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해경

무드에 관하여 ep.9

고마웠습니다.

2023.08.17 | 조회 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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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의 프로필 이미지

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 글을 매개로 맺어질 수 있는 삶과 사람,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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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웠습니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종일토록 밤을 샜는데, 골목 구석구석 누군가 떨어뜨린 단추처럼 피어 있는 민들레를 보고는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나의 부끄러움이 어떤 세계에선 꽃이 되었다는 전설을 믿을 수 없었는데, 여름의 끝자락에서도 청승맞게 비를 맞으며 한떨기 꽃잎을 지키느라 추억도 잊은 채 애쓰는 너의 모습을 보고는 이내 단념하고 말았다.

쓴다는 사실이 나를 온전히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커피에 연유를 탄 듯 기쁨에 어리어 있는 내 어둠의 완곡함을 너도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많은 글을 써왔던 건지도 모른다. 꿀이 발린 칼을 계속 핥다가 죽는 곰처럼, 길을 잃어도 모르는 채, 아니 어쩌면 모른 체 하면서 우리는 이미 엇나간 길을 계속 걸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며 사는 이 계절에, 남몰래 작별하기도 하고. 답답한 가슴 풀고자 술도 들이켜보는 것이겠지만. 그 누가 내 마음을 알까?

이건 원리다.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챌 수 없다는 원리. 누구도 내 눈빛에 서려 있는 무드를 간파할 수 없다는 원리. 그렇게 만들어 낸 환심 같은 자존심. 나는 신전보다 높은 그 자존심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본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쓴다는 수치심만 든다. 그럼에도 내가 멈추지 않는 까닭은 입 안 가득 머금은 피의 달콤함이 가을이 왔음을 알리고, 혼자 웃었다 멈췄다 하는 인형을 손에 꼭 쥐고 달려오는 그 소녀. 그 소녀의 얼굴 위로 뜨는 노을이 마지막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에게 손을 내밀어, 소녀가 약속했던 것은 쏟아지는 유성우 사이에서 홀로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겠다는 말이었으나 인디언의 언어처럼, 강물을 지키던 한 사내의 사투리처럼 투박한 마음은 힘이 세서, 나를 넘어뜨리고 저 멀리 갔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이젠 내가 지키는 그 자리에서 소녀, 언제 오는가? 가끔 소원을 빌기도 했다.

고마웠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나의 세계에 와서 고마웠습니다.

밤이 오기를, 내 둥근 눈꺼풀까지 내려 앉은 어둠에도 별이 꽃처럼 피기를. 우리가 다시 센티멘탈을 외치고, 로맨틱을 선언하고 그 이면의 이면으로 돌아가 둥근 이불을 덮고 함께 잠들기를. 겨울 지나 봄 오면, 백야로 금이 간 북극성에도 꽃이 피기를. 그런 마음을 꿈꾸며 쓰고 또 쓴다. 소녀, 이젠 청년이 되었을까. 어떤 말이든 마음 해치는 일이었다면 송구합니다. 우리 세계에서 그럴 의도가 없다 할지라도 변명입니다. 나는 추악한 얼굴을 많이 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도 눈치가 없어, 태평하게 글이나 쓰고, 글을 많이 써서 그 속에 숨으려 했습니다. 여느 시인이나 여느 소설가가 그래왔듯이요. 내가 정말 나빴던 건, 여느 시인이나 소설가도 되어 보지 못하고 계속 숨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워서 용서했던 모든 글을

안녕.

사진 김해경
사진 김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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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사진과 나의 글, 생각만 해도 좋지 않아?" <무드에 관하여>는 차서영 작가의 사진과 김해경 작가의 글로 구성된 사진에세이 단편입니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밤에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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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는 글을 매개로 삶과 사람, 그리고 사랑을 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방황했습니다. 잡으면 물성이 되지만, 놓치거나 놓쳐야만 했던 일들은 사랑을 다- 헤쳐 놓았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의 전리품을 줍습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요. 그리고 여전히 방황- 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또 찾아 오겠습니다. 

물성과해체 김해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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