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해경

무드에 관하여 ep.7

밤의 무드

2023.06.22 | 조회 2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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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 글을 매개로 맺어질 수 있는 삶과 사람, 사랑

밤의 무드

 

ⓒ 차서영
ⓒ 차서영

쓸 말도, 할 말도 없을 때.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운 얼굴 하나 없는 이 밤에, 나는 무어라 글을 쓰려 했던가요. 식어가는 술잔 속엔 이국의 언어가 떠돌고, 사람들의 눈은 밤보다 더욱 깊어갑니다.

관찰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내가 궁금한 건 이토록 두터운, 세계라는 피복 안에 숨겨진 마음이란 것이었지만 그것은 퍼석퍼석한 여름 사과의 과육보다도 쉽게 으스러지고 있었고, 한때는 사랑에 모든 걸 바치려 했던 나도 빈 정거장에 서서 몇 번의 기차를 일부러 놓친 후에야 사랑이란 걸 깨달은 다음이었습니다.

담배는 필 줄 몰라요.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의 희끗한 머리 위로 하얀 연기가 나선을 그리며 부풀 때, 그 속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점점 더 거세지는 빗줄기를 입을 벌려 받아 먹는 오래된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노인은 성장점이 훌쩍 지난 그 아이의 나무 같은 몸덩어리를 껴안고 이따금 천둥이 되었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자식들이 찾아와, 조용히 내일을 펴드리고 가곤 했습니다.

당신의 이별에도 내일이 있다면, 그것은 밤마다 몸집을 키울 것이지만 한 번쯤은 쓰다듬어 주세요. 그러면 그 녀석도 귀염을 떨면서 한 번쯤은 당신의 눈물을 닦아줄 테니까요.

어떤 말도, 어떤 글도 떠오르지 않는 때. 나는 마침내 관찰자이기를 포기하고 다시 허전한 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혼자 불을 켜고 혼자 밥을 차리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모든 밤. 창밖에 심어둔 사과나무엔 여전히 아무것도 없지만 나는 이렇게 친해지고 있어요.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어요. 언제 끝낼지도 모르겠어요.


 

"누나의 사진과 나의 글, 생각만 해도 좋지 않아?" <무드에 관하여>는 차서영 작가의 사진과 김해경 작가의 글로 구성된 사진에세이 단편입니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밤에 찾아옵니다. 

 

물성과 해체는 글을 매개로 삶과 사람, 그리고 사랑을 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방황했습니다. 잡으면 물성이 되지만, 놓치거나 놓쳐야만 했던 일들은 사랑을 다- 헤쳐 놓았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의 전리품을 줍습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요. 그리고 여전히 방황- 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또 찾아 오겠습니다. 

물성과해체 김해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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