 행복하다가도 밖으로 나와 다시 내 자리에 앉으면 그것대로 또 행복했다. 물론 판매는 잘 되지 않았지만. 이효리 님의 말을 떠올리자면 나는 수익금을 잃고 자존감을 얻은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차라리 내가 불편한 쪽을 택한다. 덜 마음 상하는 편에 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9월인데 아직도 낮은 여름같아요. 이러다 곧 언제 추워졌지 하면서 코트를 꺼내겠지요. 오늘도 행복한 날 되시길. 추석 지나서 또 편지하겠습니다.
24. 9. 11.
희정 드림
의견을 남겨주세요
kaei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아주 사적인 마흔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내년 제주 페어도 신청해보겠습니다! 4월의 제주 기다려지네요. 즐거원 10월 시작하셨길 바랍니다. 😄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