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말들

6. 산책하는 말들 / 이래도 될 지 모르겠지만

그랬나봐 나 너를 좋아하나봐

2024.05.23 | 조회 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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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위태롭지만 선명한 마흔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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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조금 즐거운데 아무래도 동네방네 떠들고 싶어져서 편지를 씁니다.

 


 

핸드폰을 꺼내들 때마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러면서도 나 이래도 되는 걸까 조심스러워진다. 오늘 낮 나는 인스타그램에 오래 망설였던 것을 고백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선재 앓이 중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의 상반된 입장을 상상해 보자. 어머어머 저도 요즘 '선재 업고 튀어'에 빠져있어요 라며 호들갑을 떠는 부류, 그리고 아이고 저 나이에 연예인이라니 철이 덜 들었구먼 쯧쯧 혀를 차고 있을 부류.

고백하자면 나는 후자에 속했다. 한창 BTS가 아줌마들의 아이돌이라고 떠들썩했을 때도 그런 열정이 아직 남아있다니 참 대단들 하다 생각했었다. 삶의 활력이 될 테니 누군가의 팬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게구나 남아있는 열정이 부럽기도 했고. 나는 그런 열정 따위 H.O.T. 쫓아다닐 때 다 써버렸나 보다 싶었다.

 

종종 멋지거나 예쁜 연예인을 보면 나는 그렇게 잘 키운 엄마에 쉽게 대입됐다. 저렇게 키우느라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얼굴에 흉터 하나 없네. 아이고 키를 저렇게 키우려면 뭘 먹여야 되는 거야. 너무 해맑고 좋다. 성격 좋은 게 최고지.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커야 할 텐데. 우리 딸을 수지처럼 키우고 싶다, 해리처럼 키우고 싶다 했었지 수지 너무 예쁘다, 해리 너무 귀엽다 팬심으로 바라본 적은 없었다.

그러던 내가 핸드폰 사고 처음으로 내 새끼 말고 남의 새끼 얼굴을 배경화면에 넣었다. 10년 가까이 쓰고 있는 노트북도 처음으로 배경화면이란 걸 저장해 봤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귀찮아서 미뤄왔던 수십 개의 폴더를 정리해야 했다. 우리 선재 얼굴 잘 보이게.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거슬러 올라가면 드라마가 하도 재미있다길래 릴스 몇 번 보던 게 시작이었다. 편집 영상을 너무 많이 봐서 이럴 거면 차라리 정주행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드디어 1회를 보기 시작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우리 선재...)

드라마를 보고 지난 영상 찾아보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는데. 왜 사진을 저장하고 막 공유하고 싶은 건지. 하루 종일 이클립스 노래를 들으며 이렇게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릴스에서 봤던 변우석표 모닝콜 목소리를 내 핸드폰 알람으로 설정할 수 있나 검색하고, 팬미팅에 갈 계획도 없지만 혹여나 거기 가서 손이라도 한 번 스치면 어떨까 상상하는데 미친 사람처럼 횡단보도를 걸으며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이렇게 변한 내가 믿기지가 않아서 자꾸 현타가 온다. 이 나이에? 내 동생뻘 되는 남자애를? 꽃미남을 좋아하는 어쩔 수 없는 중년의 아줌마가 된 것 같아 남사스럽다가도 그래도 삶에 즐거움 하나 더 생기는 건 좋은 게 아닐까 스스로 설득해 본다. 마치 욘사마 입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던 남이섬에서 본 일본 할머니가 된 기분이다. 그때는 왜들 저럴까 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할머니들 참 행복했겠구나.

 


 

나 예순여덟. 생애 최초로 남자 밝힘증 만개. 바람둥이, 불륜, 양다리나 문어발, 삼각 사각 관계 환영, 단 조건은 젊을 것, 일부를 제외하고 쉰 살 이상 불가, 미남 추남 가리지 않음….. 기타 등등. 그 마음은 보살 혹은 짐승.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마치 드넓은 하늘로 풀려난 새 같다. 내가 누구에게 달라붙건 우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나도 전혀 상처 받지 않는다. 망상이 아니라 제정신이다. 돈이 약간 들긴 하지만 재산을 탕진할 정도는 아니다.

“아아, 한류는 행복이었어!”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에 나오는 글이에요. 저의 예순여덟은 어떨까요. 하하하하.

 

그나저나 우리 선재 보고가세요. 살다살다 청순문짝남을 좋아하게 될 줄은 저도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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