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마흔 일기 / 암(3)
나쁜일이 있으면 좋은일도 있는거야
24. 3. 30
병원에 있는 동안 카톡이니 전화니 아이들 연락이 없다. 수술 직후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그러려니 해도 어쩜 카톡도 안 할 수 있는지. 아픈 것보다 그게 더 서러워서 굳이 휴게실로 가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들의 구구절절 핑계는 아빠가 엄마 힘드니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애교에도 마음이 달래 지지 않았다. 똑같이 전화가 어려웠던 어제 마음을 전달한 여러 사람들이 가운데 내 아이가 없다는 것이 끝내 서운했다.
내가 없는 시간 셋이서 꽤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큰 상처가 되다니 놀라웠다. 잘 지내길 바랐고 그러고 있으니 기특해야 하는 건데 사랑은 설명이 아닌 행동이고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넘쳐흘러 발을 적시는 것 아니었나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가정의 행복에 나를 녹여내고 있었구나. 한 발짝 물러나야 할 때다. 링거를 꽂은 채로 병실 복도를 걸으며 되내었다.
서운해할 것 없다. 서운해할 것 없다.
24. 3. 31
보고 싶으니 아이들 얼굴 사진 좀 보내달라고 했더니 남편이 보내준 둘째 아이 사진이 처참하다. 아이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찍었고, 그 꼴을 찍어 보낸 남편도 모르나 본데 눈이 빨갛게 부어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사진을 아무렇지 않게 보낼 수가 있지? 바로 전화를 걸었다.
“괜찮았는데 지금 막 씻고 나와서부터 그런 거야.”
“봄이라 이제 알레르기 시작했나 봐. 항상 들고 다니는 약 가방에 안약 있으니 넣어줘.”
분노를 가라앉히고 최대한 차분히 설명했더니 태연하게 안 가지고 왔단다. 1박 여행을 가도 꼭 챙기는 비상약 가방을 3박 4일 시가에 가면서 안 챙긴 것이다. 아마 자기 게임할 닌텐도는 챙겼을 것이다. 아무렴.
아이에게 직접 물으려고 전화를 바꿨더니 기침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이제 막 시작되는 소리가 아니라 의심할 여지없는, 이미 감기로 땅땅 판정된 소리였다. 결막염에 기침까지? 대체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갑상선 유두암 수술로 3박 4일 병원에 입원 후, 친정에서 이틀 요양하고 돌아가는 참이었다. 하루 부족한 그 일주일을 못 참고 남편은 끝내 감기에 걸린 둘째를 나에게 토스한다. 집에 도착하면 감기에 걸린 아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무리하지 말고 쉬라는 의사의 권고 따위는 상관없이 아이 간호를 해야겠지. 나 없는 사이 애들 아프지 않게 다치지 말고 있으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었나. 시가에 어른이 셋인데 왜 아무도 아이가 아픈 걸 알아채지 못하는 걸까. 거실에서 눈 비비는 아이는 신경 쓰지 않고 연승하고 있는 한화의 득점에 환호하고 있을 남편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정도는 홈캠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또다시 울화가 치민다. 떼어낸 내 암세포가 아마 이렇게 처음 생겼을 것이다.
24. 4. 1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날. 기차를 타고 내리려는데 창문 밖으로 하나가 꽃다발을 들고 기차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가 마침내 날 발견하는 순간을 담아 두고 싶어서 핸드폰을 들어 영상을 찍으려다 말았다. 카메라가 아니라 아이에게 집중하고 싶어서.
우주는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내 손을 꼭 잡고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많이 보고 싶었다고, 환영파티 같은 걸 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힘드니까 안 된다고.
