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해경

무드에 관하여 ep.4

세아, 사년 전 기록

2023.06.03 | 조회 2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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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세아, 사년 전 기록

아름답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사이라고 할 수 없는 말들을 주고 받는데 드디어 마침일까 하는 생각이 오고 있는데, 그렇게 둥근 말을 서로의 발밑으로 굴려 보내도 되는 걸까…… 구름이 우리에게 얼마큼 멀었는지 그 일에 바람이 종종 가담했는지 익살스럽지, 하늘은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게 그 정도는 안다는 듯 말이 말한다 이건 우리의 사소한 역사였지 연표를 찍으며 까마득해지는 놀이가 겁도 없이 잠잠한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이제는 별만 보아도 얼굴이 붉다 별과 우리의 거리가 사이가 아니라 차이라는 사실처럼 지리멸렬하는 당분간 벽 곳곳을 두드릴 테지 말은 망치가 되어 당분간은 탕아가 되어 굴러가도 모를 일이지. 바깥에 있는 별의 발끝까지 그러나 이것도 신나는 일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거리쯤에 서서 그림자의 키를 재어나 볼까. 공원엔 창문이 없지. 마로니에 사이로 비친 머릿결이 여기 어디에도 있을까 누수가 있던 천장을 보며 검은 옷을 입은 숲의 사제들이 줄지어 서서 기도문 외우는 소리를 듣는다. 아이가 잠시 멈춘 그곳에 햇살도 오래 머물다, 소문만 무성하게 죽은 자리에는 낙엽이 쌓여 간다. 적색 우레탄으로 된 트랙 위에서 육상부 학생들의 기합소리가 이따금씩 바람에 섞이고, 고무로 된 심장을 반복해서 움켜잡아보는 음성은 언제나 붉다. 이마 위에 보름달이 뜰 때마다 그곳에서도 밥 짓는 부족이 살 거라던 너의 말과, 멀리서 보면 세상도 먹음직스러운 게 되었다. 산책로 주변으로 야트막한 강아지풀이 흔들릴 때마다 누군가는 발가락이 아프다, 흐린 눈을 닦자 가로등 불빛들이 공원을 줍는다. 문틈에 서 있는 그림자에 물을 주면 팔부터 가지가 났다. 가지는 자라서 집의 골격 따라 구불구불 기어다니고 보름이면 우람했다. 그 품속에 안겨 잠들고 싶었던 여름을 잊으면 살갗에도 곡식이 나고 가슴에는 붉은 사과가 떨어졌다. 우리는 이브인 걸까 아담인 걸까 성경 어디에도 가을 산처럼 단단해질 잠언을 찾을 수 없던 우기의 시절 지나고, 갈변하는 성장점 사이에서도 유독 붉던, 대충 먼지만 닦아 한 입 베어 물었던 충만한 과육에 대하여 오래도록 누군가는 그것을 과욕이라 오독했었나 문틈에 서 있는 그림자는 명제가 되어가는 혼자의 공식이었나. 검은 철봉에 매달려 놀고 있는 그리움들, 저 튼튼한 병세 잎사귀 하나로 서로의 형식을 가려주는 남녀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기침을 하고 자정이 되어 내일이 도착하면 우리는 새물을 받는다. 발걸음은 숨을 모으는 행위다. 부동산 아저씨는 나에게 칠천짜리 반지하방을 보여 주겠다고 한다. 이만 한 방이 없다고, 운이 좋은 거라고, 목이 마르다. 반지하방은 녹슨 입을 벌리고 있다. 안에 아직 아이가 살고 있다. 그 아이는 처음 본 사람에게만 다음을 약속한다. 아저씨는 두 번째 반지하방이 있다고 한다. 목이 탈 것만 같다. 육천이다. 육천짜리 반지하방은 입을 더 크게 벌리고 있다. 이정도면 빛도 많이 들어오는 거예요, 잠깐 살찐 길고양이를 생각했다. 그거 살이 아니라 부종이라는 말을. 조도는 반지하방의 가장 소중한 식솔 어렸을 때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었다. 어머니는 늘 비슷한 걸 사주셨다. 갖고 싶은 장난감을 가진 적은 없었지만 만족하는 표정을 배웠다. 비슷하게만 살면 비슷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명함을 건네는 아저씨. 스위치를 딸각거릴 때마다 오후 두 시보다 밝은 허기가 갈비뼈를 들췄다가 감췄다. 흰 종이에 한글로 갈겨쓴 숫자가 육친으로 보인다. 기침을 한다. 엎드려 자는 아이를 선생님은 가만두셨다. 책상 밑에 천식약이 굴러다녀도 선생님은 가만두셨다. 하늘이 하늘을 넘어갈 때까지 선생님은 가만두셨다. 아이는 침을 흘리고 있다. 침은 종이배를 흘려보내고 뾰족한 돛은 우리가 아파해야 할 안부. 선생님은 피를 흘리면서도 가만두시겠지. 수위아저씨가 스위치를 누르자 사람들이 바퀴벌레처럼 밖으로 흩어진다. 아이는 아직 자고 있다. 아이는 아직 꿈에서 나오지 못했다. 선생님은 바빠요 늘 문이 닫힌다. 계단이 길어진다. 복도는 몽유병을 고치지 못했다. 유리창은 질 좋은 간지였다. 선생님은 가만두신다. 오늘도 두고 나오신다. 

