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슬기

시와 노가리 ep. 1 한 쌍의 청혼

진은영&배수연 시인의 <청혼>

2023.05.21 | 조회 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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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들어가며 | 노가리를 앞에 두고

 

술 좋아하는 사람의 일화가 있다. 그는 단지 술자리의 정취가 좋아서, 값싼 노가리 안주를 두고 소주잔을 홀짝이며 밤새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소주 한두 잔 정도였던 그의 주량은 이 사람과 저 사람과 술잔을 부딪히며 금세 늘어났다. 대작할 이가 없던 어느 날 저녁, 그는 어떻게 하면 술을 더 즐겁게 마실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밤새 고민하던 그의 결론은 술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전국의 소주와 막걸리, 전통주들. 그는 곧 한국의 술을 섭렵했고, 사케, 위스키, 럼, 보드카, 와인 등 외국의 술까지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이제는 머릿속에 술 생각밖에 없던 그는 결심했다. 술을 직접 담가 보기로. 술 좋아하던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제 술이라는 자리에 시(詩)를 넣어보는 건 어떤가. 노가리 한 마리를 두고 소주잔을 홀짝이는 대신 시집을 펼쳐 놓고 이야기한다면. 금세 독서량이 늘어나고, 어느 날 저녁, 어떻게 하면 시를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시집을 수집하기로 마음 먹는다면. 곧 한국의 시집들을 섭렵하고 외국의 시집들을 수집하다가, 시를 직접 써보기로 작정한다면. 술이 좋아서 술에 절어 사는 이가 취객(醉客)인 것처럼, 시가 좋아서 시에 절어 사는 시객(詩客)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시의 방을 들락날락 하는 시 손님. 

비속어로 오해받기도 하는 ‘노가리 까다’는 표준어다. 그 말은 원래 명태가 한꺼번에 많은 새끼(노가리)를 낳는대서 유래됐다. 수다의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나는 그 말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 노가리 안주 하나를 앞에 두고 밤새도록 이야기하는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허물없는 사람들과 소주 한 잔과 노가리를 앞에 두고 노가리를 까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맨정신이어도 좋고, 반쯤 취해도 좋다. 나를 잊어버릴 만큼 즐겁다는 얘기다. 

시를 읽고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워야 한다. 타자니 주체니, 서정이니 실험이니, 선험이니 경험이니. 어려운 말들은 비평가들에게 남겨두고,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좋았다든가 술 한 잔이 생각난다든가 혹은 오래전 헤어진 연인의 뒷모습이 생각났다든가 하는 이야기로 채워져야 한다. 시집 한 권을 앞에 두고, 허물없는 사람 하나를 앞에 두고, 노가리를 까듯이. 

노가리 안주 하나를 앞에 두고 밤을 지새듯이.

김슬기

 

한 쌍의 청혼

 

나이를 먹었음을 깨닫게 하는 몇 가지의 단서가 있다. 매일 오르던 언덕을 단숨에 오르지 못하고 한숨을 골라야 한다거나, 넘어져서 까진 곳이 잘 낫지 않는다거나. 그런데 그보다 이제는 정말 물러설 곳이 없구나싶은 결정적 단서는 지인들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듣는 일이 많아졌을 때. 인생을 잘 살아온 것인지, 혹은 받은 만큼 뱉어 내야 하는 것인지 청첩장이 수북이 쌓여 간다. ‘결혼 적령기라는 말이 이제는 정말 눈에 띄게 체감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 들어서 일까. 유튜브에 결혼 관련 영상이 알고리즘으로 등장하는 일이 늘었다. 대부분은 포기해야겠다생각이 드는 뉴스 기사와 가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희망을 품게 만드는 영상이나 음악도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청혼에 관련된 영상과 음악이다. 특히 청혼을 다루는 음악들은 , !’ 하고 결심하게 만드는 설렘과 설득력이 있다.

한참 청혼의 설렘을 따라가다가 찾게 된 것은 가수 이석훈과 유연정의 <Marry me><Marry you>의 라이브였다. 이 라이브에서 비 내리는 날에 우산이 돼 주고로 시작하는 이석훈의 세레나데를 유연정은 나는 서툴지만 세상의 예쁜 말만 당신에게라고 응답한다. ‘나와 결혼해 줄래요라는 가사로 노래는 끝이 나고,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싱긋 인사한다. 세레나데를 통한 청혼이다. 이 영상을 감상하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시들이 있었다. 바로 진은영 시인의 <청혼>과 배수연 시인의 <청혼>이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도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진은영, <청혼>

 

두 시에는 묘한 대척점이 있다. 비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손바닥을 두드리는 여름과, 피어오른 수증기가 머리에 폭설로 내려앉는 겨울. 새의 둥지를 부수지 않고 너를 꼭 안아 줄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겠다는 다짐. 마치 겨울을 지내고 있는 사람이 여름을 지내고 있는 사람에게 고백하듯이. 여름에 서 있는 사람이 겨울에 서 있는 사람에게 화답하듯이. 다른 배경의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서로를 알아보고 있다.