하나는 꽃만 나에게 전해주고 (에스컬레이터 놔두고) 계단으로 팔랑팔랑 뛰어내려 갔다. 그러면서 꽃은 자기가 골랐는데 엄마는 여러 종류 섞는 거 싫어하냐고 묻는다. 아빠가 그랬다고. 그렇긴 하지만 하나가 고른 꽃은 다 예뻐서 좋다 안심시켰다. 아마도 수년 후에 나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건 이 섬세한 아이가 될 것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여전히 엉망이지만 아무렇게 꽃아 둔 꽃이 너무 예뻐서 자꾸 눈이 갔다. 감기에 걸린 하나와 이빨이 흔들리는 우주와 회복해야 하는 나와 내일이면 이런 우리 셋을 두고 다시 회사로 출근해야 하는 남편까지. 우선은 넷이 한 집에 있으니 됐다. 다 괜찮다.
집 안과 밖이 모두 봄이다.
24. 4. 3
갑상선 유두암 진단을 받고 잃은 것과 얻을 것을 따지자면 얻은 것이 더 많아서 이건 차라리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엄마가 이 말을 듣는다면 크게 화내시겠지만. 그럼에도 암에 걸리는 것과 피해 가는 것을 선택하라면 나는 역시나 피해 가는 쪽을 택하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입장에서는 긍정 회로를 돌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병을 계기로 내 주변의 사랑을 확인한 것은 사실이다. 매일 산에 가는 지인은 돌탑에 작은 돌멩이를 올리고 기도를 했다. 기도 노트를 보내준 지인은 발병 소식을 전했던 1월부터 지금까지 계속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했다. 어디 그것뿐일까. 누군가는 돈으로, 누군가는 선물로, 누군가는 말과 글로 나를 위했다. 그 진심이 전해져서 더 아플 수도 없었다. 그것만큼은 병을 얻고서라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3일마다 밴드를 교체하라고 해서 어제는 처음으로 수술 자국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목 아래 일직선으로 그어진 생각보다 긴 수술 자국. 여길 정말 칼로 째고 열어 암을 꺼냈다는 거지. 우리나라 액션 영화에서 흔하게 보는 칼부림 장면은 좀 자제할 필요할 필요가 있다. 작은 상처도 이렇게 아픈지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도 잘 몰랐을 거야.
24. 4. 6
벚꽃 시즌. 병원에서 벚꽃 개화가 늦어진다는 기사를 보고 내심 기뻐했었는데 다행히 몸을 좀 움직일 수 있는 때 벚꽃이 만개했다. 게다가 주말. 아직 컨디션이 다 돌아온 건 아니지만 돗자리와 도시락을 싸 들고 소풍을 나갔다. 평소 같으면 아이들 쫓아다니느라 바빴을 텐데 나는 캠핑의자를 펼쳐놓고 앉아 솔솔 부는 봄바람을 느끼며 책을 읽었다. 이런 호사가 있나. 평소라면 돗자리 밖으로 나를 수십 번도 더 불러냈을 아이들도 수술한 엄마는 양심상 부르지 않는다. 다정한 남편과 결혼한 여자들은 평생 이렇게 살았겠지. 나는 암에 걸려야 누릴 수 있는 사소한 여유가 누군가에는 평범한 일상이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웃프지만 내 딴에는 이것도 행복이었다.
나는 요즘 배터리가 금방 닳아버리는 오래된 핸드폰이 된 것 같다. 전원이 켜져 있을 때는 나름대로 잘 작동하는데 어느새 금방 방전되어 버린다. 그래서 활동할 수 있는 낮 시간을 절반으로 나눠 꼭 충전을 해줘야 한다. 피곤해도 낮잠을 자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는 스멀스멀 침대로 들어가 기절하듯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하루의 절반을 다시 살 에너지를 얻는다. 수술 후에는 내 체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피곤할 때는 쉰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힘들어도 낮잠을 자지 않았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쓰러져 잔다. 무리하지 않고 잠시 쉬어가라는 몸의 신호를 받아들이고 버티지 않게 되었다.
24. 4. 11
요즘 내 최대 관심사는 스카프다. 갑상선 카페에 가입하고 사람들이 스카프에 대해 얘기를 왜 이렇게 자주 하나 궁금했는데 진단 초기야 받아들이느라 바쁘고 그 후에는 병원 알아보고 교수님 후기 검색하고 정신없다가 수술 후에야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 밖에 남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흉터가 남지 않게, 수술한 것으로 보이지 않게. 위축될 필요 있나 목에 커다란 반창고 붙이고 다니면 되는 걸 뭘 그렇게 가릴까 의아할 수 있지만 막상 내가 그 입장이 되고 나니 역시나 가볍고 예쁜 스카프 한 장 마련하고 싶어졌다. 이걸로라도 산뜻하게 기분을 낼 수 있다면 좋으니까. 마침 핑계도 좋지 않나.