Ⓒ차서영
Ⓒ차서영

언젠가, 우리가 나눈 대화는 시간이 흘러 담배꽁초가 짓이겨져 쌓인 재떨이처럼, 되돌릴 수 없는 한숨이었다. 나는 그런 걱정들을 애정이라 믿으며 견뎌온 수많은 계절을 빈 앨범에 끼워넣고 있다. 사년 전 이맘때 내가 써둔 시들을 행과 연을 무너뜨리고, 다시 보고 있자니 세아야. 너는 누구였느냐? 너는 심연이었다. 너는 모반이었다. 너는 착란이었다가 확신이었다가, 하루를 다 버려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었다. 나는 너를 데리고 이 집 저 집 밥을 구하러도 다녔고, 이 술 저 술 취하려고 용을 쓰러도 다녔고, 이 책 저 책 안심되지 않는 마음을 잠재우려 빚을 키우기도 했었다. 세아 너 하나를 완성하려고 어떤 유혹은 잠자코 받아들이기만 한 적도 있었으나, 결코 훼손시킬 수 없었던 건 다름 아닌 나의 유년. 그 희미한 보조개가 좋았다. 보조개 속에서 피어나는 코미디가 좋았고, 여력도 없으면서 나를 보고 희망이라 말하시는 부모님의 전지전능함이 좋았다. 그러나 실력 없는 신은 배반당하는 법. 순수한 사랑은 현실 앞에 쉬이 고꾸라지고 마는 법. 나는 통속적인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때 세아 너 여린 손도 놓치고 말았나 보다. 가끔 꿈에서 네가 내게 하는 말들이 궁금해, 잠에서 깨고 나서도 허공에 그려진 네 입술을 유심히 살폈지만 너는 내게 끝내 그 비밀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네가 떠나간 이유. 네가 나로부터 자유를 찾은 이유. 그리하여 내 시에는 자유가 없는 어떤 공화국이 도래하여, 온통 보잘것없는 이념을 무기삼아 머리를 겨누는 오늘날에 이어지기까지, 내가 너를 놓지 못하는 이유. 세아 너는 다 알고 있지? 너의 일기장에 기록된, 나 없는 동안 나로써 씌어진 역사가 가진 비밀을. 너는 다 알고 있다. 접근하면 할수록 더 두꺼운 문을 내려 닫으며 깊은 잠에 빠지는 우리. 나는 너의 일기장을 훔친, 그날 이후부터 시를 쓸 수 없다. 시가 없는 세상에서 오지 않는 세아 너를 기다리고 있다.


"누나의 사진과 나의 글, 생각만 해도 좋지 않아?" <무드에 관하여>는 차서영 작가의 사진과 김해경 작가의 글로 구성된 사진에세이 단편입니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밤에 찾아옵니다.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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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는 다양한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그 어떤 장르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가진 에세이를 통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때로는 희망차고 때로는 비참할 이야기. 그러나 아마추어처럼 달려들고 프로처럼 진지할 이야기. 변화가 두렵지만 변화해야 할 때도, 견디는 게 지겹지만 견뎌야 할 때도, 우리는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네, 우리는 영원히 쓸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달라질 것입니다. 견딜 때보다 벗어날 때 더욱 성장하는 가재처럼, 벗어남이 무한하다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영원처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술처럼 영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물성과 해체』의 공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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