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에게
쉽게 깨닫고 쉽게 사랑하는 천성을 이제는 버리기로 하자.
내가 요즘 쓰고 있는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그간 당신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속이 강한 몽돌 같은 반면 나는 조금의 힘만 주어도 부서져버리는 시멘트 조각 같습니다. 모나고 뾰족한 이 성정을 용서해주세요. 당신은 언제고 나에게 좋은 말과 꽃을 전달했지만 마음 속 화염이 그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나는 재로 쌓은 성 안에 몸을 숨기고 혼자 고요히 잠들어갑니다.
당신과 함께 글을 쓰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의 결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글을 쓸 때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정열을 가졌단 사실과, 남들과 싸우기보단 자기 자신과 싸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로써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또 먼 길을 혼자 가야 할 때입니다. 문학은 바보 같이 생긴 손가락에 맡겨두고 이 정신, 이 본질은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당신은 앞으로 무엇을 쓸 건가요? 그것이 무엇이든 나와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당신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줘요. 힘이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우리가 그것을 통해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삶을 줘요. 당신의 글은 아주 고리타분한 표현으로 치면 화수분인 셈입니다. 나는 당신의 글을 읽다 가끔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남는 건 뭘까? 당신의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방전돼버리면, 당신의 삶은 무엇으로 불을 켜나요? 나는 종종 걱정을 했습니다. 이렇게 다 소진해버려도 괜찮을 당신의 애정의 원천이, 조금씩 지쳐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선 잘 이야기할 줄 모릅니다. 그 사람들에게 줄만한 적당한 에너지도 없습니다.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아파하고 있을 때 문득 찾아온 당신처럼, 내 말이 다 맞다며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던 당신처럼, 몇몇 애인들은 보약처럼 달여먹고 나서야 겨우 인간다워지는 개입니다. 당신과 편지를 주고 받은 몇 달 간 나는 꽤 의연한 사람이 되었고, 모난 말들을 참고 견디는 성미도 꽤 길렀습니다. 그동안 당신은 말도 못하고 아팠겠죠? 미안합니다. 편지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은 미안하다는 것뿐이군요. 이또한 미안합니다.
이제 우리 서로를 놓읍시다. 나는 당신의 에너지로도 부족한 이 비틀거림을 차라리 맹신하기로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서는 정신을 경계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속내를 꽁꽁 숨기곤 착한 솜씨로 칼을 밀어넣는 세상 속에서, 나 또한 더이상은 다치지 않기 위해 생활의 본령을 바로 세우기로 작정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도 이제 당신의 글을 쓰십시오. 응원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앞으로 햇빛이 없는 곳으로 여행을 갈 겁니다. 그곳에서 어둠의 생활을 익힐 것입니다. 어둠의 얼굴로 밥을 짓고 어둠의 손으로 악수를 건네며 어둠의 족속들과 자유와 사랑과 평화를 약속할 것입니다. 당신과의 편지는 마치 긴 여름 같았습니다. 이게 저의 마지막 여름인 듯, 행복했었고 슬펐었고 화도 났었습니다만, 사랑이 아닐 순 없었습니다.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길 겁니다. 그러니 걱정마세요. 내가 만일 어둠의 불빛 아래서 모든 어둠의 언어를 배워 숙달된 솜씨로 새로운 글을 가져 온다면 당신께 가장 먼저 선보이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몸 건강히.
어렵게 깨달은 것 또한 쉽게 버리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늬를 바꾸는 요괴이고, 그런 곁에 무엇을 둔다는 건 사람의 하염없는 욕심이기도 하다. 나는 무엇을 욕심냈던가. 또 무엇을 내다버렸던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토록 영원한 의심. 삶이라는 질긴 회의감. 어금니로 질겅질겅 씹어본다. 나는 참, 떫은 놈이다.
김해경 드림
김해경과 이광연 작가의 편지, 매주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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