목을 가리는 건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깜빡하고 아무것도 두르지 않고 나갔다가는 하루에도 세네 번씩 ‘어머, 목에. 무슨 일 있었어요?’라는 질문을 받아야 하니까. 그러니 내 스카프 쇼핑은 다른 사람들이 불필요한 걱정을 하지 않게 막기 위함이요, 내 삶에 작은 즐거움을 더하기 위함이었다.
아이가 정기적으로 다니는 안과에 약을 받으러 왔다가 시간이 나서 바로 옆 옷 가게를 구경했다. 혹시 예쁜 스카프가 있으려나. 봄 시즌에는 스카프가 인기가 없는지 얇은 천 자락 하나 걸려있는 곳이 없다. 설렁설렁 걷다가 애꿎은 파자마만 샀다. 파자마라니. 잠자는 옷은 보풀 생긴 반팔에 해질 때까지 입는 고무줄 바지만 입던 우리 집에 파자마라니. 재벌도 아니고 호화스럽고 어색했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파자마 하나씩을 꿋꿋하게 담았다. 이런 것도 일종의 시발비용일 것이다. 암에 걸리고 나면 무서울 게 없다. 내가 암에 걸렸는데 이까짓 파자마도 못사? 라는 터무니 없는 마음이 논리를 이긴다.
내 것은 못 사고 또 아이들 것만 사는구나 우울해질 틈도 없이 핸드폰 앱을 열어 내 스카프도 한 장 샀다. 100% 리넨에 제팬 패브릭이라는(제팬 패브릭이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 체크무늬라 오래 고민하지 않고 샀다. 무려 59,000원짜리. 할인 쿠폰이 없었다면 이 가격을 다 주고 살 생각 못 했겠지만 이번에도 무적의 논리로 쇼핑을 완료했다. 암이 이렇게 무섭다.
24. 4. 12
하나가 놀이터 꼭대기를 향해 위험하게 올라간다. 이제 둘째가 놀이터에서 위험하게 놀면 가만히 앉아 위엄 있고 단호한 목소리로 제지하지 못한다. 이름 세 글자를 또박또박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원위치시킬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뭔가 내 성대를 누군가 틀어쥐고 있는 기분이다. 말은 평소처럼 할 수는 있지만 크고 높게 나오지는 않는다. 갑상선 카페를 보니 너도나도 고음불가라는 후기가 많다. 또 말을 하다 보면 쉽게 피로해진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만나기가 꺼려진다. 내게 남은 에너지는 모아서 아이들과 놀 때, 수업을 할 때만 쓴다.
24. 4. 16
외래가 미뤄진 환자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것이 간호사 선생님들의 마지막 업무였나 보다. 오후 6시가 다 되어 조직 검사가 결과가 아직 안 나와 내일 외래를 미뤄야 한다는 전화가 왔다. 또? 퇴원 후 이주일 뒤 잡혀있던 외래가 미리 한차례 미뤄진 후였다. 처방받은 신지로이드도 이미 3일 전에 떨어졌는데 괜찮은 걸까. 약이 없는데 괜찮냐 물으니 피검사 수치는 선생님께서 감안해서 보실 거라고 했다. ‘아니 그거 말고 내 몸이 괜찮겠냐고요.’ 진짜 궁금한 건 그거였지만 간호사 선생님을 붙잡고 이야기해 봤자 병원 스케줄을 전면 조정해 내 것부터 처리해 주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군소리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의사 파업으로 수술이 미뤄진 환자들이 다 이 병원으로 왔나. 일주일에서 늦어도 2주일이면 나온다는 조직 검사 결과가 한 달이나 걸리다니.
