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해경

무드에 관하여 ep.3

초록, 초록, 그리고 초록

2023.05.31 | 조회 611 |
0
|
첨부 이미지

초록, 초록, 그리고 초록

밤거리를 걷는다. 그뿐일 테지만, 무언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를 안았다. 이마저도 잘못이라면 잘못된 계절에 나는 살고 있다. 의미를 두지 않는 단어들 사이에서 나 또한 부단히 유약해지면서, 작은 이파리. 작디 작은 여름의 태동. 그것을 느끼고 있다.

Ⓒ차서영
Ⓒ차서영

너의 이름은 초록이었다. 나는 너를 불렀다. 너는 돌아보았고, 우리는 이것을 문화라 하였다. 우리가 이룩한 문화 속에서, 어떤 것들은 문명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러자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 입에서 초록이 태어나기도 했다. 우리는 그것을 사이비라 하였다. 수많은 사이비로부터 문명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기도를 했다. 춤을 추었다. 비의 자세를 익혔다. 억장이 무너지는 세월 속에서 지칠 줄 모르고 젖었다. 너의 안색이 조금씩 변해갈 때마다 나는 새로운 태도를 갖춰야만 했다. 초록의 질서를 문장으로 만들어야 했다. 지성을 갖춘 초록들이 집을 에워싸고 농성을 벌였다. 나는 너를 꼭 안은 채, 이것은 마지막 문명입니다. 우리가 이룩해 온 문화를 해치지 마세요. 그만 두세요.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그러나 초록들은 총과 수류탄으로 몸을 무장하고는 담장을 부수고 진입하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던 너는 눈을 뜨지 못했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두 팔을 벌려 초록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지만, 내 얼굴은 흙더미에 묻혔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너를 잡아갔다. 너의 쓸모만을 생각하는 초록들이었다. 별이 비처럼 떨어지는 밤이었다. 그날 이후로 내가 줄곧 생각해왔던 것은 초록의 역사요, 초록의 정치였다. 승자의 악랄한 필법이 역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승자의 교활한 전략이 정치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삶의 의미를 모두 말소 당한 채 너에게 편지를 썼다. 버티지 마라. 우리는 이미 숭고하다. 초록이여. 너의 진정한 초록으로 초록의 생을 마감시켜라. 내게 여름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총칼보다 날카로운 태양빛을 내 목에 겨눈 채, 너를 끌고 가던 사이비 초록으로부터, 내 무기력의 끈질긴 내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들의 문법과, 잔인한 문명과, 무자비한 예술 속에서 해방될 길 없이 통치 당하며 나의 여름은 너의 생 마감한 그 자리에서 오늘날까지 퇴색을 거듭하고 있다.

Ⓒ차서영
Ⓒ차서영

그러나 초록. 초록. 그리고 다시 초록이 되는 동안에 나는 몇 번이고 이 밤거리를 걷는다. 아침엔 남자들이 몸을 팔고, 저녁엔 시인들이 옷 벗는 이 거리에서, 아무도 눈 뜨지 않는 밤에 나 혼자 나와 너를 그리워 한다. 사이비 초록의 더러운 쾌락주의와 송곳니 빠진 구호문학에 맞써 시위를 한다. 장마보다는 소나기의 마음으로, 태풍보다는 돌풍의 마음으로, 마음보다는 몸으로 이 길을 헤쳐 나가고 있다. 유순했던 우리의 문화여. 우리의 문명이여. 그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꽁꽁 숨겨둔 비밀처럼 나의 문법 속에서 희박하게나마 빛을 발하고 있다. 그것은 여전한 초록이다. 여전한 순수이며, 여전한 숭고이다.

우리가 신으로 모셨던 낭만의 성체는 아직도 그 집 마룻바닥 아래 깊이 묻혀 있다. 철조망으로 휘둘러진 삼엄한 경계 속에, 누군가 자신의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그 모든 총칼의 살기를 뚫고 낭만을 부활시키려 했다. 너를 보낸 지 네 해가 지났을 무렵의 소식이었다. 나는 기사단을 꾸리려 작당하였다. 초록의 기사단은 그러나 실패로 돌아갔다. 기사 가운데 한 놈은 사이비였다. 그 놈은 시를 쓰는 자였다. 본인을 시인이라 소개하면서 보드카를 홀짝였다. 남자들에게 찝적대면서 시는 이런 거라고, 시를 좀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놈을 죽이려고 했다. 우리의 문화를 저해하고, 우리의 생활을 욕되게 만드는 사이비의 전형이었으므로.

