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해경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ep.16

마지막입니다

2023.09.28 | 조회 222 |
0
|

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친애하는 당신에게

 

쉽게 깨닫고 쉽게 사랑하는 천성을 이제는 버리기로 하자.

내가 요즘 쓰고 있는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그간 당신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속이 강한 몽돌 같은 반면 나는 조금의 힘만 주어도 부서져버리는 시멘트 조각 같습니다. 모나고 뾰족한 이 성정을 용서해주세요. 당신은 언제고 나에게 좋은 말과 꽃을 전달했지만 마음 속 화염이 그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나는 재로 쌓은 성 안에 몸을 숨기고 혼자 고요히 잠들어갑니다.

당신과 함께 글을 쓰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의 결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글을 쓸 때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정열을 가졌단 사실과, 남들과 싸우기보단 자기 자신과 싸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로써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또 먼 길을 혼자 가야 할 때입니다. 문학은 바보 같이 생긴 손가락에 맡겨두고 이 정신, 이 본질은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당신은 앞으로 무엇을 쓸 건가요? 그것이 무엇이든 나와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당신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줘요. 힘이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우리가 그것을 통해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삶을 줘요. 당신의 글은 아주 고리타분한 표현으로 치면 화수분인 셈입니다. 나는 당신의 글을 읽다 가끔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남는 건 뭘까? 당신의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방전돼버리면, 당신의 삶은 무엇으로 불을 켜나요? 나는 종종 걱정을 했습니다. 이렇게 다 소진해버려도 괜찮을 당신의 애정의 원천이, 조금씩 지쳐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선 잘 이야기할 줄 모릅니다. 그 사람들에게 줄만한 적당한 에너지도 없습니다.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아파하고 있을 때 문득 찾아온 당신처럼, 내 말이 다 맞다며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던 당신처럼, 몇몇 애인들은 보약처럼 달여먹고 나서야 겨우 인간다워지는 개입니다. 당신과 편지를 주고 받은 몇 달 간 나는 꽤 의연한 사람이 되었고, 모난 말들을 참고 견디는 성미도 꽤 길렀습니다. 그동안 당신은 말도 못하고 아팠겠죠? 미안합니다. 편지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은 미안하다는 것뿐이군요. 이또한 미안합니다.

이제 우리 서로를 놓읍시다. 나는 당신의 에너지로도 부족한 이 비틀거림을 차라리 맹신하기로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서는 정신을 경계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속내를 꽁꽁 숨기곤 착한 솜씨로 칼을 밀어넣는 세상 속에서, 나 또한 더이상은 다치지 않기 위해 생활의 본령을 바로 세우기로 작정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도 이제 당신의 글을 쓰십시오. 응원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앞으로 햇빛이 없는 곳으로 여행을 갈 겁니다. 그곳에서 어둠의 생활을 익힐 것입니다. 어둠의 얼굴로 밥을 짓고 어둠의 손으로 악수를 건네며 어둠의 족속들과 자유와 사랑과 평화를 약속할 것입니다. 당신과의 편지는 마치 긴 여름 같았습니다. 이게 저의 마지막 여름인 듯, 행복했었고 슬펐었고 화도 났었습니다만, 사랑이 아닐 순 없었습니다.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길 겁니다. 그러니 걱정마세요. 내가 만일 어둠의 불빛 아래서 모든 어둠의 언어를 배워 숙달된 솜씨로 새로운 글을 가져 온다면 당신께 가장 먼저 선보이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몸 건강히.

어렵게 깨달은 것 또한 쉽게 버리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늬를 바꾸는 요괴이고, 그런 곁에 무엇을 둔다는 건 사람의 하염없는 욕심이기도 하다. 나는 무엇을 욕심냈던가. 또 무엇을 내다버렸던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토록 영원한 의심. 삶이라는 질긴 회의감. 어금니로 질겅질겅 씹어본다. 나는 참, 떫은 놈이다.

김해경 드림

 


김해경과 이광연 작가의 편지, 매주 찾아옵니다:)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______________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는 다양한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그 어떤 장르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가진 에세이를 통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때로는 희망차고 때로는 비참할 이야기. 그러나 아마추어처럼 달려들고 프로처럼 진지할 이야기. 변화가 두렵지만 변화해야 할 때도, 견디는 게 지겹지만 견뎌야 할 때도, 우리는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네, 우리는 영원히 쓸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달라질 것입니다. 견딜 때보다 벗어날 때 더욱 성장하는 가재처럼, 벗어남이 무한하다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영원처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술처럼 영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물성과 해체』의 공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물성과 해체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뉴스레터 문의 : mulhae.official@gmail.com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