전화를 끊고 나서 그러면 상처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해서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역시나 모두 퇴근한 후였다. 하는 수없이 갑상선 포럼 카페를 검색한다. 검색어는 조직 검사 결과, 첫 외래, 상처 관리, 흉터 관리. 병원에서 퇴원할 때 3일에 한 번 갈아주라던 밴드도 2주 치였던 터라 지금 내 목에 붙어있는 게 마지막이다. 이제 씻을 때 물이 닿아도 되는 건지, 연고를 발라야 되는 건지, 잘 때는 밴드를 떼야 하는 건지 사람들마다 이야기가 다르다. 의사마다 설명이 다른가 보다.
한 시간 동안 카페의 글을 읽으며 내가 얻은 정보는 메디폼과 시카 밴드를 가장 많이 쓰며 메디폼은 자외선 차단이 되고 시카 밴드는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와 가격이 뭐 이렇게 비싸지. 넓은 파스만 한 크기의 밴드 한 장에 5만 원 정도다. 카페 내에 중고 판매 게시판을 통해서 시카 밴드 3장을 구입했다. 일단은 이렇게 준비해 놓으면 되는 걸까. 흉터 없애는 밴드가 이렇게 비싸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비슷한 시기 수술을 한 혜미(동생의 여자친구)에게 시카 밴드 두 개를 보냈다. 아직 어린데 흉터가 생기면 더 우울할 테니까.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도 있다.
24. 4. 17
메디폼은 사랑을 싣고. 밴드가 이렇게 비싼 줄 몰랐다고 스토리에 올렸더니 하루 걸러 택배가 온다. 어떤 택배는 상자를 뜯었더니 주르르르 작은 밴드가 쏟아졌다. 이것도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집에 있어 보낸다고. 어떤 택배에는 사용법과 흉터 관리에 대한 조언이 앞뒤로 빼곡히 적힌 종이 한 장과 함께 사용하던 물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담겨있었다.
고마운 사람들에게는 바로 보답하지 않는 편이다. 대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보답으로 느끼지 않을 때쯤 되돌려주고 싶다. 머릿속에 고마운 사람들 리스트를 잘 정리해서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좋은 것을 보면 꺼내보려고. 오늘도 내 리스트는 조금 더 길게 늘어났다.
하나하나 갚을 길이 없을 때는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도 하려고 한다. 내가 마음을 줬던 사람이 허튼짓하지 않고 밝은 쪽으로 걷는 것이라도 보여주자. 일단은 건강하게 지내는 것. 그것을 목표로 하자.
24. 4. 18
지금까지 크게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수술 자국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 목에 상처 하나 있다고 뭐 대수랴 애초에 로봇수술을 고민하지 않았는데. 막상 수술을 하고 나니 상처 부위가 목이라는 것이 약간 오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팔뚝이나 허벅지가 일상적이라면 목은 뭔가 극적이랄까.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날이 더워져서 스카프를 하고 나가지 않으면 보는 사람마다 상처에 대해 물었다. 그러면 나는 암이라는 말이 가벼운 안부 인사를 무겁게 바꿀까 싶어 간단한 수술을 했다고 주어를 빼고 말한다. 갑상선 질환이 없는 사람은 사실 갑상선이 목 어디에 붙어있는지, 이게 결절인지 암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더 깊게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다.
내 상처는 자꾸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수술 후에 굳이 스카프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상처에 위축되거나 보기 흉해서 만은 아니겠구나 뒤늦게 깨닫는다. 더운 여름에 할 수 있는 얇고 가벼운 스카프 한 장을 더 주문해야겠다.
24. 4. 23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처음 수술하고 목소리에 변화가 없다는 것에 크게 안도했었는데 가끔 말을 많이 하면 목이 잠기는 느낌 정도가 이제는 심한 목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변했다.
