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일기

41. 마흔 일기 / 19금

중년의 삶은 자꾸 건전해져 버려

2024.09.30 | 조회 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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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41. 마흔 일기 / 19금

중년의 삶은 자꾸 건전해져 버려

 

 

 

노래를 듣다가 내가 선택한 플레이 리스트에 19금 인증이 필요하다고 알람이 뜨면 조용히 취소를 누른다. 19금 인증이 필요한 노래의 가사라면 야하거나 욕하거나 둘 다이거나 일 텐데, 19세가 한참 넘은 지금은 그 어떤 것도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19금은 19세가 되기 전까지만 숭배된다. 나라에서 인증하는 성인이 되고 나서는 정작 성인만 가능한 것들이 새삼스럽지 않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마실 수도 마시지 않을 수도 있게 되면 더 이상 갈급하지 않다. 오로지 선택의 문제일 뿐. 

 

한 때는 첫 키스를 가장 먼저 한 친구의 책상에 몰려들어 정말 종소리가 들리는지 물어보던 때가 있었는데, 첫 경험을 가장 먼저 한 친구(보통 첫 키스를 가장 먼저 한 그 친구일 확률이 높았다)에게 비디오방에 고등학생도 들어가게 해 주더냐 묻던 그때는 어른들은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상상만으로 짜릿했었다. 

부모님이 안 계시던 집에 몰래 남자친구를 부르고, 불 꺼진 상가 건물 지하에서 교복을 입고 키스를 하는 것이 일기에  만한 일일 때는 종종 핑크빛으로 물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정작 19금 제한에서 해방된 성인이 되고 나니 반짝이던 즐거움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사그라들었다.  년이 지나고 당연한 일상이 되고 나니 술이니 섹스니 그냥 그랬다. 

 

하루를 마감하고 침대에 누워 웹툰을 보는 것이 나의 작은 낙인데 정사신이 나오면 솔직히 피식한다. 매번 그렇게 격정적일 수도, 민감할 수도, 만족스러울 수도 없는 것이 빈틈없이 완벽하게만 그려진다는 것이 어린 친구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기에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태어나 처음 포르노 비디오를 본 날(초등학교 때 친구의 집에서였다).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기 전 엄마에게 고백했을 때, 엄마는 그건 현실이 아니고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해 주었다. 고무호스처럼 기다란 흑인 남자 배우의 성기가 마치 외계 생명처럼 꾸물거리던 것이 현실이 아니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과장의 차이일 뿐 웹툰 속 D컵 여성들이 코르셋 한 것 같은 허리를 비틀며 발끝을 세우는 것 또한 현실과 거리가 있다. 그런 것 없는 정사신은 너무 현실 같아 재미가 없는 걸까. 아무래도 '오늘은 피곤하니까 짧게 끝내자.' 같은 말은 좀 그렇겠지.

 

이런 것에 심드렁해진 나와 달리, 남편에게 19금은 여전한 관심사인 것 같다. 소파에 앉아도  떨어지면 좋으련만 내 목 뒤로 팔을 두르고 허벅다리 하나쯤은  자기 다리 위에 올려놓고 쓸어내리는 것만 봐도, 남자에게 섹스란 59금이 되어도 시들지 않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설거지를 하거나 요리를 하려고 주방에 서있으면 남편은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뒤에서 가슴을 주무르거나 엉덩이를 딱 붙여 골반을 튕기지 않고는 지나치치 않는 병이라도 걸린 게 틀림없다. 나 지금 칼 들었다 협박을 해도 꼭 한 번은 하고야 만다. 

아이들만 없으면 잠깐만 보자고 티셔츠를 들추는가 하면, 수시로 오늘은 뭐 입었나 보자고 바지를 끌어내린다. 내가 갖고 있는 팬티야 당신이 허구한 날 세탁기 돌리고 개키는 뻔한 아줌마 팬티뿐인데 뭐가 궁금해서. 살이 조금 빠지면 자기는 살 빠지는 것 싫다고 더 찌라고 두 손으로 가슴을 주무르며 잔소리를 한다. 그럴 때마다 짜증을 내는데 내 건강을 염려해서가 아니라는 점이 가장 괘씸하다. 

 

새벽잠에서 깨서, 거실에 티브이가 켜져 있으면 갈증을 참고 주방으로 물 뜨러 나가기를 포기한다. 오밤중에 남편 혼자 깨어있다? 내 감각이 한 목소리로 지금 문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시그널을 보낸다. 어쩐지 팬티를 내리고 소파에 앉아 후궁을 보고 있을 것 같은 망측한 풍경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물증을 잡은 적은 없지만 촉이 그렇다. 차라리 목 막혀 죽고말지, 잠결이라도 그런 못볼꼴은 거절하고 싶다. 

언젠가 남편은 자기가 보는 성인물도 다 나와 비슷한 분위기라고 했었다. 특히 일본의 어느 배우는 나와 무척이나 비슷하다고. 난대 없이 사랑고백 하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사뭇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그를 경멸할까 귀여워할까 잠깐 고민하다 그래, 이것도 나름의 순애보려니 넘어갔다. 할머니 같은 잠옷을 입고 있어도 등뒤에 달라붙어 매일 밤 기회를 노리는 사람이니 갸륵하게 생각하자. 

 

중년이 되고 나서 삶의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내 인생에서 19세와 20세 사이의 장벽을 뛰어넘는 드라마틱한 순간을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에, 이제는 날 설레게 할 것들을 부러 찾아다닌다. 처음 혼자 떠났던 핀란드가 그랬고, 계속해서 하면 할수록 어려운 출판에 매달리는 것도 비슷하다. 이제 엄마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데 내 삶은 자꾸 건전해져만 간다.

 


제가 운영하는 글쓰기 단톡방 '쓰려는 마음'에 초고 일부분을 올렸는데, 이제 19금은 심드렁하다고 했더니 그래도 다른 사람의 19금 이야기는 흥미롭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구독자님도 그러실까 해서 제 이야기를 보내봅니다. 으악, 작가님 누가 이런 얘기까지 쓰랬어요. 안 본 눈 삽니다. 하실 지도 모르겠네요.(🤣그랬다면 죄송. 그래도 구독취소는 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결혼생활에 대한 에세이를 읽을 때 이런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게 좀 의아했거든요. 유치원생들이 할법한 뽀뽀만 하고 결혼하는 일일드라마 주인공 커플처럼 이상했어요.

벌써 9월의 마지막 날이라니. 요 며칠 신간 준비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번 주말 공원에서의 휴식이 다시 글을 쓸 힘을 만들어 주었어요. 구독자님 가을이 왔습니다! 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을 누리세요.

또 편지하겠습니다.

 

2024. 9. 30.

희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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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함

    0
    9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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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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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낼모레마흔

    0
    9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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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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