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산책하는 말들 / 사주
뾰족한 수는 없다
점이라는 것을 태어나 세 번 보았다. 처음은 즉흥적으로 들어간 서울랜드 앞 천막이었다.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께 당신 연애 중이던 지금 남편과의 궁합을 보았다. 태어난 시가 필요한지도 몰라서 내 생일과 남편 생일만 알려드렸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인상적인 이야기는 없었으니 기억이 안 나는 거겠지. 그날 들었던 말 중에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남편에게 역마살이 있다는 거였다. 여행을 좋아하고 해외에 나가 살아보고 싶은 꿈이 있는 나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어디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되려나 좋아했건만 그게 서울을 떠나 남편의 고향인 충청도로 내려가게 될 거라는 뜻인지는 몰랐지.
두 번째는 결혼 후 아이 낳고 살다 친구가 정말 용하다며 알려준 곳이었다. 간판은 타로라고 쓰여있었지만 사주를 보는 곳인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끊임없이 이야기해 주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야 한다고 했다. 친구는 그곳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마치 홍보대사처럼 다들 여기는 꼭 가봐야 한다며 열을 올렸다. 청약이 된 아파트도, 친구 아이의 장애도 단번에 맞췄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의심할 여지 없이 용한 곳 그 자체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얘기하는 대로 받아적었다. 친구의 말대로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마치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것처럼 다다다 말이 쏟아졌다. 특히 몇몇 단어들이 아주 사람을 홀렸다. 내 생활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산 남편은 물. 우주는 꽃나무라고 했다. 순간 그냥 나무가 아니라 꽃나무인 것이 우주와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는 엄마라는 땅 위에서 아빠가 뿌려주는 물 맞으며 알아서 잘 자란다고. 공부도 잘 할테니 뭘 해줄 게 없다고도 했다. 부모가 옆에서 잔소리만 안 하면 걱정 없이 잘 자랄 거라고.
둘째 하나는 첫 마디가 여자 깡패였다. 여자 깡패라는 강렬한 단어를 듣고 화가 나기는커녕 용한 점사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내 딸을 설명하는 아주 참신하고 적절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우리 집 작은 폭군 하나 대신 제 오빠에게 깡패라고 했다면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하나는 아빠와 같은 기질인데 더 세다고 했다. 의사나 군인, 경찰, 법조인처럼 피를 보는 직업이 잘 맞는다고도. 이 얘기를 우주에게 했어도 말이 안 된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개미 한 마리 밟지 않은 큰아이는 누굴 때리는 게 싫어 태권도도 배우지 않으니 말이다. 농구학원에서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6개월째 1:1 코치를 받고 있는 운동신경으로 무슨 경찰이고 군인이겠나. 그렇지만 그분은 내 아이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내 아들과 내 딸의 성향을 술술 말했다. 우리 부부의 관계와 내 출판일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지막은 바로 어제 다녀온 점집이었다. 이사를 고민하는 나와 동네 엄마 둘이서 만나기만 하면 '우리 진짜 어디에서 살아요.' 고민만 하다 낸 결론이 겨우 사주였다. 나는 고민하고 있던 지역으로 이사해도 좋다고, 함께 간 동네 엄마에게는 절대 안 된다고 가도 몇 년 후에 가라고 했다. 또 우주 하나에게 찬 기운이 안 좋으니 강원도 쪽은 가지 말고 물이라면 무조건 뛰어드는 나는 의외로 물과 안 맞아 바닷가 쪽 가서 살 생각은 말란다. 그 외에는 별다른 건 없었다. 노년에 큰 재앙이 닥친다던가 재물운이 다해 거리에 나가 살 거란 얘기는 없으니 되었다.
사실 사주를 봐도 뾰족한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답답하니 가는 것이다. 믿든 안 믿든 머리 하나 더 빌려보는 거다. 그게 신이 됐든 인간이 됐든. 헛소리든 예언이든.
다 보고 나오려는데 더 질문 없냐시길래 고민하고 있었더니 이 집은 아빠가 말만 잘 들으면 된다고 했다. 욱하는 성질이고 말을 안 듣는다고. 함께 간 엄마에게는 남편이 성실하고 온순하니 꽃 키우고 싶다면 그거라도 하게 해 줘라 조언했던 터라 둘 다 웃음이 나왔다. 그 욱하는 성질을 그대로 닮은 우리 집 막내는 귀엽기라고 하지. 너무 순한 내 아들은 물만 주면 알아서 잘 자란다는데 시어머니 아들은 어쩜 이럴까.
사주가 좋아 노년까지 잘 산다는데 내 사주에 배우자 포함해서 말하는 거냐고 물어볼 것을. 그리고 저번 점집에서도 나는 지금 이 일이 천직이니까 그만두지 말라는데 그 꽃 대체 언제 활짝 피는 건지도 좀 알고 싶다.
구독자 님의 종교와 상관없이 분명 이 글을 읽고 용하다는 그 두 번째 점집을 궁금해하실 것 같아 알려드려요. 일산에 있는 신비의 타로입니다. 하지만 사주는 사주일 뿐 맹신하지 말자. 아시죠?
그리고 다음 달에 쓸 <마흔 일기>가 벌써 40회가 되었습니다. 40회에 마흔 일기에서 다뤄봤으면 하는 주제가 있으면 댓글로 알려 주세요. 그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구독자 님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또 편지하겠습니다. 🙂
24.8.29.
희정 드림
💌 문화다방 소식
재미있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속 안나 님의 상상헌에서 작게 프리마켓을 열어요. 멋진 브랜드나 잘나가는 힙한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프리마켓은 아닙니다. (어후 생각만 해도 어질어질) 집에서 쓰임을 다한 물건 가지고 나와 싸게 사고파는 작은 마켓이에요.
마켓이 끝나고는 안나님과 함께 북토크도 하고요. 마켓에서 만 원 이상 구입하시면 북토크는 무료입니다. 책도 5천 원 할인해서 판매할 예정이에요. 9월 8일(일요일) 많이 놀러 오세요.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프리마켓 & 북토크
9월 8일 (일) 상상헌 (북아현로 12길 17)
프리마켓 12시~3시 / 북토크 3시~4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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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도랑
정말.혹!해서 가고싶어지네요 ㅎㅎ 그치만 너무 멀어서 다음 기회에~~ 저도 아이들 사주 한번 본 적 있는데 너무 잘 맞는 것 같아서 안 믿고 싶은데 믿어지더라구요 ㅎㅎㅎ ^^
아주 사적인 마흔
답답할 때는 상담받는다 생각하고 가면 가끔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좋은 소리만 믿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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