그러나 초록의 미덕은 용서와 화해로부터 비롯된다는 너의 가르침 속에, 우리는 그것을 낭만으로 무마시켜주려 했다. 여기서 모든 죄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초록은 죄와 벌이었다. 초록은 법이었고, 초록은 예술로부터 영원히 제명되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레지스탕스처럼 내밀하게 아껴온 우리의 문화와 문명을 스스로 와해시켜버린 것이다. 그 뒤로 너 또한 내 꿈속에 등장하지 않았다. 낭만은 썩어문드러진 현실 속에서, 옛 일을 추억하는 몇 명의 실어증환자들을 통해 초록의 야사로 기록될 뿐이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차서영
Ⓒ차서영

나는 백색 같이 살아왔다. 여름이 오면 눈을 감았다. 이마 위로 세찬 바람이 불어야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말며 그 어떤 문명도, 종교도 삼가며. 혈혈단신으로 속죄하며 살아왔다. 오직 한 가지 포기 못한 것은 쓰는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이것을 초록의 흔적이라 말하며 내 지난한 생을 동정하고 있다. 그러나 초록.

너와 함께 지저분한 흔적들을 쫓아가다 보면, 아주 옛날 우리가 살던 집이 나온다. 장미꽃이 떨어진 마당으로 우거져 있는 무명의 풀잎들. 그 속에서 작은 심장을 움켜쥐고 태양을 응시하고 있는 단 하나의 낭만을 본다. 나의 부모요, 나의 신이다. 이젠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너는 죽었고 나는 감염되었고, 사이비는 국가다.

초록의 영원을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초록을 슬퍼하며 고꾸라지는 나라는 초록을, 더이상 거두지 못할 오늘에 나는.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첨부 이미지

"누나의 사진과 나의 글, 생각만 해도 좋지 않아?" <무드에 관하여>는 차서영 작가의 사진과 김해경 작가의 글로 구성된 사진에세이 단편입니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밤에 찾아옵니다. 

 

첨부 이미지

물성과 해체는 글을 매개로 삶과 사람, 그리고 사랑을 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방황했습니다. 잡으면 물성이 되지만, 놓치거나 놓쳐야만 했던 일들은 사랑을 다- 헤쳐 놓았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의 전리품을 줍습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요. 그리고 여전히 방황- 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또 찾아 오겠습니다. 

물성과해체 김해경 올림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물성과 해체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작가 이광연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ep.9

쉬운 안부. 친애하는 당신에게 반가워요.잘 계시나요? 소식 나눈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오늘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믿고 싶습니다. 당신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어도 같은 하늘

2023.07.20·조회 697
작가 강나리 · 멤버십

플레이리스트, 끄적 ep.7 왜 날?

나는 딱딱해진 사람. 내 만남들은 좀처럼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부글부글 침잠하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면 체하고 통화가 끝나면 목구멍이 몸살을 앓던 인연의 연속. 더이상 편안할

2024.03.04·조회 513
작가 손자영 · 멤버십

나는 누구, 여긴 어디? ep.1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영상 설치 작품 <섬아연광>, 백종관, 2023,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젊은 모색 2023 : 미술관을 위한 주석'. ‘나는 누구, 여긴 어디?’는 우리가 잘 아는 공간과 장소를 재해석한 영화와 영상 작품을 소개하는 연재 글이다. 여기서 ‘재해석’이란 우리가 잘 ...

2023.08.28·조회 1.19K
작가 김해경

[김해경] 라이팅룸 101호

반지하는 식상한가. 1 맨 처음 글을 쓴 날은 아마도 다섯 살,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좁은 빌라 마룻바닥에 엎더져 "엄마", "아빠", "자동차" 따위의 단어를 써냈던 날이었을 것이다. 삐뚤빼뚤한 글

2024.06.10·조회 491
작가 김해경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ep.16

마지막입니다. 친애하는 당신에게 쉽게 깨닫고 쉽게 사랑하는 천성을 이제는 버리기로 하자.

2023.09.28·조회 558
작가 강나리 · 멤버십

플레이리스트, 끄적 ep.6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

서울의 밤은 마땅히 잠에 들어야 할 시간에도 어찌나 소란한지! 조명에 소음에 눈 귀 쉴 틈 없는 서울 사람들의 마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적막하다. 애써 잠에 들려해도 빛이 빛을 비춰

2024.01.15·조회 615
© 2026 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 글을 매개로 맺어질 수 있는 삶과 사람, 사랑

뉴스레터 문의mulhae.official@gmail.com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8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