요 며칠 사람들을 좀 만났다. 동네 엄마와 저녁 먹고 밤마실도 했고, 서울에서 모임도 있었다. 그게 결정적이었을까. 지금 내 목소리는 3차로 노래방 가서 서비스 시간까지 알차게 쓰고 온 다음날 같다. 평소에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꼭 해야 할 말도 아끼고 있다. 문제는 이틀 뒤 내가 주최한 책 행사에 15명이 온다는 것이었다. 수업은 아니라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할 텐데. 이 목소리로는 도레미 이상 나오질 않아서 큰일이다. 그들을 반겨 하는 내 마음을, 준비했던 이야기들을 다 할 수 있을까. 이 목소리를 두 시간 내내 들어야 할 그들에게도 벌써부터 미안하다.
더 중요한 건 당장 일요일에 세 시간짜리 수업이 있고, 5월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3회 차 수업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수술 후에 컨디션이 괜찮길래 줄줄이 일정을 만들어 놓았더니 이 사태가 벌어졌다. 왜 말을 아끼라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걸까!
목소리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고 있다. 나는 수술 후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기쁨에 더 호들갑 떠는 사람이 되려 했는데 오히려 더 진중하고 말을 아끼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오랜만에 반가운 이를 만나서 도레미파솔- 톤으로 내뱉은 말은 아예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마치 초음파처럼 그런데 아무런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저 그런 말을 하려고 했다는 것을 나만 알뿐이다.
24. 4. 23
5시부터 습관적으로 시계를 확인하고 있다. 병원 진료시간인 6시까지 아무 전화도 안 온다면 조직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뜻이다. 한 달 만에 드디어 외래에 간다. 보험금을 받기 위해 필요한 서류도 뗄 수 있다.
24. 4. 24.
첫 외래도 엄마와 함께다. 혹시나 잊으셨을까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더니 오늘 몇 시 기차로 올라오냐며 전화가 왔다. 혼자 진료 보고 들어가겠다 얘기해도 소용없었다. 나 마흔인데. 애가 둘인데.
쿨한 선생님의 첫 외래는 별다른 말없이 끝났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한다. 목소리도 천천히 돌아올 거라고. 유착이 될 수 있으니 목을 뒤로하는 운동을 자주 해주라고 하셨다. 흉터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여쭤보니 밴드처럼 붙이는 것과 바르는 게 있는 게 있다고. 붙이는 건 10만 원 연고는 5만 원이라길래 고민 없이 연고를 택했다. (계산할 때 보니 6만 원이 넘었다.)
24. 4. 26
목소리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있다. 아침에 등원하는 아이를 향해 베란다에서 손을 흔들며 발랄하게 ‘잘 다녀와.’ 외쳐도 상큼하지가 않다. 하루에 두 갑씩 10년 이상은 담배를 피워댄 과장님 목소리다. 다시 아이들과 귀엽고 다정한 말투로 놀 수 있을까. 의사 선생님께서 몇 개월은 걸린다고 했지만 혹시나 이대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두려움에 떨고 있는 중이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더 신경 쓰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라고 건네는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아 깜짝 놀랐다. 나만 들리게 아주 작은 소리로 목구멍에서 말이 겨우 빠져나왔다. 이 병에 걸린 뒤 처음으로 우울해지려고 한다.
24. 4. 28
외래에서 챙겨 온 한 뭉텅이의 보험 서류를 제출하고 보장 내역이 궁금해 보험사에 전화를 했다. 일반 암이면 N천만 원의 80% 소액 암이면 N백 만 원의 80%가 나올 거라고 했다. 갑상선암이 일반 암인지 소액 암인지 물었더니 소액 암으로 빠지기 전에 계약한 것인지 시기에 따라 달라서 자세한 건 약관을 봐야 한다고 했다. 약관을 보는 건 본인만 할 수 있으니 확인해 보라고.
아무리 그래도 0하나가 더 붙는 차이는 너무한 거 아닌가. 천만 원 단위라면 빚도 좀 갚고, 이사하는데 보태고, 우리 애들 드디어 여권 만들어 비행기 한번 타는 건가. 백만 원이면 수술비 카드값 내고 끝이겠지. 그래도 치킨은 한 번 먹자.
24. 4. 30
어제부로 보험금이 모두 들어왔다.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 소리를 내어가며 몇 번을 세어봤다. 살면서 만져본 적도 없는 금액이다. 집 전세 계약을 할 때 통장으로 주고받아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그런 돈을 갖고 있다고 느끼며 살아본 적은 없었으니까.
