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산책하는 말들 / 어른이 된 어린이
어버이날의 성적표
이제 조금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제는 잠을 설쳤다. 2년 전 그날이 여전히 내 삶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2년 전 어버이날의 통화 이후로 나는 시부모님과 전화를 하지 않는다. 나의 충격이나 상처에 대해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왕 그렇게 되었으니 이렇게 살자고 말없이 선을 긋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그래도 어버이날만큼은 몸이 먼저 반응하나 보다. 스멀스멀 내 안에 불안이 피어올라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가만히 누워 편히 잘 수 없게 만든다. 새벽에 잠에서 깰 때마다 내일은 어버이날이고 나는 또 한 번의 시험대에 오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다 싫어진 어버이날 아침. 당일치기로 친정에 다녀오겠다는 나의 의지는 엄마의 만류에 쉽게 꺾였다. 엄마는 몸이 피곤하다, 어제 외삼촌이 와서 소고기도 사줬다, 웅이가 저녁에 배달도 시켜 준단다 라며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반만 믿으면서도 끝내 광명으로 가는 기차표를 취소했다. 일이 많아서, 나중에 아이들과 함께 가는 것이 더 좋으니까 라는 이유에서였다. 이것도 절반은 거짓이었다. 일이야 하룻밤 새면 다 못할까. 사실 엄마는 아이들보다 딸 얼굴을 더 보고 싶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우리가 오지 않아 서운하다고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좋은 딸뿐만 아니라 착한 손녀, 잘하는 며느리여야 하는 나와 그딴 거 다 그만두고 싶은 나 사이에서 휘청인다. 잘하고 싶은데, 잘하려는데, 잘하나 보자 지켜보는 시선을 느끼는 순간 못된 마음이 불쑥 올라와 깽판을 친다. 결국 내 손해일지라도 스파르타로 가르치는 선생님의 과목은 기필코 낙제를 하고야 만다. 그게 내 못난 점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씩 이럴 때는 진절머리가 난다. 사랑과 감사에 마감 날짜가 있었던가.
오늘 남편이 시아버지께 드리기로 했던 봉투는 전자레인지 앞에 그대로 있다. 꽃을 사는 것도, 봉투를 준비하는 것도 여전히 며느리인데 아들은 그것마저 깜빡하고 가져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화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 기다리고 있는 시부모의 존재가 나에게만 부담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내가 어떤 지옥에 빠져있는지 아는 사람도 나뿐이다. 그걸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 가장 외롭다.
어버이날이 어린이 날 보다 3일 뒤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린이들에게 어린이날은 너무 커다란 행복이니까. 내 모든 마음을 5월 5일이 집중하며 행복했다. 우리 집에 어린이가 둘이고, 그 어린이의 즐거움을 계획하고 목도한 것이 나라는 게 영광으로 느껴질 정도로 기뻤다. 그것만으로 충분해서 어버이날 같은 것은 그저 어린이날 3일 뒤 수요일쯤으로 넘어가도 괜찮다는 게 어버이날을 맞은 내 솔직한 심정이다.
우리 집 어린이가 어른이 되면 나도 전화를 기다릴까. 전화를 하지 않아서, 찾아오지 않아서 서운할까. 아마도 별 수 없이 그럴 것이다. 조금 다른 중년을 꿈꿨지만 나 역시 하루에 커피 2잔이 두렵고, 건강이 최대 관심사가 되고, 잘 먹던 것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보통의 중년이 되었으니까. 그래도. 적어도. 내 아이가 어른이 된 후에는 어버이날 전날 밤 뒤척이며 깨지 않길 바란다. 잘하고 싶은 아이를 빤히 지켜보는 시선을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싶다.
글을 쓰면서도 못돼 쳐 먹었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왕 쓴 거니까. 여긴 그런 글을 써서 보내도 되는 곳이니까. 구독자님은 그래도 그럴 수도 있다 해줄 거라 믿으니까 발송 버튼을 누릅니다.
24. 5. 8.
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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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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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마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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