제목만을 공유하고 따로 쓰인 시지만, 왠지 서로가 서로에게 청혼하는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언어의 세레나데인 시를 통한 한 쌍의 청혼. 두 시를 포개어 놓으면 왠지 서로 다른 그림의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것 같다. 결혼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캔버스로 진입하는 의식이고, 청혼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서로의 언약인 것이다.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쉿, 숲 속의 양들이 춤을 추고 있네
캐럴에 흔들리는 종처럼 신이 나기 시작했어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볼래

너에게 줄 선물이 있어
이런, 목에 깃털이 잔뜩 뽑혀 있네
빨갛게 부푼 곳에 맑은 꿀을 발라 줄게
조금만 조금만 가까이 와 봐

바람 없는 날의 나뭇잎은 정말
움직이지 않는 걸까
우리가 함께 서 있을 때에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나의 지친 헝겊들을 네가 알아봐 줄까
너의 외투 속을 날아다니는 작은 새
그 새의 둥지를 부수지 않고
너를 꼭 안아 줄 수 있을까


선물 상자를 열면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온다
앵두들이 한 움큼 익어 가고 있을 거야
너의 안경이 하얗게 변할 동안
나는 눈을 세 번 깜빡깜빡하고
그사이 두 번 입맞춤을 할게

양들은 색 전구를 켜러 집으로 돌아가고
목에는 아카시아 향기가 남았구나
너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아직 잊지 않았다
면매일매일 너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함께 호호 불어 가며 익은 앵두를 먹자

수많은 낮과 밤
피어오른 수증기가 우리의 머리에 폭설로 앉는 동안
나의 눈은 너의 곁에서
깜빡깜빡 입맞춤을 하고 있을 거야

배수연, <청혼>

 

청혼에 관련된 유명한 시인의 이야기가 있다. 아일랜드의 국민 시인 W.B.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의 이야기. 예이츠는 28년에 걸쳐 단 한 사람에게 다섯 번의 청혼을 했지만 모두 거절 당했다고 한다. 28년 동안 예이츠의 청혼을 거절했던 여인 모드 곤(Maud Gonne MacBride)은 자신이 예이츠의 청혼을 받지 않았음을 세상이 고마워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그렇게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마시려 했던 예이츠는 결국 인류를 위해 쓴 잔을 마시게 된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시를 썼던 예이츠 같은 시인마저도 청혼에 실패했다는데 문득 나 같은 게?’ 라는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여전히 꿈이다. 누군가에게 매일매일 선물을 주고 싶은 날들을 보내는 것.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그에게 돌려주고 싶은 것. 누군가에게 청혼을 한다면, 혹은 받는다면 우리는 두 편의 시로 언약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사랑은, 사랑을 통한 결혼은 다른 계절을 살던 이들이 만나 서로를 마주 보는 일. 오래된 거리와 지친 헝겊을 바라보듯 서로를 알아봐 주고, 그 곁에서 눈을 깜빡깜빡 입맞춤을 하는 일.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두 편의 시를 잘 포개어 나의 설렘을 전해주고 싶다.

, 드디어 붙잡혔네. 이제 내가 너를 붙잡을 술래가 될 차례야. 너의 팔에 그 시간을 모두 적어 줄게.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조금만 조금만 가까이 와봐.

나와

결혼해 줄래요?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 지성사, 2022)

배수연, 「조이와의 키스」 (민음사, 2018)

 

김슬기 작가의 <시와 노가리>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노가리를 앞에 두고 술잔 대신 시집을 듭니다. 술 대신 시를 나눕니다. 매주 일요일 저녁, 시에 취해 보는 건 어떨까요?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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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는 다양한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그 어떤 장르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가진 에세이를 통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때로는 희망차고 때로는 비참할 이야기. 그러나 아마추어처럼 달려들고 프로처럼 진지할 이야기. 변화가 두렵지만 변화해야 할 때도, 견디는 게 지겹지만 견뎌야 할 때도, 우리는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네, 우리는 영원히 쓸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달라질 것입니다. 견딜 때보다 벗어날 때 더욱 성장하는 가재처럼, 벗어남이 무한하다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영원처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술처럼 영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물성과 해체』의 공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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