이런 것도 좋은 소식이라고 해야 할까. 이왕 아픈 거 돈이라도 많이 받으면 좋은 거겠지. 퇴근하고 온 남편을 소파에 앉혀놓고 너무 좋아하지 말고 들으라고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여줬다.
“입꼬리 단속 잘하고 봐봐. 너무 좋아하지 마라.”
“N년 치 대출이자네.”
“우리 빚이 얼만데?”
“X억”
암 진단금 얼마 들어왔다고 바로 현실감각을 잊고 붕 뜨고 있었던 날 남편은 순식간에 땅 위에 단단히 묶어 놓는다.
재테크한답시고 분수에 안 맞는 땅을 사서 팔리지도 않는 것을 허덕이며 끌고 오고 있던 참이었다. 내 소원이 있다면 그놈의 땅을 계약하기 전 삶으로 돌아가는 것. 기내식이 궁금했던 아이들과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여권을 만들어 떠나볼까 들떴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이 어마어마한 돈이 그저 공짜로 생긴 여윳돈처럼 생각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엄마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고 알려드렸더니 그래 잘 되었다 하시더니 조금 있다 메시지가 왔다.
“네 큰 아픔으로 받은 거니 먹는 거나 맘 편히 먹도록 해라. 우리 이쁜 딸~~ 엄만 속상하다.”
24. 4. 30
갑상선 카페에서 ‘금융 치료’를 검색했다. 여행을 가고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곳에서 푹 쉬었다 왔다는 사람이 많았다. 가방을 샀다는 사람, 쌍꺼풀 수술을 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필요한 곳에 써야 한다면 빚부터 갚아야겠지. 쓰고 싶은 곳에 쓸 수 있다면 어려울 때도 내 보험을 유지해 준 엄마에게 감사의 의미로 한 천만 원 드리고 싶다. 그러자면 시댁에 빌린 5천만 원부터 갚아야 할까. 돈이 생기면 직업병으로 갖고 있는 어깨 마사지를 받으러 다니고 싶었는데 그건 가능할까. 친구에게는 이 금액을 다 밝혀도 괜찮을까. 혹시나 서운해하지 않을까. 로또가 된 것도 아닌데 비밀이 많아진다.
그래도 내가 아팠을 때 나 대신 울어준 사람들에게는 보답하고 싶다. 나에게 금융 치료는 그런 의미다. 언제나 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잘하지 못했던, 고마웠던 사람에게 돈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
24. 5. 2
남편과 식탁에 앉아 보험금의 쓰임에 대한 회의를 했다. 남편은 노트북을 꺼내 엑셀을, 나는 적어두었던 다이어리를 꺼냈다. 그동안 어떻게 하면 더 벌 수 있을까만 생각해 봤지 어떻게 쓸까 생각해 보는 것은 처음이라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불안이 엄습한다. 역시, 돈도 있어본 놈이 쓰는 거지.
남편은 아주 조금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나머지는 없는 돈으로 생각하고 묶어두고자 했다. 일부라도 대출금을 갚을지, 이사를 갈 때 쓸지, 돈이야 들어가자면 끝이 없었다. 나는 암에 걸린 후 나에게 마음을 써준 사람들에게 보답을 하는데 쓰고 싶었다. 큰돈은 아니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밥 한 끼라도 사고 싶었다.
사실 우리는 매달을 미션을 클리어하듯 살았다. 어마어마한 대출이자를 내느라 생활비 조금 아끼는 것은 티도 안 나는 수준이었다. 때로는 생활비 보다 큰 대출이자를 내면서 이럴 거면 아끼며 사는 게 무슨 의미일까 허무해졌다. 이번 달은 주식을 팔아서 내고, 이번 달은 적금을 깨서 내고, 이번 달은 저번 프로젝트 대금 받은 걸로 내고, 이번 달은 인세 들어온 것으로 내고. 이런 식이었다.
