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해경

무드에 관하여 ep.3

초록, 초록, 그리고 초록

2023.05.31 | 조회 2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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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초록, 초록, 그리고 초록

밤거리를 걷는다. 그뿐일 테지만, 무언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를 안았다. 이마저도 잘못이라면 잘못된 계절에 나는 살고 있다. 의미를 두지 않는 단어들 사이에서 나 또한 부단히 유약해지면서, 작은 이파리. 작디 작은 여름의 태동. 그것을 느끼고 있다.

Ⓒ차서영
Ⓒ차서영

너의 이름은 초록이었다. 나는 너를 불렀다. 너는 돌아보았고, 우리는 이것을 문화라 하였다. 우리가 이룩한 문화 속에서, 어떤 것들은 문명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러자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 입에서 초록이 태어나기도 했다. 우리는 그것을 사이비라 하였다. 수많은 사이비로부터 문명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기도를 했다. 춤을 추었다. 비의 자세를 익혔다. 억장이 무너지는 세월 속에서 지칠 줄 모르고 젖었다. 너의 안색이 조금씩 변해갈 때마다 나는 새로운 태도를 갖춰야만 했다. 초록의 질서를 문장으로 만들어야 했다. 지성을 갖춘 초록들이 집을 에워싸고 농성을 벌였다. 나는 너를 꼭 안은 채, 이것은 마지막 문명입니다. 우리가 이룩해 온 문화를 해치지 마세요. 그만 두세요.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그러나 초록들은 총과 수류탄으로 몸을 무장하고는 담장을 부수고 진입하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던 너는 눈을 뜨지 못했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두 팔을 벌려 초록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지만, 내 얼굴은 흙더미에 묻혔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너를 잡아갔다. 너의 쓸모만을 생각하는 초록들이었다. 별이 비처럼 떨어지는 밤이었다. 그날 이후로 내가 줄곧 생각해왔던 것은 초록의 역사요, 초록의 정치였다. 승자의 악랄한 필법이 역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승자의 교활한 전략이 정치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삶의 의미를 모두 말소 당한 채 너에게 편지를 썼다. 버티지 마라. 우리는 이미 숭고하다. 초록이여. 너의 진정한 초록으로 초록의 생을 마감시켜라. 내게 여름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총칼보다 날카로운 태양빛을 내 목에 겨눈 채, 너를 끌고 가던 사이비 초록으로부터, 내 무기력의 끈질긴 내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들의 문법과, 잔인한 문명과, 무자비한 예술 속에서 해방될 길 없이 통치 당하며 나의 여름은 너의 생 마감한 그 자리에서 오늘날까지 퇴색을 거듭하고 있다.

Ⓒ차서영
Ⓒ차서영

그러나 초록. 초록. 그리고 다시 초록이 되는 동안에 나는 몇 번이고 이 밤거리를 걷는다. 아침엔 남자들이 몸을 팔고, 저녁엔 시인들이 옷 벗는 이 거리에서, 아무도 눈 뜨지 않는 밤에 나 혼자 나와 너를 그리워 한다. 사이비 초록의 더러운 쾌락주의와 송곳니 빠진 구호문학에 맞써 시위를 한다. 장마보다는 소나기의 마음으로, 태풍보다는 돌풍의 마음으로, 마음보다는 몸으로 이 길을 헤쳐 나가고 있다. 유순했던 우리의 문화여. 우리의 문명이여. 그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꽁꽁 숨겨둔 비밀처럼 나의 문법 속에서 희박하게나마 빛을 발하고 있다. 그것은 여전한 초록이다. 여전한 순수이며, 여전한 숭고이다.

우리가 신으로 모셨던 낭만의 성체는 아직도 그 집 마룻바닥 아래 깊이 묻혀 있다. 철조망으로 휘둘러진 삼엄한 경계 속에, 누군가 자신의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그 모든 총칼의 살기를 뚫고 낭만을 부활시키려 했다. 너를 보낸 지 네 해가 지났을 무렵의 소식이었다. 나는 기사단을 꾸리려 작당하였다. 초록의 기사단은 그러나 실패로 돌아갔다. 기사 가운데 한 놈은 사이비였다. 그 놈은 시를 쓰는 자였다. 본인을 시인이라 소개하면서 보드카를 홀짝였다. 남자들에게 찝적대면서 시는 이런 거라고, 시를 좀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놈을 죽이려고 했다. 우리의 문화를 저해하고, 우리의 생활을 욕되게 만드는 사이비의 전형이었으므로.

그러나 초록의 미덕은 용서와 화해로부터 비롯된다는 너의 가르침 속에, 우리는 그것을 낭만으로 무마시켜주려 했다. 여기서 모든 죄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초록은 죄와 벌이었다. 초록은 법이었고, 초록은 예술로부터 영원히 제명되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레지스탕스처럼 내밀하게 아껴온 우리의 문화와 문명을 스스로 와해시켜버린 것이다. 그 뒤로 너 또한 내 꿈속에 등장하지 않았다. 낭만은 썩어문드러진 현실 속에서, 옛 일을 추억하는 몇 명의 실어증환자들을 통해 초록의 야사로 기록될 뿐이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차서영
Ⓒ차서영

나는 백색 같이 살아왔다. 여름이 오면 눈을 감았다. 이마 위로 세찬 바람이 불어야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말며 그 어떤 문명도, 종교도 삼가며. 혈혈단신으로 속죄하며 살아왔다. 오직 한 가지 포기 못한 것은 쓰는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이것을 초록의 흔적이라 말하며 내 지난한 생을 동정하고 있다. 그러나 초록.

너와 함께 지저분한 흔적들을 쫓아가다 보면, 아주 옛날 우리가 살던 집이 나온다. 장미꽃이 떨어진 마당으로 우거져 있는 무명의 풀잎들. 그 속에서 작은 심장을 움켜쥐고 태양을 응시하고 있는 단 하나의 낭만을 본다. 나의 부모요, 나의 신이다. 이젠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너는 죽었고 나는 감염되었고, 사이비는 국가다.

초록의 영원을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초록을 슬퍼하며 고꾸라지는 나라는 초록을, 더이상 거두지 못할 오늘에 나는.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누나의 사진과 나의 글, 생각만 해도 좋지 않아?" <무드에 관하여>는 차서영 작가의 사진과 김해경 작가의 글로 구성된 사진에세이 단편입니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밤에 찾아옵니다.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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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는 다양한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그 어떤 장르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가진 에세이를 통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때로는 희망차고 때로는 비참할 이야기. 그러나 아마추어처럼 달려들고 프로처럼 진지할 이야기. 변화가 두렵지만 변화해야 할 때도, 견디는 게 지겹지만 견뎌야 할 때도, 우리는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네, 우리는 영원히 쓸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달라질 것입니다. 견딜 때보다 벗어날 때 더욱 성장하는 가재처럼, 벗어남이 무한하다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영원처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술처럼 영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물성과 해체』의 공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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