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광연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ep.9

쉬운 안부

2023.07.20 | 조회 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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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친애하는 당신에게

 

반가워요.잘 계시나요? 소식 나눈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오늘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믿고 싶습니다. 당신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어도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이상한 안도감으로 당신의 안녕을 바라요.

요즘 내내 비가 내려요. 하늘은 종일 우중충. 쉬지 않고 내리는 빗줄기에 젖은 거리는 마를 틈이 없습니다. 당신 마음의 거리는 어떤가요? 소나기처럼 들이차는 분주함에 축축하게 젖어 맥을 못 추리고 있나요? 갑작스레 가득 찬 먹구름에 우울해져 쨍한 웃음 지을 여유가 없나요?

이 여름의 한복판을 지나 당신께 닿을 오늘의 편지는 쉬운 마음으로 읽히고 싶습니다. 어려운 말과 고차원적 비유 없이도 당신 마음의 빗장을 열고 잠시나마 쉼 얻는 안부가 되고 싶어요.

우리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얼마나 고단한지. 나를 제외하고는 온전히 헤아릴 수 없어요. 우리가 어떤 노력하고 있는지, 살아내기 위해 얼마나 갖은 애를 쓰고 있는지. 어떤 날엔 다른 이에게 구구절절 말할 힘도, 시간도 없어서 다 내려놓고 눕고만 싶을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날엔 생기 넘치던 파가 파김치로 담가져 숨 죽듯이 활기차던 마음이 소금기 어린 일상에 절여져 흐물해질 때도 있습니다.

스위스 화가인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1853~1918)의 <삶에 지친 자들>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수사복을 입은 다섯 명의 사람이 갈색 장의자에 걸터 앉아있는 그림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지치고 어딘지 모르게 아파 보입니다. 작품을 보며 생각했어요. 의자에 걸터앉은 사람들.그들의 표정이, 간신히 부여잡은 두 손이, 앞을 마주할 힘없어 가라앉은 고개가, 어쩌면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새 없이 지쳐있을지도 모를 이 순간의 존재들이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요. 지쳤다는 건 그럼에도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예요. 완전히 끝나서 나아갈 수 없는 게 아니라 다시 힘차게 살기 위해 영혼과 몸이 갈구하는 휴식의 상태입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손을 모으고 있습니다.그럼에도 다시 살아내기 위해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빛나는 죽음을 향해 앞서서 가버린 어느 철학자의 기록을 읽어드립니다.

 

아침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린다. 가지 끝 작은 잎들까지 조용하게 기쁘게 흔들린다.흔들림들 사이로 빛들이 흩어져서 반짝인다.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간다.혼자서 둘이서 걸어간다.노란 가방을 멘 아이도 종종 걸음으로 걸어간다. 모두들 가로수 잎들처럼 흔들린다. 그들의 어깨 위에서 흩어진 빛들이 강 위의 파동처럼 반짝인다.고요함과 기쁨으로 가득해서 엄숙한 세상을 바라본다.그 한가운데 지금 나는 있다. - 아침의 피아노 , 32p , 한겨레출판, 김진영 저

 

저자가 목격했던 고요함과 기쁨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비가 그친 길을 걷다 빗방울 맺힌 가로수를 봤습니다. 회색 아스팔트 위에 물기 어린 초록 잎은 햇빛에 비춰 반짝였어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당신도 그럴 거예요. 몰아치는 폭우에 젖어버린 당신의 모습은 잠시 비춘 빛에도 환하게 일렁일 겁니다.

어딘가 걸터앉아 숨을 몰아쉴 때도. 물기 어린 눈망울로 간신히 두 손 맞잡고 있을 때라도. 다시 힘을 내기 위한 걸터앉음으로 겸손한 눈빛을 하고 있을 겁니다. 흔들리는 모든 몸짓이 아름다운 걸음으로 다시 화할 순간까지.

23.07.17

비가 잠시 그치고 햇살이 일렁이는 곳에서

이광연 드림


<비틀거리고 있습니다>는 매주 친애하는 당신을 찾아갑니다. 광연과 해경이 주고 받는 편지 속 친애하는 당신의 삶에서 부디 안식을 찾을 수 있길.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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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는 다양한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그 어떤 장르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가진 에세이를 통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때로는 희망차고 때로는 비참할 이야기. 그러나 아마추어처럼 달려들고 프로처럼 진지할 이야기. 변화가 두렵지만 변화해야 할 때도, 견디는 게 지겹지만 견뎌야 할 때도, 우리는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네, 우리는 영원히 쓸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달라질 것입니다. 견딜 때보다 벗어날 때 더욱 성장하는 가재처럼, 벗어남이 무한하다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영원처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술처럼 영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물성과 해체』의 공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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