남편은 여행도 가지 않았으면 했다. 그건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가자고. 나는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큰돈의 보험금이 들어왔는데도 가지 못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영영 여권 사진을 찍을 일 없을 것이다. 한몫을 떼어 여행자금이라고 써두었다. 이것만큼은 타협할 수 없었다.
남편이 평소에 갖고 싶어 하던 6만 8천 원짜리 갤럭시 워치. 동네 엄마들과 아이들 물놀이장이 있는 고깃집 예약. 지금까지 보험금 사용 내역은 이것뿐이다. 200만 원이라는 내 몫의 여윳돈은 아마도 이런 식으로 쓰일 것이다. 내 것은 사고 싶은 게 없었다. 4년 전 내 생일날 남편이 큰 마음먹고 선물해 준 50만 원짜리 상품권이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과 비슷했다. 필요한 것은 많지만 사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차라리 갖추지 않고 살길 선택하게 된다. 그래도 언제든 마음 가는 곳에 내밀길 주저하지 않을 황금 카드를 득템해서 기쁘다. 200만 원이 들어있는 체크카드를 황금카드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어쨌든 한동안은 당장 망할 일 없고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돈으로 마음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는 예금 통장으로 들어갔다. 다시 당근에서 아이 옷을 팔고, 매달 2만 원, 5만 원짜리 적금을 넣고, 어제 쓴 가계부를 떠올리며 아메리카노를 마실까 욕심내서 얼그레이 티 라테를 마실까 고민하는 평소의 나로 돌아간다.
24. 5. 17
한동안 보험금의 노예가 되어 살았다. 이렇게 큰돈이 내게 생겼다는 기쁨. 이렇게 큰돈이 생겨도 빚을 다 갚을 수 없다는 슬픔. 그나마 조금의 여웃돈으로 삶이 덜 팍팍해졌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정작 나를 위해서는 쓰지 못하고 결국은 써야 하는 곳에 어쩔 수 없이 쓰게 될 거라는 불안 속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다.
나는 통장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돈을 노려보며 온갖 상상을 했다. 근사한 풀빌라를 빌려 친구들의 가족을 초대하는 상상. 엄마가 예전부터 가고 싶다던 크루즈를 타고 지중해 바다를 보는 상상. 아이들 학교를 쉬고 한 달 동안 따뜻한 나라로 떠나 실컷 수영을 하는 상상. 하지만 상상뿐, 우리의 일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명품 가방은커녕 명품 스카프 하나 사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여권이 없다.
이럴 거면 평소에 더 큰 꿈을 꾸어둘걸. 왜 내 그릇은 간장 종지만 해서 돈 많이 벌면 김부각을 새우깡 먹듯 사 먹고 싶다는 정도의 바람밖에 없는 걸까. 돈이 생겼는데도 막연히 떠나고 싶은 해외여행지가 없다니. 내 삶에는 냉장고에 붙여 놓은 이국적인 도시 엽서 한 장 없었다. 그동안 언젠가 꼭 가고 말리라 마음속에 품어두고 있던 나라도 없으면서 그렇게 열심히 스피또를 긁었단 말인가.
에어비앤비나 구글 지도에 점찍어 놓은 국내 숙소마저 모두 가격 대비 나쁘지 않은 곳뿐이었다. 헉 소리가 나게 좋은 곳,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가볼 만한 곳이 내 관심사였던 적은 없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나는 살 수 없으면 아이쇼핑도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제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꿈이라도 훔쳐야 할 판이다.
어젯밤은 잠든 아이들 옆에서 핸드폰으로 전 세계를 돌았다. 여행을 많이 다니던 친구가 캐나다가 참 좋다고 했었지. 거기 가려면 얼마나 들까. 한때 포틀랜드 책을 열심히 봤었는데 거긴 어떨까. 대학 때는 멕시코에 가서 타코에 테킬라를 실컷 먹는 로망도 있었는데 가족 여행으로는 위험할까. 막연하게 스페인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잖아. 그래, 한때 나에게는 핀란드에 가서 아누 투오미넨의 전시를 직접 보고 사인을 받아오겠다는 꿈도 있었지. 그동안 잊고 있던 작은 소망들이 어둠과 함께 내 침대로 흘러들었다. 막상 옛 기억을 꺼내자 검색은 새벽까지 그칠 줄 몰랐다.
24. 6. 7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혼자서 핀란드로 떠나는 항공권을 결제했다. 결제 직전에 취소한 것만 두 번째, 하루만 더 고민하자 그만둔 것이 벌써 일주일이었다. 핀에어 특가가 오늘까지가 아니었다면 영영 티켓을 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들 없이 혼자 여행 가서 행복할 수 있을까. 이 큰돈을 써서 나 혼자만 즐겁자고 떠나는 게 맞을까. 넷이 어려우면 첫째만이라도 데려갈까. 온갖 만약이 계속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분명 아이들이 그리울 것이다. 미술관에서 잘 꾸며놓은 아이들 체험장을 보거나, 놀기 좋은 놀이터를 지나거나, 공원에 소풍 나온 가족들을 보면 혼자 온게 아쉬워 외로워질게 뻔하다. 그럼에도 잊고 있던 행복을 누리기로 결론 내렸다. 미술관에서 반나절 조용히 머물며 하루를 보내는 일상. 배가 고프면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내가 가고 싶은 방향대로 걷는 하루. 한때는 너무나 당연했지만 이제는 좀처럼 누려본 적 없는 내 취향의 여행. 일주일 동안 헬싱키에서 그렇게 살아보기로 했다.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서 다이어리 속 7월 달력에 ‘차선의 행복’이라는 제목을 달아 주었다. 가장 큰 행복이 아닐 것을 알면서도 일단 떠난다.
24. 6. 11
저녁에 샤워를 하고 나면 목에 난 상처에 흉터연고를 바른다. 아낀다고 너무 조금씩 발라서 그런건지 어째 흉터를 옅어질 기미가 없다. 낮에는 자외선 차단을 잘 해줘야 한다는데 한 여름에 스카프는 너무 덥고 자외선 차단 필름은 또 너무 비싸서 가위로 자를 때마다 손이 달달거린다. 초기에 피부과에 가서 레이져를 맞아야 흉터없이 말끔해진다고 지인이 신신당부를 했는데 어째 흉터하나 없애자고 병원에 가는 건 또 내키지가 않는다. 내 딸의 상처라면 벌써 너댓번은 갔겠지만. 내 몸을 내 딸과 같이 아끼는 건 생각처럼 안 된다.
한동안 수술 후 한 달, 두달, 상처 사진을 검색하며 내 상처와 비교하는 건 그만 두었다. 갑상선 암 판정을 받고 고마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목에 흉터 하나쯤은 내어줘도 그만이지 싶다. 다만 틈만 나면 목을 뒤로 젖혀 스트레칭은 자주 하고 있다. 상처야 그러려니 해도 유착은 어쩐지 조금 무서워서.
어제는 하나랑 집에 가는 길에 암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나중에 암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해줬다.)
“암에 걸렸다는 건 나쁜일이잖아. 그런데 수술하고 나서 엄마는 더 건강해진 거 같아. 채소도 많이 먹고 운동도 하고. 앞으로 더 건강해지려고.”
“엄마 몰랐구나? 나쁜일이 있으면 좋은일도 있는거야.”
하나가 말한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다는 건 수족구에 걸려서 아팠지만 그 덕분에 학교에 3일이나 안 갈 수 있다는 거였어요. ‘으이그 요놈아.’라고 끝난 대화였지만 아이의 말에는 이상하게 통찰의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구독자님. 쓰다 보니 생각보다 길어진 갑상선암 투병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또 편지하겠습니다.
24. 6. 12
희정 드림
💌여행자의 편지 헬싱키
4년 전 치앙마이에 갔을 때 매일 엽서를 써서 보낸 적이 있어요. 그 글을 모아 <여행자의 편지 치앙마이>라는 책이 나왔고요. 이번에도 헬싱키에서 엽서를 적어 보내보려고 합니다. 4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서 보낼게요. 혹시 받아보고 싶으시다면 이쪽으로 신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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